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가정이란 부질없는 공상에 지나지 않지만, 흥미로운 화두와 재미를 선사하는 건 사실이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 만약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쓰러지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현장에서 안중근 의사는 사살되고, 이듬해인 1910년 조선이 일본과 합병되어 초대통독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을지 모른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 불법집회 무산을 시작으로, 1921년 이노우에 2대 조선총독 위임. 1932년 상해 홍구 공원, 윤봉길 의사 현장에서 사살. 1936년 미일 연합군 2차 세계대전 참전. 1943년 일본군 만주국 점령. 1945년 베를린 원폭투하, 2차 세계대전 종료. 1960년 일본 UN 상임이사국 가입. 1965년 사쿠라 1호 위성 발사. 1988년 나고야 올림픽 개최. 2002년 일본 월드컵 개최. 그리고 바야흐로 동아시아 일대가 일본 제국이란 이름 아래 대동아 공영권으로 재통합된 지 약 100년의 시간을 맞이하는 2009년. <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는 대체역사물이다. 비록 이 설정은 복거일의 장편소설 『비명을 찾아서』에 크게 빚지고 있지만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혹은 금기시될 수 있는) 소재와 큰 스케일을 들고 나와 귀추를 주목시켰다.
2002년 당시 제작비가 80억 가까이 들어간 이 영화는 야심찬 한국산 블록버스터였다. 2년에 걸친 시나리오 작업과 압도적인 거대한 세트, 미니어처 특수효과와 CG를 동원한 참신한 비주얼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톱스타
장동건과 나카무라 토오루를 각각 투톱으로 배치한 캐스팅 또한 화제작에 걸맞았다. 거기에 한국의
신구와
안길강,
천호진 그리고 일본의 다이몬 마사아키와 미츠이시 켄 등 훌륭한 조연진들이 든든하게 뒷받침해주었고, 영화상 중요 모티브가 되는 ‘월령’에 대한 설명은 무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특별출연해 무게감을 실어주고 있다. 거기에 중국과 일본을 로케한 실감 나는 영상은 대체역사 판타지에 그럴듯한 분위기와 상황을 설정해주었다. 개봉당시 원안을 제공한 <비명을 찾아서>와 입장 차이가 불거지며 소송에 걸리는 등 영화 외적으로도 크게 이슈화되었지만, 그런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감성적인 연출과 개연성이 떨어지는 캐릭터, 균형감을 잃어버린 판타지로 인해 전국 300만이 채 안 되는 흥행에 그치고 말았다. 영화의 절반 이상이 일본어로 진행되고, 일본 배우들이 등장하기에 일본에도 수출되었지만, 항일 관련 내용으로 인해 그들 반응 역시 떨떠름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초반의 박력 있는 인트로 몽타주와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과 토요토미 히데요시 동상이 서 있는 광화문 거리 등을 묘사한 충격적인 비주얼 등은 나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동준이 담당한 당대 최고 스케일의 음악도 물론! 기획영화의 산실이던 신씨네에서 <
결혼 이야기2>로 94년 데뷔한
이동준은 굵직굵직한 화제작들의 음악을 잇달아 담당하며 주목받았다. <
구미호>와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같은 범상치 않은 작품들로 예행연습을 끝낸 그는
강제규 감독과 함께한 <
은행나무침대>로 한국영화음악의 레퍼런스를 제시했으며, 칸 영화제에 출품됐을 때 미국의 영화전문지 ‘버라이어티’로부터 “바실 폴리두리스와 엔니오 모리꼬네를 합쳐놓은 듯하다”라는 극찬을 듣기도 했다. 이미 91년 <황조가>로 대한민국 무용제에서 음악상을 수상하며 한국형 스코어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던 그는 이후 <
초록물고기>와 <
지상만가>같은 드라마부터 <
쉬리>, <
유령>, <
퇴마록>, <
리베라 메>와 <
천년호>, <
태극기 휘날리며>로 이어지는 흥행대작들을 섭렵하며 규모와 감동을 동시에 충족시켰다. 누누이 한스 짐머를 좋아한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던 만큼 그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지만, 최근 할리우드의 거의 모든 블록버스터들이 이 스타일을 유행처럼 좇아가고 있기에 하나의 경향이나 방법론적인 선택으로 보는 게 옳을 듯싶다. 물론 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
지구를 지켜라!>같은 블랙 코미디와 <
로망스>같은 격정 멜로의 라틴 사운드, <대왕의 길>과 <미망>같은 사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변호사>나 <아이리스>시리즈 등의 TV음악과 <난타>, <락햄릿>같은 공연음악과 <배터리> 등의 게임 음악까지 활동 폭을 넓혀가며 전천후 작곡가로 거듭났다.
