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명탐정 KOFA: 컬렉션을 파헤치다][어느 영화인의 사진첩] {경} 동양 최대 영화촬영소 건립 {축}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경기도 시흥군 동면 안양리(현 안양시), 얼핏 봐도 백 명은 족히 넘어 보일 정도로 인파가 북적이는 이곳.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일까? 흙먼지 폴폴 날리는 공사장에 말이다. 화기애애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짓고 있는 중으로 보이는 콘크리트 건물 앞에서 멋들어지게 늘어서서 단체 사진은 또 왜 찍고 있는 걸까? 혹시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해 모인 것일까? (좌) 홍찬, 현제명 등 / (우) 박계주, 조경희 (좌) 한형모, 허백년, 이진섭 등 / (우) 김학성, 유계선 등 엄청나고 대단한 것이 들어설 것 같은 흥분으로 가득한 이곳은 다름 아닌, 동양 최대 규모의 영화 스튜디오가 될 수도영화사(대표 홍찬 ) 안양촬영소 정초식 및 상량식(이하 정초식) 현장이다.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속 여러 장에 걸쳐 발견되는 일련의 사진들에는 수도영화사 사장 홍찬과 현제명 박사, 문학가 박계주 와 조경희, 시나리오 작가 유한철 과 이진섭 , 영화평론가 임영 과 허백년 , 스틸 작가 백영호 , 감독 한형모 , 배우 이민 과 유계선 등의 인물들이 포착되어 있다. 생전 이 사진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던 촬영감독 김학성 의 모습 역시 박혀있다. 그러나 이 행사에는 문화계 인사만 자리한 것이 아니었다. 단신에 가까운 신문 기사와 이승만 대통령의 동정을 따라가는 <대한뉴스>에서 확인되는 이날의 공식 기록은 이러하다. 안양촬영소 정초식은 1956년 10월 17일 오전 11시, 경기도 안양리 공사 현장에서 수도영화사 사장 홍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현제명 박사는 공사 경과를 보고했고, 이승만 대통령과 최규남 문교부 장관의 축사가 이어졌다. *주1 그 밖에도 여기에는 당시 민의원 의장이었던 이기붕과 내무부 장관이었던 이익흥 등의 정부 인사 역시 자리했다. 영화배우 주증녀 가 영화인 대표로서 단상에 올라 대통령에게 꽃다발을 전달했고, 정초식 이후 대통령은 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촬영소 모형도를 살폈다. *주2 이 같은 공식 기록을 놔두고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의 사진들이 유독 눈에 띄는 이유는 그것이 다름 아닌 ‘개인의 기록’이라는 데 있다. 객관적인 사실을 열거하며 대통령의 동정에 초점을 맞춘 공적 보도와 달리, 이 일련의 사진들은 순수하게, 안양촬영소 건립에 들뜬 영화인의 시선으로 기록된 것들이다. <대한뉴스>에서 전달되는 근엄하고 정제된 분위기와 달리, 사진은 어딘가 다소 어수선하고 북적인다.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시각 요소만 담겨 있지만, 그럼에도 왠지 이곳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재잘거리는 대화 소리, 북적이는 인파와 공사장의 소음이 그대로 들리는 것만 같다. 공적 기록과 달리 정제되지 못한 개인의 사진(심지어 이 사진들은 인화되지 못한 채 필름으로 남아 있다)은 이렇게 예상외의 것마저 전달한다. 그렇다면 영화인뿐 아니라 여러 문인과 정부 관계자들이 나서서 모두 축하하고 있는 안양촬영소 건립이란 당시에 어떤 의미였을까? 일제강점기 때부터 국내의 영화인들은 영세한 자본에다 촬영소는 물론이고 변변한 영화 기자재도 없는 현실을 탄식하며 탄탄한 자본력을 가진 영화 기업을 기대했고, 영화 예술을 위해 헌신하는 굴지의 독지가가 나타나길 바라는 비현실적인 꿈을 꾸기도 했다. 