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광고와 잡지 홍보에 의존한 아날로그적 방식 1960, 70년대 영화 홍보를 말하다

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13-01-10조회 2,392
영화홍보

영화 홍보는 시대와 더불어 그 방법과 수단이 달라지긴 했으나 느슨하게나마 항상 변화하며 발전해왔다. 1960, 70년대는 신문을 통한 광고와 기사가 영화홍보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방식은 90년대까지 유효했다. 일부 역할을 <연예가 중계>와 같은 텔레비전 오락프로가 맡아 했지만,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일어난 인터넷 붐과 함께 영화 광고는 신문지상에서 사라졌다. 아울러 60년대부터 20여 년 동안 신문의 광고 수익에 이바지했던 영화 광고의 소멸은 결국 리뷰, 화제 기사 등 영화에 할애했던 지면마저 거두어 가버린 셈이 되었다.

자체 월간지까지 내며 영화 홍보에 나선 60년대

1960년대의 영화 홍보는 뚜렷한 변화 없이 50년대의 선전 방식을 답습했다. 홍보 매체를 일간신문과 영화잡지로 나누어 활용했다. 영화의 제작 단계부터 기자나 독자의 흥미를 끌 만한 가십거리를 제공하고 배우 중심의 화제를 만들었다. 그러기 위해 조선, 동아, 중앙, 한국, 경향신문 등 종합지와 일간 스포츠, 시사통신 연예판, 그리고 <국제영화> <영화세계> <시네마 팬> <영화잡지> <실버 스크린> <영화예술> 등의 지면을 이용했다.

잡지의 영화 광고는 기사와 함수 관계에 있다. 값이 비싼 표지 뒷면의 원색광고와 단색의 3, 4면 표지 광고, 양면에 걸친 화보 광고에는 시나리오, 인터뷰, 촬영현장 탐방, 신인 소개 등 서비스 홍보 지면이 할애되기 마련이었다.
‘한국청춘영화의 배경과 현실’을 특집으로 다룬 <실버 스크린> 1964년 8월 창간호를 보면, 표지 4면에 게재된 <욕탕의 미녀사건>(전홍직, 1964)의 원색광고, 단색광고(화제의 신인 천시자, 양면)와 관련된 기사가 무려 네 건이나 실려 있다. 3쪽이 넘는 분량의 ‘스냅’(전홍직 감독 천시자의 욕탕 장면에 격찬, 또 격찬!)을 비롯하여 ‘새 영화의 초점’ (과감한 누드 신을 묘사한 <욕탕의 미녀사건>, 2쪽 분량), 촬영 현장 탐방 형식의 ‘로케에서 세트에서’(누드 신을 언급하며 천시자엔 모두가 감탄), 감독을 소개하는 ‘감독에게 건배를’ (영화 <욕탕의 미녀사건> 감독 전홍직)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영화잡지가 번성하게 된 이면에는 일부 미수금의 부담이 따르긴 했지만 잡지 판매 못지않은 광고 수익이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대한극장을 운영한 세기상사에서는 아예 <스크린>이라는 월간 영화잡지를 창간해 홍보용으로 활용했다. 이 잡지는 자사에서 제작하거나 수입한 <마의 계단>(이만희, 1964), <필사의 추적>(전응주, 1964), <예기치 못한 일>(안소니 아스퀴드, 1964), <북경의 55일>(1963) 등을 소개하면서도 홍보 색채를 덜어내려 국내외 배우의 소개를 포함한 외국 영화의 동향 등 최신 정보도 함께 제공했다.

보시라!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눈물의 주옥편!

신문광고는 예고 광고와 본 광고 두 종류로 나뉘었다. 예고 광고는 상영 중인 앞 영화의 종영을 1주일가량 앞두고 시작되는 게 관례였다. 상영 일자를 밝히지 않은 채 광고를 계속하다가 종영을 3일가량 앞두고서야 개봉 일자를 밝힐 수 있었다. 개봉 중인 영화의 흥행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되는 불문율 때문이다. 프로의 교체는 좌석 수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상영 중인 영화가 일정 관객 수(1일 평균 1500명 내외 기준)를 채우지 못할 때 주말(토요일)에 이루어지는 게 관행이었다.

