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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춘
Yun Bong-chun / 尹逢春 / 1902 ~ 1975
대표분야
감독, 배우, 제작/기획
활동년대
1920, 1930, 1940, 1950,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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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삼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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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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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유관순
(윤봉춘, 1966)
애정삼백년
(윤봉춘, 1963)
여인천하
(윤봉춘, 1962)
황진이의 일생
(윤봉춘, 1961)
한말풍운과 민충정공
(윤봉춘,남홍일, 1959)
유관순
(윤봉춘, 1959)
인생대학 일년생
(윤봉춘, 1959)
승방비곡
(윤봉춘, 1958)
콩쥐팥쥐
(윤봉춘, 1958)
영원한 내사랑
(윤봉춘, 1958)
수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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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춘사국제영화제 (춘사영화제)(1990)
:
특별공로상(추서)(
)
주요경력
1954년 한국영화인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
1956년 한국영화인단체총연합회 회장
1963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1993년 8월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기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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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순결과 형극 -한국영화에 나타난 유관순 열사의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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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희(영화평론가)
2019-03-04
한국영화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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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도서] Historical Films about the Korean Empire
by.
Lee Sun-jin,
2018-08-09
발행일
2012-07-01
[영화잡지] 씨네팬 1961년 5월호
발행일
1961-04-01
[영화잡지] 스크린 1956년 11월호
발행일
1956-11-01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윤봉춘의 정확한 고향은 함남 정평이지만, 실제로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함남 회령이었다. 그는 회령에서 평생 친구인 나운규와 사귀게 되었고, 이 인연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고 할 수 있다. 윤봉춘은 회령 신흥학교를 나와 북간도 명동학교를 다녔으며, 이후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3ㆍ1 만세시위와 ‘도판부’ 사건으로 두 차례 검거되어 대략 1년 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으며, 출옥한 이후 회령으로 돌아가 교회에서 서무를 보며 지냈다. 윤봉춘을 영화계로 이끈 것은 친우 나운규였다. 나운규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스틸을 보내며 그의 서울행을 권유하였고, 결국 윤봉춘은 1927년 조선키네마 작품으로 나운규가 감독을 맡은 <들쥐>를 통해 배우로서 데뷔하였다(이영일6). 나운규가 조선키네마를 탈퇴하고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했을 때도 윤봉춘은 나운규프로덕션으로 옮겨서 나운규의 <잘 있거라>에 출연하였다(동아일보a).
나운규와 함께 여러 영화에 출연하던 윤봉춘은 나운규의 독단에 반기를 들고 나운규프로덕션에서 나온 이후, 1931년 대구 대동영화사의 제1회 작품으로 김영찬 원작의 <도적놈>을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였다. <도적놈>은 노동과 야학활동을 하던 젊은이들이 세상의 세파에 의해서 결국 무서운 도적놈으로 변했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였다. 주인규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검열당국에 의해서 가위질을 많이 당했다고 한다(조선일보a; 조선일보b; 동아일보b; 조선일보c). 이어서 두 번째 작품으로 엑스키네마 제2회 작품인 <큰 무덤>의 감독을 맡았다. 이 영화는 간도에서 일본군이 독립군과 민간인에 자행한 대량살육을 영화화한 것이었다. 아마도 1920년 일본군이 감행한 ‘간도출병’의 경험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큰 무덤’이란 영화 제목은 일본군이 학살한 독립군과 민간인을 파묻은 무덤을 뜻하는 것으로 매우 민감한 내용이었지만, 당시 검열자들이 이런 제목의 의미를 알지 못했고, 영화 내용도 각색을 했기 때문에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이영일6). 참고로 윤봉춘이 감독을 맡은 <도적놈>과 <큰 무덤>에 출연한 신인여배우 하소양은 당시 윤봉춘과 결혼한 사이였다. 둘은 1929년 왕덕성, 김보신 부부의 소개로 결혼을 하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1933년 결별하였다고 한다(조선일보d; 이영일6).
1931년에는 이명우, 이경선, 이구영, 박제행 등과 함께 화조영화동인제작소를 조직하고, 조선고대극 제작에 노력하기도 하였지만, 1932년 다시 나운규와 재회하여 <개화당 이문>(1932)에 김옥균 역으로 출연하였다(매일신보; 동아일보c; 이영일6). 이후 나운규가 죽기 전까지 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특히 한양영화사 한강통촬영소에서 나운규가 감독을 맡아 만든 전발성 영화 <아리랑 제3편>에서 김선생 역을 맡아 나운규, 신일선 등과 함께 출연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첫 번째 전발성 영화를 목포로 했었지만, 기술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이명우 감독의 <춘향전>(1935)에 그 자리를 내어준 영화였다(동아일보d; 동아일보e; 이영일6). 식민지 시기 윤봉춘의 영화계 활동은 1940년 최인규의 <집 없는 천사>가 마지막이었다.
