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의OST]축제 (임권택, 1996) 작곡가: 김수철

by.문상윤(영화음악 수집가) 2014-06-30조회 14,651
 축제 (임권택, 1996)

“흔히 말하는 노인들의 치매증이라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의 생애를 오늘에서 옛날로 다시 한 번 거꾸로 살아가는 일이었다. 노모가 이미 사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찾으실 때는 두 분이 한참 새살림을 일구고 있을 무렵으로, 시어머니 저녁상 걱정을 할 때는 당신이 갓 시집오신 젊은 새색시의 시절로, 그리고 옷 보퉁이를 싸들고 집을 나서실 때는 시집도 오기 전의 그 아득한 처녀 적으로... 그렇듯 자꾸 옛날로 돌아가고 계신 때문이다.” 영화 오프닝에 흘러나오는 작가 이준섭의 내레이션은 영화 내 관통하는 그의 동화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 속 이야기와 맞물리며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를 되새기는 중요한 화두로 다가온다. 한국인의 가족과 고향에 대해 그리며 장례라는 의식을 통해 변해가는 현대인의 초상과 남겨진 자들의 심리를 두런두런 펼쳐내는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정갈한 풍취가 있다. 이미 거장으로 우뚝 솟은 임권택 감독의 이 작은 소품은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묵직하고 올곧은 만듦새를 보여주진 않지만, 기록영화 같은 리얼함과 액자식 구조 속에 자리한 동화극을 병치시키며 색다른 반향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축제>는 죽은 자를 보내기 위한 한마당이자 산자를 단합하기 위한 살풀이로 임권택 감독의 한국적인 시선이 무엇보다 잘 나타나는 영화다.

축제,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레란다
축제,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레란다
 
임권택 감독의 <축제>는 소설과 영화가 같이 기획되었다. <서편제>의 원작을 담당하기도 한 소설가 이청준과 의기투합해 임권택 감독은 서로 같으며, 서로 다른 영화와 소설을 완성해냈다. 기둥 골자는 비슷하다. 치매를 앓던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고향을 찾은 유명작가 이준섭이 전통 장례 준비를 하며 겪는 일들을 가감 없이 담고 있다. 홀로 노모를 모시던 형수의 시원섭섭함과 작가 자신이 직접 모시지 못한 데서 오는 죄책감, 냉대를 견디다 못해 가출한 이복 조카의 등장과 작가를 취재하러 온 기자, 쉴 새 없이 쏟아져 오는 문상객들까지 다양한 인물들과 각종 사연이 충돌하는 이 공간(과 기간)을 통해 현재 대한민국 사회를 단적으로 조망하고자 한 셈이다. 두 장인들의 시각과 매체에 따른 차이가 부분부분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온갖 갈등이 부딪치고 소동이 일어나며 화합하고 용서하는 자리로서 장례식을 축제로 바라보는 본령만큼은 일치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이청춘 소설에는 없는 다른 게 있다면 바로 음악이다.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김수철의 음악은 동화와 기록물, 군상극을 한데 아우르는 끈끈한 아교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김정길김영동 그리고 신병하로 이어지는 대가들과의 음악 작업으로 80년대부터 90년대 초를 헤쳐 온 임권택 감독은 <서편제>와 <태백산맥>에 이어 <축제>에서도 김수철을 음악적 동반자로 택했고, 그 신임에 응하듯 그는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었다.

