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길종
Ha Gil-jong / 河吉鐘 / 1941  ~  1979
대표분야
감독
활동년대
1960,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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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병태와 영자 (하길종, 1979)
속 별들의 고향 (하길종, 1978)
한네의 승천 (하길종, 1977)
여자를 찾습니다 (하길종, 1976)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1975)
수절 (하길종, 1973)
화분(꽃가루) (하길종, 1972)
병사의 제전 (하길종, 1969)

수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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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경력

서울예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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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41년 4월 13일 부산 초량동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하명중은 그 집안의 막내였다. 다섯 살이었던 1945년 어머니를 여의게 되고, 한국전쟁이 터졌던 1950년, 아버지마저 잃고 만다.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하길종은 친척에 얹혀 살았다. 열여섯 살인 1956년 하길종은 형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고, 이듬해 중동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인 김지하를 만나게 된다. 이때부터 둘은 카뮈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4.19가 일어난 1960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해서 김승옥, 김현, 김치수, 이청준, 염무웅, 김주연 등을 만났다. 4.19와 5.16을 겪은 하길종은 실의에 빠져 여행한 후 자비를 털어서 '태를 위한 과거분사'라는 초현실주의풍의 시집을 엮었다.
졸업 후 잠시 신필름에 입사했으나 1965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샌프란시스코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서 사진예술과 미술을 공부한 후, UCLA 대학원에서 MA(이론 학위)와 MFA(실기 학위)를 모두 취득했다. 이 시기에 만든 그의 단편으로는 <어느 날>(1965), <나의 환자>(1967), <병사의 제전>(1969) 등이 있다. 특히 <병사의 제전>은 당시 미국에서 불고 있던 히피 운동을 동양인인 하길종이 자기식으로 소화한 것인데, MGM 영화사가 미 전역의 최우수생 4명에게 수여하는 메이어 그랜트 상을 수상할 만큼 탁월했다고 한다.
아서 펜 감독의 연출부를 했고, UCLA의 강사직이 보장되었지만, 그는 1970년 귀국했다. 귀국 후 곧바로 김지하 각본의 <태인전쟁>을 연출하려 했지만, 여건이 맞지 않아 이효석 원작의 <화분>(1972)을 연출했다. 푸른 집이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성적 탐닉을 그린 이효석 원작을 하길종은 단주라는 순수한 인물에게 가해지는 집단적이고 위선적인 폭력을 고발하는 영화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파졸리니 영화를 표절했다는 논란과 함께 평단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흥행에서도 실패했다. 1974년 한사군 시대의 폭군을 다룬 <수절>을 발표하지만, 역시 흥행과 비평에서 신통한 평가를 받지 못한 하길종은 새로운 전화를 다진다.
이렇게 해서 연출한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은 1970년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는 이길 수 없는 세상에 저항하는 무모한 젊음의 이야기, 그렇기에 두고두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최인호의 원작이 주는 신세대 풍속도와 낭만, 하길종의 각색이 불어넣은 시대에 대한 풍자와 허무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영화는 하길종의 전작처럼 검열에서 30분 가량이나 잘려 나갔다.
1976년 그는 청춘영화의 흐름을 나름대로 이어간, 김주영 원작의 영화 <여자를 찾습니다>를 연출하지만 비평과 흥행 모두 실패하고, 1977년에는 우수영화 선정을 노린, 오영진 원작의 <한네의 승천>을 연출했으며, 1978년에는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의 속편 <속 별들의 고향>을 연출하고, 1979년에는 <바보들의 행진> 속편인 유작 <병태와 영자>를 연출했다. 마지막 두 작품은 최인호 원작으로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병태와 영자>가 한창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던 1979년 2월 28일, 하길종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사후 유고 수필집 '백마 타고온 또또'(예조각, 1979)와 평론집 '사회적 영상과 반사회적 영상'(전예원, 1982)이 제자 박평식의 교정을 거쳐 출간되었다.
하길종은 영화 감독 외에도 많은 활동을 했다. 고려대, 중앙대, 서라벌예대, 서울예전 등에서 영화를 강의하다가 서울예전(현 서울예대)의 교수가 되었다. 그의 제자로는 평론가 박평식, 양윤모 등이 있다. 하길종은 또 비평가로도 활동했다. 외국이론과 작가를 누구보다 일찍 국내에 소개했으며, 동료 감독의 한국 영화에 대해서도 매서운 비판을 가한 걸로 유명하다. 특히 1977년, 1978년에 월간 ??뿌리 깊은 나무??에 연재한 월평은 특유의 직설적인 비평으로 많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비평의 일환으로 하길종은 번역도 했다. 그가 번역한 책으로는 '엑소시소트'(범우사, 1974), '뿌리'(한진출판사, 1977), '스타워즈',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한진출판사, 1977), '캐리'(한진출판사, 1978), '미지와의 만남'(1979) 등이 있다. 하길종은 또한 영화운동가이기도 했다. 유신체제에 빠져 암흑기를 걷고 있던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영화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1975년 이장호, 김호선, 홍파, 이원세, 변인식과 함께 영상시대를 결성해 침체에 빠진 한국영화를 위해 다양한 영화운동을 벌였다.
그의 영화는 젊음의 힘과 패기가 느껴지는 영화였다. 단편이 지니고 있던 초현실주의 경향이 국내 데뷔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하길종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저항의 코드를 청년문화에서 찾았고, 그것을 시대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영화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검열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결국 그는 다시 우회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문예영화를 만들기도 하고, 속편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연출한 문예영화와 속편 역시 1970년대 한국영화사에서 봤을 때 탁월한 작품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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