해방을 맞이했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고 한국전쟁으로 그나마 있는 시설마저 파괴되었으니, 영화인들이 느꼈을 실망과 좌절은 굳이 말하지 않더라고 쉬이 짐작 가능하다. < 춘향전 >(이규환, 1955년 국도극장 개봉) 흥행을 계기로 영화 제작에 숨통이 조금 트였다고는 하지만, 안양촬영소가 개소하기 전까지 국내에 있는 영화촬영소라고는 미국의 아시아재단 원조로 들여온 기자재를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정릉 스튜디오와 < 자유부인 >(한형모, 1956)의 제작사 삼성영화사가 서울 군자동에 설립한 삼성스튜디오 정도였다. 이마저도 모두 안양촬영소가 한창 공사 중이던 1957년의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1956년 10월의 안양촬영소 상량식이 영화계, 나아가 문화계 전반의 큰 행사이자 축제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안양촬영소는 대지 면적 32,000평, 건평 5,400평의 규모로, 자타공인 당시 동양 최대 스튜디오였다. 한국영화 1세대 촬영기사이자 테크니션이던 이필우 의 설계를 바탕으로, 3개의 스튜디오(500평, 380평, 150평)와 래보라토리(105평), 녹음실(60평), 소도구 및 대도구 제작실(150평), 분장실(100평), 촬영 장비 저장소(100평) 등을 구비했고, 식당과 샤워실, 총 3,300kW 출력이 가능한 변전실 3개 등의 부대 시설까지 완비했다. 기자재로는 당시 접하기 힘들었던 미첼 NC 카메라 3대와 웨스트렉스 녹음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최신 설비와 시설을 자랑했다. *주3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확인되는 이 같은 모습을 차츰 갖춰가고 있던 1956년 10월, 사진 속의 이날은 그렇기에 더욱 흥분과 경이로 가득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근사하게 차려입고 이곳에 모인 많은 이들의 상기된 표정은 안양촬영소가 영화인들에게 와닿는 의의를 설명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한편 안양촬영소가 여전히 한창 공사 중이던 1957년 3월의 어느 날, 수도영화사 대표 홍찬은 《국제영화》와의 인터뷰에서 촬영과 조명, 소품, 의상, 메이크업 등의 기술 스태프 500여 명을 전속으로 기용할 예정임을 은연중에 밝히기도 했다. *주4 홍찬이 발표한 이 말이 사실이라면, 수도영화사의 안양촬영소 건립은 영화인들에게 또다시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속’이라 함은 곧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도영화사가 안양촬영소 건립과 함께 제시한 청사진은 영화인들이 불안정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수도영화사와 전속 계약을 맺은 스태프가 누구였는지,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지만, 위 사진들의 원 소장자 김학성이 수도영화사와 촬영감독 전속 계약을 맺은 사실은 그의 컬렉션을 통해 확인된다. 김학성의 수도영화사 전속 촬영감독 임명장 (한국영화박물관 상설 전시 자료, 우측은 필자의 한글 병기) 수도영화사의 전속 촬영감독으로서, 김학성은 이곳에서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 창립 작품 < 생명 >(이강천, 1958)의 촬영을 담당했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도 수도영화사 전속 촬영감독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양촬영소 상량식 사진들 못지않게,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에는 그가 <생명>을 촬영할 당시에 찍은 사진들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도영화사 사무실에서 촬영된 필름을 검토하고 있는 모습부터 <생명> 고사 현장, 한강 로케이션 촬영 현장과 안양촬영소 세트장에 이르기까지, 사진 자료만도 89점에 달한다. 이는 그가 참여한 작품에 관한 컬렉션 사진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인들의 환대를 받으며 성대하게 지어진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의 수명은 안타깝게도 그리 길지 못했다. 