임권택의 <짝코>(1980): 장인에서 작가로, ‘한국’영화를 만들다 암흑 속의 모색 | 1980~1984년

by.정종화(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2018-08-13조회 1,431

198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계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다. 국가의 학살을 시민의 항쟁으로 맞섰지만 그 결과는 한국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공수부대원들이 자행한 학살의 이미지는 ‘한국전쟁’의 참혹한 현장과 겹쳐지는, 아니 이를 훨씬 능가하는 잔인함으로 기억되었다. 박정희의 18년 체제가 무너진 그 자리, 다시 쿠데타로 들어선 신군부가 바로 그 배후였다. 곧이어 그들은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을 날조해 국민을 우롱했다. 한국의 극우 독재체제는 이렇게 연장되었다. 한국사회의 1980년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좌절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80년대 전반 영화계는 1970년대의 사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신 정권이 구축한 통제 정책이 승계되었고, 한국영화는 외화 수입쿼터의 대체물로 취급받았다. 당국은 한국영화 제작편수를 100편 내외로 설정하고, 등록된 20개의 제작사가 각 4편 이상을 의무적으로 채우도록 했다(1981년도 영화시책 기준). 그리고 2편 이상의 ‘우수영화’를 제작할 때마다 또는 대종상에서 최우수·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면 외화 수입쿼터 1편을 부여했다. 1980년부터 1984년까지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91, 87, 97, 91, 81편으로 100편을 넘기지 못했다. 1980년대는 단관 개봉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영화문화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 시점이다. 1980년 12월부터 방영된 컬러 방송으로 컬러TV가 빠르게 보급되었고, 비디오 매체의 인기가 극장 흥행을 잠식해갔다. 1984년 VTR 보급 대수가 50만 대를 넘었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 1980년대는 ‘안방극장’이 제대로 힘을 받기 시작한 때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그랬듯, 한국의 극장가 역시 대형영화와 저예산영화로 생존책을 모색했다. 전자는 70mm 외화의 리바이벌 상영, 후자는 괴기·무협·코미디 장르였다.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우울했던 시기, 임권택은 가장 잘나가는 감독 중 한 명이었다. 1970년대의 그는, 제작자에게는 우수영화를 안겨주는, 영화진흥공사에는 국책영화를 척척 만들어주는 감독이었다. 여러 영화학자에 의해 한국 ‘분단영화’의 기원으로 평가 받는 <짝코> 역시 기획의 외관상으로는 당국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반공영화였다. 이는 1980년 관제 영화제인 19회 대종상에서 우수반공영화상을 받았고, 1981년 20회 대종상에서 반공영화부문 특별상을 재차 받은 것으로 증명된다. 제20회 대종상영화제부터 우수반공영화상을 특별부문으로 변경해, 최우수반공영화상에도 외화 수입쿼터 1편을 부여하기로 했는데, <짝코>는 1981년에야 상영되는 바람에 그 첫 수상작이 되었다. 한국영화의 개봉 여부는 관심도 없던 시기였다. 정치사회적 혼란과 한국영화의 불황이 극에 달한 이때, 임권택 감독과 송길한 작가는 왜 <짝코>를 만들려고 했을까. 실제 영화는 어떤 계기로 기획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을까.

직업 감독에서 작가주의 감독으로
1934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임권택은 어린 시절 부친과 삼촌의 좌익 활동으로 그 역시 고초를 겪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중3 때 집을 떠나 부산에서 군화 장사를 했다고 한다. 1956년 정창화 감독의 도제로 영화계에 입문, 20대 후반인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 데뷔해 주로 사극과 액션, 전쟁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많을 때는 한 해 7~8편을 만드는 직업 감독으로 다작의 시기를 거쳤다. 그가 장르영화의 대가로 완성된 시기일 것이다. 영화 인생의 전환점이 된 작품은 52번째 연출작 <잡초>(1973)다. 이 작품을 계기로 작가적 자의식을 영화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정성일 평론가와 인터뷰하면서 그가 한 말을 옮기면 “<잡초>가 내 삶에 애정을 갖기 시작한 영화라면, <왕십리>(1976)는 내 살고 있는 땅을 사랑하기 시작한 영화”다. 1970년대 중반 한국영화계는 이장호, 하길종 등 ‘영상시대’ 감독들이 새로운 한국영화를 내놓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이제부터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구석에 몰린 느낌”을 받았다던 임권택의 회고에서,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이냐라는 뼈아픈 고민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그는 <족보>(1978), <짝코>, <만다라>(1981), <안개마을>(1982), <길소뜸>(1985) 등 작가주의 감독 임권택으로 평가되는 일련의 작품을 내놓기 시작한다. 그의 삶이 반영된 한국적인 주제를 놓고 치열하게 ‘한국’영화를 찾아가던 시기인 것이다. <서편제>(1993)의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100만 흥행 성공, <취화선>(2002)의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 등으로 세계적인 감독 반열에 올랐다. 2015년 102번째 작품 <화장>을 연출했다.