김수철
김수철

더벅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대학생이 거지도사와 예쁜 벙어리와 함께 고래를 찾으러 나선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면 맞다. ‘일곱 빛깔 무지개’와 ‘나도야 간다’, ‘젊은 그대’를 부르며 헤비한 기타 사운드로 깡충깡충 뛰던 모습도, ‘못다 핀 꽃 한 송이’와 ‘별리’를 찡그리며 애잔하게 부르던 모습도 맞다. 70년대 말 작은 거인으로 등장해 80년대 초 대중가요와 연기를 섭렵한 김수철은 (짧았지만 강렬한) 그 시대의 아이돌이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가슴 속에 담아둔 소리에 대한 고민들과 새로운 시도를 위해 노력하고 또 변신했다. 80년대 중반 그 모든 인기를 뒤로 하고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소리’에 정진한 김수철은 어느새 브라운관 무대 위에서 모습을 비치기보단 그 뒤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 많아졌다. 국악인을 찾아다니며 사사한 그는 본격적으로 국악 앨범을 내놓았고, TV 드라마부터 영화, 연극, 무용, 행사음악까지 다양한 범주로 활동을 넓혀가며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장했다. 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이나 88년 서울 올림픽 전야제 음악을 담당했고, 87년 제9회 대한민국 무용제 대상 작품 ‘영의 세계’를 작곡하는 한편, <고래사냥 1, 2>와 <두 여자의 집>, <성 리수일뎐> 등 영화음악을 맡았다. 국악에 대한 그의 관심은 기타에 우리 소리를 대입한 획기적인 ‘기타산조’를 낳았고, ‘불림소리’와 ‘황천길’, ‘팔만대장경’ 등 새로우면서도 대중적인 국악 앨범들을 시도했다. 80년대 후반에서부터 90년대 초 일련의 감독들과 코리안 뉴웨이브라 불리는 <칠수와 만수>, <그들도 우리처럼>, <개그맨>, <경마장 가는 길> 등을 작업하며 영화음악가로 새삼 주목받은 김수철은 93년 임권택 감독과 <서편제>를 함께 하며 그 정점에 이르렀다. <서편제>를 통해 그간 자신이 갈고 닦은 국악 사운드를 본격적으로 영화음악에 펼쳐 보인 김수철은 <태백산맥>에서 서사적인 깊이와 상충하는 이념들, 반목과 희생의 과정들을 한국적인 소리로 승화시켰다. ‘못다 핀 꽃 한 송이’나 ‘별리’, ‘왜 모르시나’ 등 대중가요 때부터 가지고 있던 애한과 상념이 묻어나는 김수철만의 고유의 정서가 신디와 대금, 태평소, 피리, 타악 등 전통악기와 맞물리며 민족의 비극적인 잔혹사를 명징하게 드러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철 영화음악의 백미는 <태백산맥>이라고 생각하지만, 보다 대중적이고 원숙한 기량을 뽐냈던 건 오히려 그다음 작품인 <축제>에 이르러서였다. 상대적으로 스케일이나 야심은 작았지만 소리 자체가 가진 뚜렷한 존재감이나 인상적이고 야무진 역할은 훨씬 두드러졌다. 대중가요와 국악, 동요(혹은 만화주제가)나 행사에 이르기까지 음악이라는 범주 안에서 폭넓게 활동하며 삼천갑자의 내공을 다진 덕분에 여기서 그는 뛰어난 범용성과 퓨전의 진수를 펼쳐 보였다. 그래서 흔히들 갖는 국악에 대한 편견과 난이도를 일시에 상쇄시키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테마가 눈에 띈다. 영화 자체가 뚜렷한 서사와 극적인 흐름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영화음악으로서 기능적인 역할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효와 전통, 생과 사, 기록과 동화 사이를 적절하게 메꿔주는 김수철의 한국적인 소리들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임권택 감독 영화의 미덕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현재 한국영화에서 (원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사운드트랙은 35분이 채 안 되고 그것도 3개의 테마가 한 번씩 다시 변주돼 실려 있기 때문에 체감상 더 짧게 느껴진다. <서편제>에서 춘향가 중 ‘사랑가’와 ‘옥중가’, 심청가 중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과 ‘심봉사 눈뜨는 대목’, 진도 아리랑 등 기존 국악들이 김수철의 스코어와 잘 배분돼 실려 있다면, <태백산맥>과 <축제>는 오로지 김수철의 역량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 <태백산맥>에서 음악이 거시적으로 전체적인 맥락을 짚는 데 주력한다면, <축제>에선 보다 미시적으로 특정 장면에 특정 테마를 반복해 그 감성을 각인시키고 있다. 어머니가 등장하는 회상 씬들에선 메인테마 ‘축제’를 변주한 ‘어머니’가, 동화 속 장면에선 국악 동요풍의 ‘꽃의 동화’가, 장례 의식에선 ‘먼 길’이 사용되는 식이다. 따라 자주 반복되고 제한된 쓰임새 때문에 음악으로서, 테마가 갖는 힘은 역설적으로 커졌다. <서편제>의 메인테마격인 ‘소리길’이나 <태백산맥>의 ‘산맥’보다 <축제>의 ‘축제’가 더 명료하고 강렬하게 다가오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대금과 피리로 연주되는 이 선율은 앨범에서 네 번 반복(변주)되는데, 밝고 발랄한 톤을 유지하는 ‘축제’가 산자들의 부박한 활동성을 상징한다면, 어둡고 느려지는 ‘어머니’에선 처연하고 애잔한 장례식 본연의 모습과 망자에 대한 넋을 기리고 있다. 이 이중적인 부분이야말로 감독이 <축제>에서 노렸던 우리 장례 풍습의 면모이고, 김수철이 탁월하게 표현해낸 바였다. 그 외 마당놀이로 익숙한 배우 안병경 씨가 직접 부른 ‘꽃상여(만가)’도 수록돼 있다. 김수철은 여전히 소리를 찾아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로 오랜만에 호흡을 맞췄고, 이준익 감독의 사극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으로 상업영화에서도 건재함을 알렸다. <날아라 슈퍼보드> 이후 오랜만의 애니메이션 <삼국쥐 전>의 음악을 담당하는 한편, 서울 빛 축제 음악이나 KBO 한국프로야구 30주년 기념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락 스피릿을 불사르며 무대에서 밴드와 함께 펄펄 뛰고 있다. 그는 아직도 젊은 그대다. 그가 들려줄 새로운 음악이 기대된다.


축제

Track List
1. 축제 (하나)
2. 꽃의 동화 (하나)
3. 어머니 (하나)
4. 꽃상여 (만가) 소리-안병경
5. 꽃의 동화 (둘)
6. 먼 길 
7. 축제 (둘)
8. 어머니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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