예고 광고는 상영 중일 때 내보내는 본 광고에 비해 크기가 컸다. 흥행이 기대되는 영화의 경우는 전 5단(대형)이나 일반적으로는 세로 8단 10.5~8.5cm의 중간 크기를 선호했고, 간혹 세로 4단 5.5cm짜리 소형 광고도 볼 수 있었다.
포스터는 일반적으로 전지 크기의 대형과 반절짜리 소형 등 두 종류가 제작되었다. 검열을 의식해 길거리용인 소형은 주로 극장용인 대형에 비해 문안이나 스틸사진의 선택 및 배치 등 도안이 덜 자극적이었다. 중구 을지로 1가의 삼화인쇄소와 종로구 조계사 입구의 평화인쇄소 등이 최신 오프셋 시설을 갖추고 전매청의 ‘아리랑’ ‘파고다’ 와 같은 고급 담뱃갑이나 <여원> <주부생활> 등 고급 여성지의 표지와 원색 화보를 찍는 수준에 이른 시대였지만 부수가 한정된 영화 포스터는 주로 값이 싼 을지로 일대의 인쇄소에서 찍었다.

광고 문안도 자연스러운 구어체보다는 상투적인 문어체가 많았다. 영화사나 극장의 홍보담당자들이 일본식 교육을 받은 세대이다보니 언어 구사가 매끄럽지 못하고 신파극처럼 느낌표가 남발되었다. 이를테면 “감격, 황홀의 극치! 절박한 사랑의 십자로에서 두 여인은 몸부림친다. (<유랑극장>, 강범구 감독, 을지극장 상영, 대한일보, 1963년 6월 12일자)”, 또는 “애끓는 육체적 폭발! 보시라! 견딜 수 없는 인간의 본능!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눈물의 주옥편! (<중년부인>, 최진 감독 대한일보, 1963년 6월 13일자)”, 심지어 1960년대 리얼리즘 수작으로 꼽히는 김수용 감독의 <혈맥>의 경우까지 작품의 성격이나 질과 거리가 먼 “통곡과 비통의 인생의 몸부림! 줄지은 수만 인파 속에 연일 매진사례! (<혈맥>, 김수용 감독, 아카데미극장, 대한일보, 1963년 10월 5일자)”식의 통속적인 문안으로 변질했다. 이 같은 신문, 잡지의 광고는 전단 배포, 포스터 부착과 함께 상호보완적으로 진행되었다.

70년대, 문어체에서 구어체로 전환

1970년대의 영화 홍보는 60년대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달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사진식자의 도입과 카피의 진화였다. 디자이너의 손과 활자 전사에 의존했던 도안 방식이 한결 수월해지고 매끄러워졌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밝아오는 72년 한국영화를 세계수준에 올려놓은 감동의 호화대작! 눈물도 없다! 사랑도 없다! 지킬만한 의리도 없다! 오직 잔혹하게 너를 없앨 뿐이다!”

(<동창생>, 박호태 감독, 아세아 극장 중앙일보, 1971년 12월 30일자 전5단 예고 광고)식의 광고 문안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눈에 띄는 변화가 보였다. 한국영화에 호스티스라는 새로운 멜로 장르를 이끈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에 이어 나온 정인엽 감독의 <꽃순이를 아시나요>(1978)가 바로 대표적인 예다. 포스터와 신문 광고에 보여준 이 영화의 카피는 “아, 아파요./ 꺾지 마세요./ 그냥 보기만 하세요./ 향내만 맡으세요.” 로 되어 있다. 산업화로 인해 붕괴되어가는 농촌의 삶을 상경한 시골 처녀 꽃순이의 변화된 모습을 통해 투영시킨 이 영화는 가수 김국환이 부른 동명의 주제가와 함께 화제가 되면서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를 더욱 함축적으로 살려 효과를 본 것이 하길종 감독의 <속 별들의 고향>(1978년) 에 나타난 “내 입술은 작은 술잔이에요.”라는 문안이었다. 한글 세대의 감성과 눈높이에 맞춘 두 영화의 구어체 문안은 이 시기에 나온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 문안은 당시 명보극장 기획실장 김정률(1952년생, 희곡작가)의 솜씨였다.