해방 이후, 윤봉춘은 계몽문화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윤봉길 의사>, <유관순> 등의 영화를 연출하는 것으로 영화계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경향신문a; 경향신문b; 경향신문c). 감독이자 제작자로 활발히 활동하던 윤봉춘은 나운규 20주기를 기념하는 추모기념작 <아리랑>(1957)에 신일선, 석금성 등 왕년의 배우들과 함께 출연하기도 하였다(경향신문e). 감독, 배우 이외에도 영화계 원로로서 다양한 단체 활동에도 관여하였다. 우선, 1955년부터 논의되어 오던 영화인단체 통합 노력의 결과인 한국영화인단체연합회에 참여하여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경향신문d). 그리고 1962년에는 한국영화인협회 초대 이상장이 되었으며, 1963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동아일보f; 경향신문f). 1968년에는 영화계의 원로 복혜숙, 성동호, 김성춘, 이규환, 이창근, 임운학, 김일해, 이재명, 양주남과 함께 한국영화최고회의를 발족시켰다. 61세 이상의 영화인으로 30년 이상 영화계에 종사한 이들이 모인 이 단체는 자신들의 과거 활동을 중심으로 한 자료수집을 통해 영화사를 복원할 계획을 가진 단체였다(경향신문g).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던 윤봉춘은 1975년 10월 21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는 영화인협회장으로 치러졌다(동아일보g).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7년 10월 12일 3면.
동아일보b 1930년 10월 30일 5면.
동아일보c 1931년 4월 11일 4면.
동아일보d 1936년 2월 7일 5면.
동아일보e 1936년 5월 14일 3면.
동아일보f 1962년 1월 6일 4면.
동아일보g 1975년 10월 21일 7면.
조선일보a 1930년 8월 24일 석간5면.
조선일보b 1930년 9월 20일 석간5면.
조선일보c 1930년 10월 31일 석간5면.
조선일보d 1931년 2월 28일 석간5면.
매일신보 1931년 4월 10일 5면.
경향신문a 1946년 10월 8일 4면.
경향신문b 1947년 11월 23일 4면.
경향신문c 1948년 8월 8일 2면.
경향신문d 1956년 3월 7일 4면.
경향신문e 1957년 1월 24일 4면.
경향신문f 1963년 3월 2일 5면.
경향신문g 1968년 7월 22일 5면.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윤봉춘>>6, 소도, 2004.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아호 금원(琴園). 1902년 3월 23일 윤득주와 최성의의 8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동학군에 가담했다가 도망자 신세가 된 아버지 때문에 잠시 머물게 된 함남 정평에서 태어났으나 북간도로 가는 도중 정착하게 된 함경북도 회령이 실제 고향이 되었다. 관립인 회령 신흥보통학교 고등과를 나와 만주 북간도 명동 중학 졸업. 1921년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갔으나 중퇴했다. 이 과정에서 평생 친구가 된 나운규와 사귀게 된다. 신흥보통학교 고등과 시절 그는 회령의 만년좌라는 극장을 빌어 나운규와 함께 소인극을 했다. 나운규가 대본과 연출을 맡고 그가 짝사랑한 윤마리와 윤봉춘이 출연한 동네 아이들의 연극이었다. 그들은 그때 이미 남다른 데가 있는 '조숙한 광대감'이었다. 그는 독립군 양성소로 통하는 명동중학에서 다시 만난 나운규와 짝이 돼 간도의 애국지사들이 발행한 독립신문들 회령까지 배달하는 심부름을 했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 4월에는 한 목사의 부탁으로 교회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시위 행렬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때 학생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몰려 체포, 청진 형무소에서 6개월 간 복역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출옥한 뒤에는 광복군 지대의 도판부에 가담하여 보다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다. 도판부란 광복군이 간도에서 회령으로 들어갈 때 사전에 기차 터널이나 전신선을 파괴하는 일종의 결사대였다. 한창 이성에 눈뜰 나이에 그는 조국이 처한 현실을 생각했다. 그러나 지식을 더 쌓아야한다는 인식 아래 상경. 학업을 계속했다. 그는 나운규와 하숙을 같이 하며 거의 매일 우미관이나 단성사를 찾아가 <명금>(1915),<동도>(1920),<철로의 백장미>(1922)따위의 영화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어느 새 그의 가슴에 영화를 향한 꿈이 가득했다. 그가 은막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27년 나운규 감독의 <들쥐>였다. 