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화면. 흰색의 자막이 기차처럼 흘러간다. 희끗희끗 날리는 눈발과 함께 잡음이 잔뜩 낀 방송의 파편들이 들려온다. “...좋은 아침입니다. 2014년 7월 1일 오늘 오전 6시에... 지난 7년간 논쟁을 들끓게 했던 문제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환경 단체와 개발도상국들의 시위자들이 여전히 반대하는 가운데... CW7이 지구 온난화의 해결책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왔고...” 이 아래로 깔리는 음악은 나른하지만 불길한 기운을 머금는다. 공허한 바람소리가, 피아노의 떨림이, 스트링의 스산함이 예사롭지 않다. “...지구 온난화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여긴 지도자들은 오늘 79개국 대기의 상층부에 CW7의 살포를 실시할 예정입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지구 평균 기온이 적정한 수준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공냉각제인 CW7에 의해... 인류의 지구 온난화 문제에 대한 혁신적인 방안이 될 것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창공에 뜬 비행기들. 대량으로 살포되는 인공냉각제. 인류의 고된 운명을 암시하듯, 비극적인 서막을 고하듯 혼(Horn)이 포효하고 팀파니가 굉음을 터트리며 영화 타이틀이 찍힌다. 그리고 그 이후 세상에 대해 간단하게 자막으로 소개한다. “CW7 살포 후 머잖아 세계가 얼어버렸다. 모든 생명체가 멸종됐다.” 새로운 빙하기 위로 기차 한대가 매서운 속도로 달리며 설명은 이어진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방주에 탑승한 몇 안 되는 소중한 이들이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들이다.” 이 영화는 영원한 겨울, 얼어붙은 백색의 세상, 지구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향하여 달리는 열차에 대한 얘기다. 절대 멈추지 않는 열차. 그것은 바로 온 세계를 축소해 담아놓은 100여량의 ‘설국열차’다.
설국열차
<
플란다스의 개>와 <
살인의 추억>, <
괴물> 그리고 <
마더>로 자신의 세계를 확고하게 쌓아나간
봉준호 감독은 그간 소문만 무성하던 <
설국열차>를 차기작으로 결정했다. 2004년 <괴물>의 프리 프로덕션을 준비하며 홍대의 한 만화서점에서 프랑스 원작과 마주친 지 대략 7년의 세월이 지나서였다. 국내에서 희귀한 장르인 괴수물을 만들어 1,300만 관객을 동원한 그였기에 본격적인 SF물을 표방한 <설국열차>에 쏟아지는 지대한 관심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제작자로
박찬욱 감독이 나서며 범상치 않은 프로젝트가 될 것임을 암시한 것처럼 제작비 4,000만 달러라는 역대 최고 규모에, 할리우드의 쟁쟁한 배우들과 다국적의 스탭들이 대거 참여하여 그 기대치를 한껏 부풀렸다. <괴물>에 이어
송강호와
고아성이 그대로 부녀로 출연하는 것은 물론, <
캡틴 아메리카>의 수장 크리스 에반스와 <
빌리 엘리어트>의 차세대 스타 제이미 벨, 아카데미 조연상을 거머쥔 바 있는 두 명의 여배우 틸다 윈스턴과 옥타비아 스펜서 외에 관록파 배우 에드 해리스와 존 허트까지, 국내영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캐스팅 파워를 자랑했으며, 체코 출신의 미술감독 앙드레 넥바실과 쟁쟁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로 다져진 VFX 디자이너 에릭 덜스트, 줄리안 스펜서 같은 노련한 스턴트 코디네이터가 참여해 내실을 갖췄다. 그런 이유로 음악 역시 국내 음악감독보다는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영화음악가를 원했는데, 봉준호 감독은 <
3:10 투 유마>에서 인상적인 음악을 들려줘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됐던 마르코 벨트라미를 낙점했다.