수도영화사는 창립 작품 <생명>에 이어 < 낭만열차 >(박상호, 1959)를 제작했지만, 두 작품의 잇따른 흥행 부진으로 수십억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안양촬영소는 1959년 4월 부도 처리되며 상업은행의 관리로 넘어갔다. 이후 선민영화사와 홍성기 감독, 범아영화사가 잠시 운영을 맡기도 했지만, 한동안 방치되었고 1966년,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 인수돼 안양필름(1967~1968), 안양영화제작주식회사(1970~1973) 등의 스튜디오로 활용되었다. *주5 *** 주1. “안양촬영소 정초식 성대”, 《조선일보》 1956. 10. 18., (석)3면. 주2. “ 대통령 각하, 안양촬영소 정초식에 임석 ”, <대한뉴스> 제94호, 1956. 10. 주3. 안재석, 「 안양촬영소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4. “[신춘대담 no.3] 현란한 문화기업의 개화전: 영화산업의 왕자 ‘수도’의 구상”, 《국제영화》 1957년 4월호(15호), 93쪽. 주5. 안재석, 앞의 글; 조준형, 『영화제국 신필름』, 한국영상자료원, 2009.by.이지윤(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2025.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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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천국 Vol.29]신문광고와 잡지 홍보에 의존한 아날로그적 방식영화 홍보는 시대와 더불어 그 방법과 수단이 달라지긴 했으나 느슨하게나마 항상 변화하며 발전해왔다. 1960, 70년대는 신문을 통한 광고와 기사가 영화홍보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방식은 90년대까지 유효했다. 일부 역할을 <연예가 중계>와 같은 텔레비전 오락프로가 맡아 했지만,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일어난 인터넷 붐과 함께 영화 광고는 신문지상에서 사라졌다. 아울러 60년대부터 20여 년 동안 신문의 광고 수익에 이바지했던 영화 광고의 소멸은 결국 리뷰, 화제 기사 등 영화에 할애했던 지면마저 거두어 가버린 셈이 되었다. 자체 월간지까지 내며 영화 홍보에 나선 60년대 1960년대의 영화 홍보는 뚜렷한 변화 없이 50년대의 선전 방식을 답습했다. 홍보 매체를 일간신문과 영화잡지로 나누어 활용했다. 영화의 제작 단계부터 기자나 독자의 흥미를 끌 만한 가십거리를 제공하고 배우 중심의 화제를 만들었다. 그러기 위해 조선, 동아, 중앙, 한국, 경향신문 등 종합지와 일간 스포츠, 시사통신 연예판, 그리고 <국제영화> <영화세계> <시네마 팬> <영화잡지> <실버 스크린> <영화예술> 등의 지면을 이용했다. 잡지의 영화 광고는 기사와 함수 관계에 있다. 값이 비싼 표지 뒷면의 원색광고와 단색의 3, 4면 표지 광고, 양면에 걸친 화보 광고에는 시나리오, 인터뷰, 촬영현장 탐방, 신인 소개 등 서비스 홍보 지면이 할애되기 마련이었다. ‘한국청춘영화의 배경과 현실’을 특집으로 다룬 <실버 스크린> 1964년 8월 창간호를 보면, 표지 4면에 게재된 <욕탕의 미녀사건>(전홍직, 1964)의 원색광고, 단색광고(화제의 신인 천시자, 양면)와 관련된 기사가 무려 네 건이나 실려 있다. 3쪽이 넘는 분량의 ‘스냅’(전홍직 감독 천시자의 욕탕 장면에 격찬, 또 격찬!)을 비롯하여 ‘새 영화의 초점’ (과감한 누드 신을 묘사한 <욕탕의 미녀사건>, 2쪽 분량), 촬영 현장 탐방 형식의 ‘로케에서 세트에서’(누드 신을 언급하며 천시자엔 모두가 감탄), 감독을 소개하는 ‘감독에게 건배를’ (영화 <욕탕의 미녀사건> 감독 전홍직)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영화잡지가 번성하게 된 이면에는 일부 미수금의 부담이 따르긴 했지만 잡지 판매 못지않은 광고 수익이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대한극장을 운영한 세기상사에서는 아예 <스크린>이라는 월간 영화잡지를 창간해 홍보용으로 활용했다. 