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완성도 있는 작품을 촬영하다” 1990년대 모 영화잡지에 실린
정광석 촬영감독에 대한 기사 제목이다. 1962년 데뷔 이후 45년간 180편이 넘는 작품을 촬영했고 국내외 영화제에서 촬영상을 25회나 수상한 그에게 잘 어울리는 수식이다. 그는 1960년대 한국영화계 황금기를 일궈낸 주역이었고 1980, 90년대 데뷔하는 신인 감독들의 조력자였으며 2000년대 DP시스템을 도입, 한국영화 촬영 환경의 변화를 시도한 도전가였다.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에 유년 시절을 보냈다. 마땅한 유흥거리가 없던 고단한 어린 시절, 서대문 동양극장에서 몰래 본 영화 속 스크린 세상은 그에게 도피처이자 꿈이었다. 막연하게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어릴 적 생각은 운명처럼 20대의 그를 영화계로 이끌었다.
구술자는 6·25전쟁기에 군에 입대해 육군본부에서 사진 촬영과 현상을 담당해 촬영 기술의 기본을 익혔다. 그리고 이때 전 국기원 원장인 엄운규 사범의 눈에 띄어 제대 후 청도관에서 태권도를 수련했지만 생활이 나아지지 않아 사범의 꿈은 포기했다. 마침 홍성기 감독의 연출부로 있던 지인의 집요한 설득으로 <
장화홍련전>(
정창화, 1956) 조명부로 영화계에 입문한다. 이 작품에서 그는 김영순 촬영감독의 눈에 들어 이후 촬영부로 옮겨갔고
김영순,
이성휘 촬영감독의 문하에서 수련을 이어갔다. 그리고 1962년
이봉래 감독의 제안으로 <
새댁> 촬영감독으로 데뷔한다. 데뷔작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수많은 작품의 촬영을 꾸준히 맡아 했고 1968년 한 해에만 12편의 작품을 촬영하기도 했다. 불가능할 것만 같은 작품 편수에 대해 그는 당시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을 따라가면 많은 작품을 동시에 촬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후시녹음 시대에나 가능한 일이지만 당시 겹치기 촬영이 당연시됐던 몇몇 흥행 배우들만큼이나 그 또한 인기 촬영감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상하기 힘든 겹치기 촬영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유능한 기술뿐 아니라 모든 작품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능력, 현장에서의 순발력과 직관, 잘 짜인 조수진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생각하는 촬영감독은 단지 감독의 요구대로 촬영하는 오퍼레이터가 아니라 미학적 판단과 결정에 관여할 수 있는 자의식을 지닌 예술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직접 경험으로 보여준 촬영감독의 역할이기도 했다. 조수 시절을 함께 보낸 임권택 감독과 각각 데뷔 후 재회해 작품을 함께 했지만 결국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결별했고,
장일호 감독의 <
황혼의 부르스>(1968)에서는 스펙터클한 액션 장르의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화면비가 넓은 시네마스코프 대신 스탠더드 사이즈를 선택해 선명한 컬러와 역동적인 액션 화면을 만들어냈다.
시카고영화제에서 촬영상을 받은 <
땡볕>(
하명중, 1984)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춘호가 죽어가는 순이를 지게에 지고 물길을 거슬러 가는 장면이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배치된 인물들이 잔인한 운명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인데 이 장면은 촬영을 끝내고 철수하는 중 그가 우연히 바라본 풍경에 매료되어 연출자에게 제안해서 만들어낸 장면이다. 촬영감독은 종합예술인이라 생각하며 영화의 미학적 판단과 제안에 적극적이었던 그는 1980년대와 90년대 데뷔한 신인감독들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배창호 감독의 <
꼬방동네 사람들>(1982),
곽지균 감독의 <
겨울 나그네>(1986),
박종원 감독의 <
구로 아리랑>(1989),
이현승 감독의 <
그대 안의 블루>(1992),
김지운 감독의 <
조용한 가족>(1998) 등 당시 주목할 만한 신인 감독들의 데뷔작을 촬영했고 배창호 감독과는 이후 <
적도의 꽃>(1983), <
고래사냥> (1984), <
깊고 푸른 밤>(1985) 등 모두 8편의 작품을 함께 했다. 그에게 의견을 구하고 항상 그의 말을 경청했던 배창호 감독과는 여러 안을 가지고 상의하며 작업했기에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이 중 로드무비인 <고래사냥>은 로케이션 촬영이 다수였고 단 한 번의 촬영 기회밖에 없는 상황이 대부분이라 그의 순발력과 직관적인 촬영이 특히 빛을 발한 작품이다.
2000년대에 그는 영상의 미학적 부분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오퍼레이터를 따로 두는 DP시스템을 충무로에 도입했다. 물론 제작비와 기타 제반 시스템 문제 때문에 지속될 수는 없었지만 한국영화 영상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한 노장 촬영감독의 시도라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겠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과 고집을 지녔지만 과거 한국영화의 영세한 제작 환경에 맞춰 빠르고 신속하게 촬영을 마칠 수 있었던, 당시 영화계가 원하는 유능한 촬영감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