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 <
한네의 승천>(1977)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떠올렸다.
하길종 감독의 어떤 다른 영화보다 덜 표현적이지만, 이 작품은 더 전통적인 표면을 가지고 있다. 극작가 오영진이 발표한 ‘의례3부작’ 중 동명의 이야기를 각색해 완성된 시나리오로, 주인공은 동네 머슴 만명(
하명중 분)이다. 그는 신세를 비관해 자살하려고 하는 한네(
전영선)를 구해내 자신의 움막으로 데려온다.
언뜻 소재 면에서는 영화는 전통극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런데 연이어 등장하는 ‘환상 시퀀스’가 내러티브의 구조를 바꾼다. 모더니즘 방식으로 몽타주된 무성의 모노톤 화면들이 영화의 전체적인 감상을 뒤흔든다. 단언컨대 <한네의 승천>은 관객들의 기대를 거스르는 영화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장르적인 ‘초현실주의’나 ‘환상영화’ 등으로 소급해서 소개하기는 어렵다. ‘문예영화’라고 분류되는 것에서 짐작하듯, 특정한 영화언어를 구현하기 위해 만든 작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恨)’을 소개하는 통속적 민속극과 다르게, 영화는 인물이 아닌 ‘이야기’ 중심으로 서사를 다룬다. 기억의 ‘주체’가 일정하지 않고 바뀌어서 소개되는 것도 특징이다. 어쩌면 이 영화의 현대성은 당대 ‘<영상시대> 그룹’이 도전했던 ‘새로운 영화언어 찾기’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총 두 가지의 회상장면 중 첫 번째는 한네가 주인공이다. 그녀에 따르면 자신은 어떤 ‘아저씨’의 선택으로 부모와 떨어져 생활하게 됐다. 이후 원치 않은 곳을 떠돌며 살았고, 그 과정에서 삶의 목표를 찾았다. “어디로 가려고?” 묻는 아저씨의 질문에 그녀는 “꽃신을 신어야지요”라고 답한다. 추상적이지만 숭고한 이상향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회상은 만명의 것이다. 어린 만명을 보면서 “쌀밥 먹고 싶지?”라 묻던 다정한 어머니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어느 바람 부는 아침에 그녀는 ‘선녀’가 되어 그의 곁을 떠났다. 만명의 기억에서 어머니는 한네의 얼굴과 동일하게 묘사된다. 그런 그를 보면서 한네가 말한다. “서방님은 나와의 인연이 아니라, 어머님의 아들일 뿐이다”라고.
이 두 번째의 회상 이후에 일상은 조금씩 어긋난다. 영화에는 ‘환상 같은 현실적 장면들’이 차례로 등장하는데, 그 장면들 모두에 ‘한네와 닮은 여성들’이 나타난다. 만명이 마주치는 빨간 옷의 ‘술집작부’가 대표적이다. 그녀가 살해당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꿈인지 생시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혼돈스럽게 그려진다. 그리고 한네를 ‘만명의 어머니’라 착각하는 재수 영감(
황해)의 환상에도 그녀의 얼굴이 등장한다. 기필코 감추려던 늙은이의 불순한 만행이 그 여린 얼굴을 통해 세상에 드러난다.
생각해보면 ‘한네’는 단 한 번도 땅 아래에 뿌리내린 적 없는 캐릭터다. 실존적 인간으로서 그녀는 소개되지 못한 채 스크린에서 사라진다. 애초 ‘놀이패’ 생활을 하던 어린 시절도 그랬고, 아저씨를 따라 나선 이후에도 그녀는 정착한 적이 없었다. 이곳 ‘선녀동’에 당도한 후로도 마치 선녀처럼 생활했다. 단적으로 그녀의 새 공간인 ‘만명의 방’으로 카메라는 다가가지 못한다. 마치 ‘헤스티아의 신전’을 그리듯 영화는 그곳은 금줄 쳐진 터부시된 공간으로 묘사한다. 욕망 그득한 프리아포스들이 그 장벽을 깨려고 하지만, 모두 내쳐진다. 그녀는 상징적인 처녀로서 생을 마감한다.
만일 표현이 아닌 기억이나 주관적 시점 등의 ‘환상 시퀀스’가 이 영화의 특이점을 드러낸다면, 영화 외향이 내부적 요인들과 상충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길종 감독은 마치 아이스킬로스라도 된 듯 한국식 리얼리즘을 그리스식 비극으로 연출한다. 그가 운명을 선호하는 감독이라 생각했던 적은 없지만, 적어도 이 영화의 양식에서 우리는 서구 비극의 운명성을 감지한다. <한네의 승천>이란 제목부터 아이러니를 감추고 있다. ‘로망스’를 꿈꾸며 시작된 영화가 ‘불안’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어쩌면 감독이 전작 <
수절>(1973)이나 <
바보들의 행진>(1975)에서 겪었던 과격한 행정 검열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미학적인 자기검열을 행한 것인지 모른다. 소재가 아닌 구조의 영역에서, 이 모든 내부의 이야기들이 상쇄되어 가리어진다. 주인공이 겪는 자기징벌적인 사랑의 행로는 결국 외향적인 전통의 틀과 어긋난다.
<한네의 승천>을 한국적 영화라고 소개하기 어렵다는, 간단하지만 역설적인 첫 인상을 소개하려고 먼 길을 돌아온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작품의 과격하고 구조적인 발상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어쩌면 최근의 한국영화가 겪는 경계에서의 함정을, 이 작품은 기묘하게 비켜나간다. 고의적으로 작성된, 날카롭고도 잔인한 프레임을 지닌 심플한 드라마를 바라본다. 이 극이 비록 설득력을 갖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하더라도, 시대가 비켜야할 함정을 영리하게 뛰어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건 일종의 게임일 수 있다. 점점 더 지능적이 되어야만 하는 새로운 시대의 영화에 대해 <한네의 승천>은 일종의 우화로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