‘반공영화’가 아닌 ‘분단영화’
작가 송길한임권택이 <짝코>의 영화화를 위해 의기투합하게 된 이유는 바로 시대적 배경과 자기 성찰에 있었다. 그들이 이 영화의 기획에 착수한 때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좌절로 끝나고 신군부가 권력을 찬탈한 시점이다. ‘서울의 봄’의 대학생 시위대들이 그리고 광주의 시민들이 ‘빨갱이’로 둔갑되었다. 임권택에게 1980년은 “혼란기에 빠져든다고 해서 놀라기에는 너무 많은 혼란의 시대를 살아온” 자신을 반추할 수 있었던 때다. 그는 송길한 작가와 기존의 국책 반공영화를 벗어나고자 마음먹고, 좌익 빨치산의 이야기를 통해 좌우 이데올로기의 비극을 정면으로 다루고자 했다. 둘은 한 달 동안 여관방에 틀어박혀, 종군작가 김중희의 단편소설을 거의 새로운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영화는 전투경찰 송기열(최윤석)과 빨치산 부대 대장 짝코(김희라)의 30년에 걸친 비극을 세련된 플래시백으로 오가며, 열강의 대리전이었던 한국전쟁이 어떻게 개인들을 파멸시키는지 보여준다. 송기열은 평생을 바쳐 짝코를 추적하지만 결국 둘은 오갈 데 없는 부랑아들이 모이는 갱생원에서 만나게 된다. 이미 노인이 된 둘의 비극은 갱생원에서도 계속된다. 송기열은 무장공비 이력의 죗값을 받게 하기 위해 짝코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짝코는 수은을 먹여 송기열을 죽이려 한다. 영화 마지막, 결국 송기열은 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짝코와 함께 갱생원을 탈출한다. 하지만 이미 사회는 경찰들조차 무장공비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임권택은 영화를 통해 송 경사와 짝코가 국가의 꼭두각시였고, 더 나아가 한국전쟁 시기 남한과 북한은 열강들의 장기알에 불과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시나리오와 영화 본편을 대상으로 한 두 번의 검열을 통해 그의 직접적인 발언은 삭제되었다. 바로 다음의 두 장면이다. 6·25 특집 TV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출연한 한 미국인 교수가 한국전쟁이 열강들의 국지전 시험장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장면, 그리고 갱생원을 도망 나온 송기열과 짝코를 만난 경찰이 망실공비가 뭐냐고 물어보는 장면으로,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영화에는 검열의 흔적만 남아있다. 전자의 경우 TV에서 6·25 프로그램이 잠깐 나온 후 이를 본 짝코가 송기열에게 “저 사람들 말이 진짜라면 말이시… 나나 거그나 불쌍한 사람들이여”라고 말하는 장면만 남았고, 후자는 “망실공비?”라는 대사는 지워진 채 경찰의 입 모양만 남았다. 이는 “망실공비도 몰라”라며 송기열이 애처롭게 반응하는 대사에서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임권택은 흔적만 남기는 방식으로 검열에 순응했다. 하지만 영화의 본질적 메시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훗날 인터뷰에서 그는 이 대목의 아쉬움을 표했지만, 도리어 지금의 우리는 장르영화 그리고 국책영화로 단련된 그의 내공을 짐작하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바,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두 해 연속 반공영화상을 휩쓸며 국책 반공영화로서 인정받았다.

