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우직녀> 촬영장에서 본 김삼화 자의식 강한 명문 학사 출신의 첫 여배우

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18-08-20조회 3,567

김삼화(金三和, 본명 김덕화)는 자의식이 강한 여배우였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안종화 감독이 <견우직녀>(1960)를 찍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왔을 때였다. 나는 그때 안 감독의 헌팅 현장에 김삼화와 동행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가 이예성과 함께 나오는 로케이션도 지켜봤다. 그중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천지연 폭포의 목욕 장면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김삼화)가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던 농부 견우(이예성)가 이 사실이 발각되자 선녀의 옷을 집어 들고 달아나는 대목이다. 그때 나는 대학 3년생 신분으로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1959년 이른 여름이었다. 내가 가까이서 본 김삼화는 좀처럼 웃지 않는 배우였다. 웬만해선 스태프들과 잘 어울릴 텐데 그러지 않았다. 이 영화에 앞서 <비련의 섬>(정창화, 1958) 촬영 때 감독과 시비가 붙어 출연을 거부한 것도 그녀의 자존심을 엿보게 하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당시 한국의 여배우로서는 드물게 명문대(서울대학 미술대)를 나온 학사 출신이었다.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삼화는 6세 때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질을 보였다. 전통춤의 거장 한성준(韓成俊, 1875~1941)으로부터 지도를 받고 15세가 되는 성신여중 재학 시에는 미국 대통령 특사 환영 연회의 공연자로 뽑혀 ‘천재 소녀 무용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1955년 김기영 감독의 <양산도>의 주연으로 발탁되면서 무용가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 대신 무용연구소를 차려 후진을 양성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잦은 출연 교섭 때문에 이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전성기는 <양산도> 이후 <논개> (윤봉춘, 1956), <나는 너를 싫어한다>(권영순, 1957), <이국정원>(전창근, 1957), <첫사랑>(송국, 1958), <영원한 내 사랑>(윤봉춘, 1958), <비련의 섬> 등에 출연한 4년 남짓의 시기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에는 <견우직녀>와 <눈물어린 발자국>(최인현, 1962) 두 편을 제외하고는 <연산군>(신상옥, 1961), <대심청전>(이형표, 1962), <대도전>(노필, 1962), <차이나타운>(전창근, 1963), <진성여왕>(하한수, 1964), <지옥은 만원이다>(이강원·이용민, 1964), <명동에 밤이 오면>(이형표, 1964) 등 모두 조연급이었다. 이미 이 시대의 판세는 최은희김지미, 문정숙 등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내가 김삼화의 출연 영화를 보기 시작한 것은 <나는 너를 싫어한다>부터였다. 문단 등용의 관문인 한 월간 문학지의 시 추천을 받고 한창 가슴이 부풀어 있던 1957년 5월 말이었다. 개봉관인 수도극장(스카라의 전신)에서였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느낌이 각별하다. 그 뒤 <첫 사랑>을 비롯한 <영원한 내 사랑> <비련의 섬>을 재개봉관에서 보고, 그녀의 후기 출연작에 속하는 <차이나타운> <진성여왕> <지옥은 만원이다> 등 서너 편을 제외하고는 거의 관람했다.

특히 최인현이 처음 메가폰을 잡은 <눈물어린 발자국>은 만리동 고개에 있던 동성영화사 녹음실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다. 6?25전쟁으로 인해 부모와 헤어지게 된 남매가 갖은 시련을 딛고 다시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는 내용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김삼화의 대사는 성우가 맡았다. 야간 통행금지가 실시되던 때여서 녹음이 늦어지는 날에는 성우들이 동성영화사 앞에 있는 봉래여관에 묵었다. 그 시기에 나는 이 영화사 기획실의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동안 그녀가 나온 16편 내외의 출연작 가운데 눈에 띌 만한 연기나 작품성을 가진 영화가 보이지 않는다.

김삼화는 <양산도>에 앞서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룬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에 춘향 역으로 뽑히는 좋은 기회를 맞은 적이 있다. 이 감독은 오래전에 알고 있던 김삼화를 염두에 두고 무용연습을 시켰다. 그런데 이 사실을 눈치챈 조미령의 언니가 스태프들을 부추겨 선발 방식을 카메라 테스트로 바꾸는 바람에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김삼화는 조명과 카메라를 정면으로 받게 해 호떡처럼 보이게 했으나, 조미령은 음양을 살린 조명과 카메라에 힘입어 천하일색 미녀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춘향전’의 춘향 역」 1965년 10월호 70쪽) 춘향을 향한 김삼화의 꿈은 이렇게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김삼화의 아버지는 무성영화 시대에 활약한 김택윤(金澤潤)이다. 보성전문학교를 나와 일본제국키네마동방회사의 배우로 있다가 이구영 감독의 <쌍옥루>(1925)에 출연하고, 1927년 자신의 예명을 내세운 김택윤영화사를 세워 <흑과 백>을 감독·주연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흥행 실패로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는 슬하에 덕화(德和), 대화(大和), 희자(喜子) 삼남매를 두었는데, 셋째 사위가 서울대학 미술대 교수를 지낸 이만익(李萬益, 1938~2012) 화백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의 미술감독을 맡은 바 있는 이 화백은 생전에 나에게 장인의 본명과 생년월일, 사망일을 알려주어 그동안 공백으로 남아있던 이 부분을 채우게 해주었다. 김택윤은 예안(禮安) 김씨로 본명은 천규(天奎)다. 1901년 2월 3일 출생으로 1959년 6월 19일 작고했는데, 이 화백이 결혼하기 전이라서 자신은 장인을 뵙지 못했다고 했다.
김삼화는 1964년 일본 감독 나루세 미키오의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1960)를 그대로 옮긴 이형표 감독의 <명동에 밤이 오면>을 끝으로 영화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애미에 정착했으나 그녀가 언제 도미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인터넷상에 그녀의 신변을 둘러싼 여러 얘기가 나돌고 있지만 나로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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