친구따라 강남 간다고 이미 영화계에 자리잡은 죽마고우의 권유로 고향에 돌아와 돌보고 있던 교회일을 그만 두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들쥐라고 불리는 방랑자들이 못되게 구는 포악한 부자를 골려주고 그의 손아귀에 들어갈 뻔한 여자를 빼돌려 애인에게 돌려준다는 내용으로 주연인 나운규외에 신일선,주삼손이 출연했다. 잇따가 <금붕어>(1927),<사랑을 찾아서>,<사나이>(1928)등에 출연했다. 홍개명의 <사나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나운규가 감독 주연한 것이다. 그에게 기다리던 감독의 기회가 주어진 것은 1930년대 대구에서 창설된 대동영화사에 의해서였다. 주연도 맡게 된 이 감독 데뷔작은 외국 유학을 보채다가 거절당하자 자기 집을 털게 된 아들이 전화위복으로 구두쇠인 아버지를 설득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 감독작 역시 주연까지 맡은 <큰 무덤>(1931)으로 일본 경찰에 생포된 독립군이 총살당한 후 한 자라이 매장돼 큰 무덤을 이룬다는 줄거리. 그는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 독립군 역을 소화했다. 이 영화의 모티브는 연회전문 시절에서 비롯되었다. 그때 고향인 회령에서는 일본 군대가 광복군 토벌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두만강 연안에서 죽은 한국인 수가 무려 3천 7백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것도 총으로 쏴 죽인게 아니고 칼로 사람의 목을 쳐서 죽이는 잔인한 방법을 썼다. 그래서 생매장되다시피한 떼죽음의 무덤이 늘어났다. '큰 무덤'이란 유행어가 나돌게 된 배경이다. 그는 몇 년동안 전해들은 말을 머리 속에 간직해두었다가 영화화한것이다. 이 사이 <승방비곡>(1928),<노래하는 시절>(1930),<수일과 순애>(1931),<개화당이문>(1932),<무화과>(1935),<아리랑 3편>,<오몽녀>(1937)등에 출연했다. 세 번째 메가폰을 잡은 것은 <큰무덤>을 내놓은 지 7년만이었다. 출연은 하지 않고 각색과 감독을 맡은 <도생록>(1938)이 바로 그것이다. 부잣집에 머슴살이 하는 노인과 그의 딸이 밟게 되는 기구한 인생살이가 이 영화의 테마. 이금룡,김신재,최운동 등이 출연했다. 촬영에 들어간 지 1주일만에 끝냄으로써 영화사상 유례가 없는 단시일 촬영기록을 세운 셈이다. 그런데 평가는 영화 자체보다는 원작에 대해 주로 이루어졌다. "만약 '도생록'도 유치진씨의 작품은 작품이더라도 그가 어느 영화 제작인의 주문을 받고 영화대본을 제공한데 그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어느 자리에서와 같은 가치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을 터이다.(중략) 금년 정월 리얼리즘과 결별한 류치진씨는 그뒤의 첫 작품인 만큼 '도생록'에서 그의 새로이 체득한 바 문학하는 절도를 보여줄 것이 분명하다 하였다. (중략) 가볍지 않은 기대밑의 시나리오 도생록을 읽던 나는 혹 기대가 과분했던 소치인지는 모르겠어도 몇 번이나 잡지를 내던지려 했고 급기야 다 읽고 나서는 가졌던 바 기대를 완전히 실망과 바꾸고 말았다."고 비판한 최만식의 글(문학과 영화,조선일보,1938.6.16~18)이 그 대표적인 예. 네 번째 감독작 <신개지>(1942)는 논에 물을 대다가 이웃 청년과 싸워 상해치사를 하게된 농부의 아들이 옥고를 치루고 나온 후 겪게 되는 고초와 새 출발을 그린 최운봉, 이금룡,문예봉 출연의 통속극이다. 그는 조국광복을 애국지사들의 항일 투쟁을 그린 <윤봉길 의사>(3.1혁명기)(1947),<유관순>(1948)등으로 맞이한다. 계속해서 <애국지사의 아들>(1949),<성불사>(1952),<고향의 노래>(1954)를 내놓고 <처녀별>,<논개>(1956)등 사극과 <다정도 병이런가>(1957),<영원한 내사랑>(1958),<인생대학 1년생>등 멜로드라마 등을 선보였다. 특히 그는 <유관순>을 7~8년 주기로 세 번이나 영화화 하였다. 그의 민족의식의 일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집착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일제 말기에 대부분의 영화인들이 친일영화 제작에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흔적을 보이지 않았던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는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장남 삼육은 시나리오 작가이며, 삼녀 소정은 연극배우로 같은 길을 걷는 오현경의 아내이기도 하다. 공직으로 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1954), 한국영화인단체총연합회 회장(1956),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1963)등을 역임했으며, 1966년 <유관순>까지 모두 23편의 연출영화를 내놓았다. 1975년 10월 21일 서울 사당동 자택에서 74세를 일기로 별세한 그의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루었다.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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