개인의 비극을 쫓아가는 정교한 플래시백
영화는 송기열과 짝코의 장장 30년에 걸친 비극적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정교하게 구축된 플래시백을 활용한다. 어쩌면 <짝코>는 태생적으로 서구의 영화 문법인 플래시백이 한국영화만의 그것으로 훌륭하게 수용된 첫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김기영의 <이어도>(1977)에서의 플래시백이, <시민 케인> (1941)와 <라쇼몽>(1950)의 그것에서 출발해 그만의 스타일로 뒤틀어진 것이라면, <짝코>의 플래시백은 고전적 의미에서 관객을 배려하면서도 임권택이 하려는 이야기, 그리고 메시지와 훌륭하게 조응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크게 8번 정도 플래시백을 사용한다. 송길한임권택이 공들여 배치한 플래시백은, 송기열의 입장에서, 짝코의 입장에서, 때로는 송기열이 짝코를 초대해 함께 진입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각자의 경험에서 이야기가 반복되며, 플래시백의 대미를 장식한다. 좌우익의 비극적 대립을 상징하는 두 인물의 이야기가 하나로 만나는 순간, 우리는 분단국가라는 현재를 상기해야만 할 것이다.
8번의 플래시백은 꼼꼼히 살펴볼 가치가 충분하다. 송기열은 갱생원에서 짝코를 발견했지만 그를 데리고 탈출할 형편이 아니다. 합숙소에서 연속극을 보던 송기열은 첫 번째 플래시백으로 들어간다. 전투경찰로 활약해 마을에서 인정받고 가정도 행복하던 시기다. 그날 밤 송기열은 짝코의 침상으로 가 두 번째 플래시백으로 이끈다. 송 경사가 짝코를 생포하지만 그를 놓치고 마는, 둘의 공통된 기억이다. 세 번째는 송기열을 죽이기 위해 거울 뒷면에서 수은을 긁어내는 짝코의 것이다. 지리산에서 수은 가루를 먹고 자살하려는 점순(방희)을 말린 뒤 송 경사에게 체포되기까지의 이야기다. 네 번째 플래시백은 다시 송기열의 것이다. 짝코의 고향집에서 그를 놓치고 불법 총기 소지로 경찰서에 잡혀갔다가, 지서장이 된 복만을 때리고 감옥까지 다녀온다. 불운은 연달아 닥친다고, 고향에 돌아오니 아들마저 죽었다. 다섯 번째 플래시백은 송기열이 짝코에게 자신을 파면한 상사에게 같이 가자고 말하는 장면에서 들어간다. 네 번째 회상의 앞 이야기로, 아내까지 자살하게 된 송기열의 비극에 짝코를 동참시킨 것이다.
합숙소의 장기자랑 장면, 짝코의 시점에서 여섯 번째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속초에서 그와 화숙(김정란)의 도화경이 마치 판소리 소리꾼의 ‘아니리’처럼 펼쳐진다. 이를 듣던 송기열의 시점에서 그가 화숙을 찾아간 뒷이야기가 일곱 번째 회상으로 펼쳐진다. 계속되는 장기자랑, 송기열은 다리가 부러지게 된 사연을 들려준다. 마지막 여덟 번째 플래시백이다. 그는 짝코가 탄 기차를 쫓다가 택시가 전복되어 다리마저 불구가 되었다. 이후 부랑아가 된 송기열은 여인숙에 들어갔다가, 옆방에서 쥐약을 먹고 자살하려는 짝코와 점순을 발견한다. 갱생원의 변소간에서 짝코가 송기열에게 그날 밤 점순의 안부를 물으며, 다시 짝코의 시점에서 여덟 번째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점순을 사창가에서 만나 둘이 자살하기까지의 이야기다. 이처럼 30년을 쫓고 도망친 둘의 이야기가 합쳐지며 영화는 마지막을 향한다.

“한국 사람이 아니고는 만들 수 없는 영화”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에서 정성일의 평가처럼, <짝코>는 1980년대 이후 임권택 영화의 원형임에 분명하다. 그가 장르영화를 통해 축적한 스타일이 만들려는 주제, 하고 싶은 이야기에 걸맞게 활용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그간 갈고닦은 전쟁 신의 연출은 잠깐 등장해도 존재감과 만만치 않은 의미를 발산한다. 짝코와 임신한 점순이 토벌대의 총탄을 피해 도망가는 장면이 그렇다. 화면에 슬로모션이 걸리면서 등장하는 김영동의 국악은 그 조합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개인의 비극을 더 넓은 차원으로 환기시키는 데 일조한다. 임권택이 “국악을 체계적으로 끌어안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영화부터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 송기열과 짝코는 고향에 가기 위해 기차에 올라탄다. 과연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짝코는 숨을 거두고 송기열은 희미하게 웃는다. 사실 이 장면은 결국 그들이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육신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 송기열은 아주 짧은 회상으로 아내와 아들과의 단란했던 시절을 떠올릴 뿐이다. 송길한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에는 이 장면이 호남선이 아닌 원주행 기차를 타고 아예 반대로 가는 것으로, 심의 대본에는 부산행 기차를 잘못 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영화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다는 듯 시나리오의 정보를 배제한다.

1980년대 전반의 대표 장르
국풍 ’81을 위시로 전두환 군사정권은 섹스·스크린·스포츠로 국민을 우민화하는 ‘3S 정책’을 펼쳤다. 당연히 에로티시즘에 대해서는 검열이 느슨해졌고 기다렸다는 듯 1980년대를 장식하는 에로티시즘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1981년부터 등장한 소극장 그리고 대여용 비디오의 붐이 에로영화의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1982년 넉 달 동안의 장기상영으로 31만 관객을 동원한 <애마부인>은 1980년대 에로영화의 어떤 상징이 되었다. 성적 스펙터클의 수위는 점차 높아졌고, 에로 장르는 현대 도시를 배경으로 한 것뿐만 아니라 ‘토속에로’라는 별칭을 얻으며 시대극과도 결합했다. 에로영화 일변도의 피로감 때문이었을까. 그 반대편에는 다양한 결의 멜로드라마가 관객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할리우드 화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한국영화 특유의 ‘신파적’ 멜로드라마를 극복한, 어떤 의미에서는 멜로드라마라는 틀을 빌려 사회에 대해 발언하는 영화들이 그것이다. 이때 <바람 불어 좋은 날>(이장호, 1980)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배창호가, 당대 관을 사로잡는 세련된 화법의 멜로드라마로 충무로의 성공 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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