이 잡지는 자사에서 제작하거나 수입한 <마의 계단>(이만희, 1964), <필사의 추적>(전응주, 1964), <예기치 못한 일>(안소니 아스퀴드, 1964), <북경의 55일>(1963) 등을 소개하면서도 홍보 색채를 덜어내려 국내외 배우의 소개를 포함한 외국 영화의 동향 등 최신 정보도 함께 제공했다. 보시라!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눈물의 주옥편! 신문광고는 예고 광고와 본 광고 두 종류로 나뉘었다. 예고 광고는 상영 중인 앞 영화의 종영을 1주일가량 앞두고 시작되는 게 관례였다. 상영 일자를 밝히지 않은 채 광고를 계속하다가 종영을 3일가량 앞두고서야 개봉 일자를 밝힐 수 있었다. 개봉 중인 영화의 흥행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되는 불문율 때문이다. 프로의 교체는 좌석 수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상영 중인 영화가 일정 관객 수(1일 평균 1500명 내외 기준)를 채우지 못할 때 주말(토요일)에 이루어지는 게 관행이었다. 예고 광고는 상영 중일 때 내보내는 본 광고에 비해 크기가 컸다. 흥행이 기대되는 영화의 경우는 전 5단(대형)이나 일반적으로는 세로 8단 10.5~8.5cm의 중간 크기를 선호했고, 간혹 세로 4단 5.5cm짜리 소형 광고도 볼 수 있었다. 포스터는 일반적으로 전지 크기의 대형과 반절짜리 소형 등 두 종류가 제작되었다. 검열을 의식해 길거리용인 소형은 주로 극장용인 대형에 비해 문안이나 스틸사진의 선택 및 배치 등 도안이 덜 자극적이었다. 중구 을지로 1가의 삼화인쇄소와 종로구 조계사 입구의 평화인쇄소 등이 최신 오프셋 시설을 갖추고 전매청의 ‘아리랑’ ‘파고다’ 와 같은 고급 담뱃갑이나 <여원> <주부생활> 등 고급 여성지의 표지와 원색 화보를 찍는 수준에 이른 시대였지만 부수가 한정된 영화 포스터는 주로 값이 싼 을지로 일대의 인쇄소에서 찍었다. 광고 문안도 자연스러운 구어체보다는 상투적인 문어체가 많았다. 영화사나 극장의 홍보담당자들이 일본식 교육을 받은 세대이다보니 언어 구사가 매끄럽지 못하고 신파극처럼 느낌표가 남발되었다. 이를테면 “감격, 황홀의 극치! 절박한 사랑의 십자로에서 두 여인은 몸부림친다. (<유랑극장>, 강범구 감독, 을지극장 상영, 대한일보, 1963년 6월 12일자)”, 또는 “애끓는 육체적 폭발! 보시라! 견딜 수 없는 인간의 본능!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눈물의 주옥편! (<중년부인>, 최진 감독 대한일보, 1963년 6월 13일자)”, 심지어 1960년대 리얼리즘 수작으로 꼽히는 김수용 감독의 <혈맥>의 경우까지 작품의 성격이나 질과 거리가 먼 “통곡과 비통의 인생의 몸부림! 줄지은 수만 인파 속에 연일 매진사례! (<혈맥>, 김수용 감독, 아카데미극장, 대한일보, 1963년 10월 5일자)”식의 통속적인 문안으로 변질했다. 이 같은 신문, 잡지의 광고는 전단 배포, 포스터 부착과 함께 상호보완적으로 진행되었다. 70년대, 문어체에서 구어체로 전환 1970년대의 영화 홍보는 60년대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달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사진식자의 도입과 카피의 진화였다. 디자이너의 손과 활자 전사에 의존했던 도안 방식이 한결 수월해지고 매끄러워졌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밝아오는 72년 한국영화를 세계수준에 올려놓은 감동의 호화대작! 눈물도 없다! 사랑도 없다! 지킬만한 의리도 없다! 오직 잔혹하게 너를 없앨 뿐이다!” (<동창생>, 박호태 감독, 아세아 극장 중앙일보, 1971년 12월 30일자 전5단 예고 광고)식의 광고 문안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눈에 띄는 변화가 보였다. 한국영화에 호스티스라는 새로운 멜로 장르를 이끈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에 이어 나온 정인엽 감독의 <꽃순이를 아시나요>(1978)가 바로 대표적인 예다. 포스터와 신문 광고에 보여준 이 영화의 카피는 “아, 아파요./ 꺾지 마세요./ 그냥 보기만 하세요./ 향내만 맡으세요.” 로 되어 있다. 