1977년 영화배우 신영균이 명보극장을 인수하며 발탁한 김 실장은 탁월한 선전 감각으로 그 뒤에도 <내가 버린 남자>(정소영, 1979), <을화>(변장호, 1979), <겨울로 가는 마차>(정소영, 1981), <바람 불어 좋은 날>(이장호, 1980) 등 명보극장 개봉 프로의 홍보를 맡아 주목을 받았다. 영화의 전단에 4원색 외에 별색을 추가하고 극장의 개봉 영화를 알리는 간판에 형광 페인트를 칠하는 등 새바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 선전 분야에서 알려진 인사로는 단성사의 이용희와 스카라극장의 최원용 등이 있었다.

70년대 극장을 빛낸 광고인들

영화 광고 디자인은 영화사 소속으로 월급을 받는 도안사와 자체 사무실을 운영하며 작품당 계약을 하는 두 종류의 도안사가 나누어 담당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 사이에 활동한 사람은 1세대 영화 광고 디자이너에 속하는 백인(白寅, 1922~77)을 비롯한 김태환, 정상규, 박철, 박용태, 김정식, 윤정환 등이었다.

백인은 한국영화 선전 광고를 개척한 한 사람으로서 일찍이 <영화세계>의 도안사로 있다가 세기상사 선전부로 옮겨 방화 및 외화의 선전 광고 도안을 담당했다. 1950년대 말부터 15년 이상 이 일을 계속하며 김태환, 박용태, 김종서, 김덕영, 윤종환 등 30여 명의 후배를 양성했다. 주요 작품으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연산군>(신상옥, 1961) 등이 있다.

김태환은 60년대 초부터 세기상사 선전부에서 영화 선전 광고 도안사로 출발한 뒤 신필름의 선전기획실장, 극동필름 선전부장, 연방영화사 선전부장 등을 역임했다. 1969년에는 도안실을 설립하고 80년대까지 이 일을 줄곧 해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상록수>(신상옥, 1961), <산 색시>(박상호, 1962), <쌀>(신상옥, 1963), <빨간 마후라> <벙어리 삼룡>(신상옥, 1964), <눈물의 웨딩드레스>(변장호, 1973), <증언> (임권택, 1973), <토지> (김수용, 1974) 등이 꼽힌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여백을 살린 공간에 전면에 수레를 끄는 어머니 최은희와 이를 돕는 어린 아들(박종화)을 배치하고 배경에 다섯 명이 서 있는 모습을 작게 대비시켜 원근감을 살린 <산 색시>(박상호, 1962)의 구도(양해남의 <포스터로 읽는 우리영화 삼십 년> 중 김종원의 글, 2007년)가 돋보였다.

정상규(2002년 5월7일 작고)는 당초 출판사에서 삽화를 그리는 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국제극장의 선전 도안을 맡으면서 방향을 바꾸었다. 이후 20여 년에 걸쳐 신프로덕션, 극동필름과 피카디리 극장의 선전부 일을 하며 <성춘향>(신상옥, 1961),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 <만추>(이만희, 1966), <만선>(김수용, 1967), <화녀>(김기영, 1971) 등 1000여 편에 이르는 영화 포스터 및 광고 디자인을 남겼다. (<영화백과>, 1975년, 영화백과편찬위원회, 참조) 이밖에 김정식(1937년생)은 1958년 국도극장에 도안실을 설치하고 20여 년 동안 상업미술전시회에서 ‘포스타디자인상’을 수상한 <성난 독수리>(김기, 1965)를 비롯한 <초설>(김기영, 1958), <육체의 길>(조긍하, 1967),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등을 내놓았으며, 윤정환(1944년 9월 7일생, 본명 正吉)은 태창흥업에 근무하며 <꽃순이를 아시나요>(정인엽, 1978), <밤의 찬가>(김호선, 1979),<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 <춘향전>(이성구, 1971), <신궁>(임권택, 1979) 등을 선보였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1960~70년대는 신문광고와 잡지에 의존한 아날로그적 홍보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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