이동준이 작업한 영화들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대한민국에서 작곡된 최상급의 블록버스터 스코어를 들려준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 정도의 박력과 규모를 간직한 한국영화 사운드트랙과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설립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단원들 대다수가 소련 말기 주요 악단의 악장이나 수석/부수석 급을 역임한 바 있는 100인조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았으며, 60인조 4부 혼성 합창단까지 합류시킨 그 위용은 가히 압도적이다. 스펙터클한 영상과 숙명적인 캐릭터들의 고뇌와 방황, 그리고 우정과 사랑을 장엄하고 화려한 사운드로 훌륭하게 포장하고 있으며, 탁월한 멜로디 감각을 자랑하는 이동준의 애수 어린 선율은 섬세한 연주와 감성으로 더욱 증폭되어 다가온다. 여전히 액션 씬에서 짐머레스크 스타일이 두드러지긴 하지만 <쉬리>나 <유령>에 비해 세련되어졌고, <은행나무침대>처럼 대금이나 소금, 북과 같은 전통악기와 여성의 한 맺힌 구음을 통해 한국적인 소리에 대한 접목을 꾀하고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거기에 일본의 타이고와 사쿠하치 등 전통악기를 동원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으며, 중간중간 라틴어로 노래하는 엄숙하고 청고한 소리는 드라마틱한 깊이와 다소 생경스러울 수 있는 SF 판타지에 그럴듯한 무게감을 선사한다. 오히려 이 스코어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영화의 작은 그릇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이동준의 스코어는 강렬하고 소름 끼친다. 가장 임팩트 있게 다가오는 건 영화 도입부에 흐르는 ‘Prologue’다. 안중근 의사의 저격 실패를 구슬프고 애잔하게 담아낸 선율은 이내 파국의 시나리오로 접어들면서 오케스트라와 4부 혼성 합창단을 힘껏 몰아붙인다. 지난 100년간의 역사를 압축한 사진들을 보여주며 방점을 찍는 이 웅장한 칸타타는 무시무시한 전율과 흥분을 던져준다. 이는 영화상 가장 하이라이트에 등장하는 ‘REQUIEM’에서도 반복된다. 바실 폴리두리스나 한스 짐머를 연상케 하는 장중하고 무거운 사운드는 규모의 스코어가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극명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곡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건 처연한 대금의 한 맺힌 소리다. 라틴어 합창도, 100인조 오케스트라도 감히 담을 수 없는 민족의 심지를 이 투박한 음색이 섬세하게 건든다. 종종 대금은 영화 전반에 깔리는 사쿠하치와 대치되며 두 주인공의 심정과 위치를 상징하기도 한다. ‘사카모토’와 ‘사이고’, ‘(후레이)센진’의 테마는 기타와 피아노, 바이올린 등 익숙한 음색과 쉽고 대중적인 멜로디를 통해 각각의 사연과 깊이에 접근해간다. 멜랑꼴리하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를 통해 각자의 입장에서 오는 아픔과 상처, 고통 등을 효과적으로 치유하고 있다. ‘Tempus Porta’은 전형적인 판타지 큐로 운명론적인 합창과 자유의지를 피력하는 여성 구음이 만나는 교감을 통해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의지와 변화가 동시에 읽히며, 테크노 리듬에 독특한 왜색 사운드를 가진 ‘Gayarang’은 류이치 사카모토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트랙으로 조선인 구역 술집 씬에 사용돼 분위기를 전환시킨다. 액션 큐들이 전형적인 짐머 스타일을 표방하는 게 두고두고 아쉽긴 하지만, 국내에서 이처럼 명확하게 스타일과 스케일을 구현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지 않을까. 특히나 ‘Agit Attack’은 일본 마츠리를 상징하는 사쿠하치와 습격 사운드를 절묘하게 연계시키며 강력한 효과를 보여줬다. 이후 이동준은 이 경험을 발판 삼아 <
천년호>와 <
각설탕>에서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작업하며 더욱 원숙미 넘치는 영화음악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이처럼 강력한 파워와 규모, 화려하고 다채로운 사운드를 한데 담아내진 못했다. 감정 과잉에 갖가지 실험과 피나는 노력이 복잡하게 얽혀 이동준의 과도기적인 장단점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사운드트랙이 가치가 있는 건 그 모든 걸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하고 완성해냈다는 것이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넘치는, 90년대 블록버스터의 자화상을 정확하게 반추하는 의미심장한 사운드트랙이다.
Track List
01. Prologue (#1)
02. Seoul, 2009 (#2)
03. ITO Center - Senjin (#4)
04. ITO Center - JBI (#5)
05. Last Of The Senjin (#6)
06. Theme Of Saigo (#10)
07. Gayarang (#12)
08. Theme Of Sakamoto (#13)
09. Theme Of Sakamoto (#21)
10. Youngodae (#22)
11. “INBODA” (Conspiracy)(#30)
12. JBI Escape (#31)
13. Theme Of The Senjin (#34)
14. Theme Of The Senjin (Guitar ver. #35)
15. Agit Attack (#36)
16. REQUIEM (#37)
17. Tempus Porta (The Gate Of The Time) (#45)
18. Friend...Enemy.. (#47)
19. Harbin Station (#48)
20. Again (#49)
21. Epilogue (#50)
22. Lost Memories (Special Tr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