산업화로 인해 붕괴되어가는 농촌의 삶을 상경한 시골 처녀 꽃순이의 변화된 모습을 통해 투영시킨 이 영화는 가수 김국환이 부른 동명의 주제가와 함께 화제가 되면서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를 더욱 함축적으로 살려 효과를 본 것이 하길종 감독의 <속 별들의 고향>(1978년) 에 나타난 “내 입술은 작은 술잔이에요.”라는 문안이었다. 한글 세대의 감성과 눈높이에 맞춘 두 영화의 구어체 문안은 이 시기에 나온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 문안은 당시 명보극장 기획실장 김정률(1952년생, 희곡작가)의 솜씨였다. 1977년 영화배우 신영균이 명보극장을 인수하며 발탁한 김 실장은 탁월한 선전 감각으로 그 뒤에도 <내가 버린 남자>(정소영, 1979), <을화>(변장호, 1979), <겨울로 가는 마차>(정소영, 1981), <바람 불어 좋은 날>(이장호, 1980) 등 명보극장 개봉 프로의 홍보를 맡아 주목을 받았다. 영화의 전단에 4원색 외에 별색을 추가하고 극장의 개봉 영화를 알리는 간판에 형광 페인트를 칠하는 등 새바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 선전 분야에서 알려진 인사로는 단성사의 이용희와 스카라극장의 최원용 등이 있었다. 70년대 극장을 빛낸 광고인들 영화 광고 디자인은 영화사 소속으로 월급을 받는 도안사와 자체 사무실을 운영하며 작품당 계약을 하는 두 종류의 도안사가 나누어 담당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 사이에 활동한 사람은 1세대 영화 광고 디자이너에 속하는 백인(白寅, 1922~77)을 비롯한 김태환, 정상규, 박철, 박용태, 김정식, 윤정환 등이었다. 백인은 한국영화 선전 광고를 개척한 한 사람으로서 일찍이 <영화세계>의 도안사로 있다가 세기상사 선전부로 옮겨 방화 및 외화의 선전 광고 도안을 담당했다. 1950년대 말부터 15년 이상 이 일을 계속하며 김태환, 박용태, 김종서, 김덕영, 윤종환 등 30여 명의 후배를 양성했다. 주요 작품으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연산군>(신상옥, 1961) 등이 있다. 김태환은 60년대 초부터 세기상사 선전부에서 영화 선전 광고 도안사로 출발한 뒤 신필름의 선전기획실장, 극동필름 선전부장, 연방영화사 선전부장 등을 역임했다. 1969년에는 도안실을 설립하고 80년대까지 이 일을 줄곧 해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상록수>(신상옥, 1961), <산 색시>(박상호, 1962), <쌀>(신상옥, 1963), <빨간 마후라> <벙어리 삼룡>(신상옥, 1964), <눈물의 웨딩드레스>(변장호, 1973), <증언> (임권택, 1973), <토지> (김수용, 1974) 등이 꼽힌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여백을 살린 공간에 전면에 수레를 끄는 어머니 최은희와 이를 돕는 어린 아들(박종화)을 배치하고 배경에 다섯 명이 서 있는 모습을 작게 대비시켜 원근감을 살린 <산 색시>(박상호, 1962)의 구도(양해남의 <포스터로 읽는 우리영화 삼십 년> 중 김종원의 글, 2007년)가 돋보였다. 정상규(2002년 5월7일 작고)는 당초 출판사에서 삽화를 그리는 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국제극장의 선전 도안을 맡으면서 방향을 바꾸었다. 이후 20여 년에 걸쳐 신프로덕션, 극동필름과 피카디리 극장의 선전부 일을 하며 <성춘향>(신상옥, 1961),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 <만추>(이만희, 1966), <만선>(김수용, 1967), <화녀>(김기영, 1971) 등 1000여 편에 이르는 영화 포스터 및 광고 디자인을 남겼다. (<영화백과>, 1975년, 영화백과편찬위원회, 참조) 이밖에 김정식(1937년생)은 1958년 국도극장에 도안실을 설치하고 20여 년 동안 상업미술전시회에서 ‘포스타디자인상’을 수상한 <성난 독수리>(김기, 1965)를 비롯한 <초설>(김기영, 1958), <육체의 길>(조긍하, 1967),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등을 내놓았으며, 윤정환(1944년 9월 7일생, 본명 正吉)은 태창흥업에 근무하며 <꽃순이를 아시나요>(정인엽, 1978), <밤의 찬가>(김호선, 1979),<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 <춘향전>(이성구, 1971), <신궁>(임권택, 1979) 등을 선보였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1960~70년대는 신문광고와 잡지에 의존한 아날로그적 홍보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2013.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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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천국 Vol.29]<멋진 하루> 블루레이 출시 기념상영회이윤기 감독이 연출하고 전도연, 하정우가 출연한 로맨스 영화 <멋진 하루>(2008)의 블루레이 출시 기념 상영회가 지난 11월 18일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 1관에서 열렸다. 이윤기 감독과의 GV 행사를 겸한 이날 상영회는 일요일 늦은 오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200여 명이 넘는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이 찾아주어 성황을 이루었다. 이날 상영회에서는 시중에 출시된 블루레이 디스크로 본편을 상영했으며, DCP 포맷의 디지털 상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화질과 음질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영화 상영 후에는 정지연 영화평론가의 진행으로 이윤기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이어졌는데, 관객들의 적극적인 질문 공세와 이윤기 감독의 재치 있는 답변이 거듭되면서 무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GV 행사가 진행되는 등 부쩍 추워진 날씨가 무색하리만큼 근래 보기 드문 뜨거운 열기를 분출했다. 작고 소박한 영화의 깊은 울림 특히 여성의 감성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데 능한 이윤기 감독의 영화답게 남성보다는 여성 관객의 비율이 높았다. 그래서인지 개봉 당시 극중 병운(하정우 분)의 엉뚱한 캐릭터와 그 현란한 연기에 주로 관심이 모아졌던 것과는 달리, 이날은 희수(전도연 분)의 섬세한 행동심리에 대해 여성 관객들과의 진지한 토론이 비중 있게 이루어져 눈길을 끌었다. 이날 상영회를 찾은 관객 중에는 블루레이에 관심 있는 유저들뿐만 아니라 이윤기 감독의 오랜 팬, 단체 관람을 온 대학교 영화과 학생들도 만나볼 수 있었으며, GV 행사 후 감독 사인회를 겸한 소박한 포토타임도 진행되어 훈훈한 분위기 속에 마무리되었다. 지난 2009년 5월 같은 장소에서 열린 <멋진 하루> ‘다시보기’ 상영회 이후 오랜만에 시네마테크 KOFA를 찾은 이윤기 감독은 “작품을 완성한 후에는 볼수록 단점만 눈에 들어와서 다시 내 영화를 안 보는 편인데, 개봉 후 4년이나 지나서 좋은 화질과 음질의 블루레이로 대형 스크린에서 <멋진 하루>를 보고,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관객 여러분과 대화할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이날 행사에 참여한 소감을 밝혔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흥행 한국영화 위주로 편중된 국내 블루레이 시장에서 이 작고 소박한 영화 <멋진 하루>를 블루레이로 출시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자신의 작품을 처음으로 블루레이로 출시하게 된 이윤기 감독은 블루레이의 기획부터 완성까지 적극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멋진 하루> 블루레이 패키지에는 1080p 풀 HD 영상과 DTS-HD Master Audio의 HD 사운드 트랙을 수록한 블루레이 디스크 외에 이윤기 감독을 비롯한 주요 제작 스태프가 모두 글을 기고해 만든 76페이지의 컬렉터스 가이드북이 제공된다.by.백준오(블루레이 프로듀서)2013.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