마르코 벨트라미
1966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브라운대와 예일대 음악과를 졸업한 마르코 벨트라미는 그 실력만큼이나 스승 복과 작품 운이 따른 영화음악가다. 쇤베르크의 사위이자 이탈리아의 거장 루이지 노노의 가르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USC에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전설 제리 골드스미스에게도 사사받았고, 단편과 TV물로 영화음악에 뛰어든 지 3년 만에 웨스 크레이븐의 <
스크림> 음악을 맡아 획기적인 성공을 경험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의 모든 음악을 담당하며 빠르게 주류에 편입해 들어간 그는 이후 메이저 영화사의 호러나 스릴러 장르에서 활약해 자신만의 어둡고 비장미 넘치는 색채를 더욱 발전시켰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 함께 한 <
미믹>과 <
블레이드 2>를 비롯해, <
패컬티> <
크로우 2> <
왓쳐> <
드라큘라 2000> <
캔디케인> <
레지던트 이블> <
언더월드 2> 등 유독 음울하고 어두운 장르에서 진가를 발휘하며 명성을 드높였는데, 장중한 혼과 강렬한 퍼커션, 서정적인 스트링에 일렉트릭 사운드를 곁들인 독자적인 스타일은 유행에 함몰되지 않는 그만의 독특한 인장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노르웨이의 <디나>, 덴마크의 <선생님의 외계인>, 프랑스의 <
퍼블릭 에너미 넘버원> 등 세계 각국의 작품들에 도전해 언어와 국경의 장벽을 뛰어넘었을 뿐더러, 장르에 있어서도 스펙트럼을 넓혀 인디 드라마부터 코미디, 스포츠, 서부극과 휴머니즘 등 다양한 선구안을 보여주었다. 특히 <
3:10 투 유마>와 <
허트 로커>의 연이은 아카데미 음악상 노미네이트로 60년대생 또래 작곡가 중에서 마이클 지아치노와 다리오 마리아넬리와 함께 가장 핫한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설국열차> 음악을 담당한 작년 2013년은 마르코 벨트라미가 가장 바빴던 한해로 무려 7작품에 이름을 올리며 얼마나 잘 나가는지 손수 증명해보였다.
<설국열차>는 마르코 벨트라미의 특징들이 고스란히 발현되는 작품이다. 암울하고 어두운 톤의 심상에, 캐릭터들의 잿빛 미래를 투영시킨 디스토피아적인 사운드는 그의 초기작부터 견지해왔던 음악세계로 인도한다. 풍부한 스트링과 마이너한 테마 그리고 울부짖는 취주악 파트에 과도한 일렉트릭 효과, 그리고 심장 박동처럼 두근두근 고동치며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타악 세션의 조화는 지독한 심연의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뜨린다. 인간의 모습으로 위장한 벌레부터 지옥에서 불려온 악마의 자식이나 낮에도 돌아다닐 수 있는 돌연변이 뱀파이어 안티 히어로, 감정을 가진 유일한 로봇, 666 표식을 한 악마의 부활과 학교에 숨어들어 인간 행세를 하는 외계 변종 생물체, 그리고 고전적인 드라큘라까지 줄곧 외면 받고 잊혀진, 저주와 악이라는 미명 하에 터부시 되어 왔던 캐릭터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여 온 마르코 벨트라미의 음악은 설국열차의 뒷칸에 자리 잡은 하층민들에게도 유효하다. 앞 칸으로 가기위해 체제전복적인 일을 도모하는 커티스 일행과 열차 각 량의 다양한 모습들을 묘사하는 그의 스코어는 박진감 넘치면서도 동시에 애수어리다. 달리는 기차라는 콘셉트에 맞게 규칙적으로 약동하는 비트에 미니멀한 주제부를 부여한 <설국열차>의 음악은 짧지만 효율적으로 각 칸의 성격들을 정의하고, 액션에 드라마틱한 동기를 심어주었다. 이는 그전의 <
헬보이>나 <
아이 로봇>, <
터미네이터 3>와 <
노잉> 등에서 들려줬던 방식과도 유사하며, 할리우드 스코어 특유의 스케일과 빠른 호흡을 불어넣어 좁고 한정된 공간의 제약과 단선적으로 보일 수 있는 플롯의 한계를 지워버렸다. 마르코의 동료이자 프로그래머인 벅 샌더스는 다양한 소리들의 질료를 모아 음악 아래 배치해두었고, 이를 베이스 삼아 덧입혀진 스코어는 입체적이고 공감각적인 반향을 이끌어냈다.
페이크 OST커버(좌), CJ 디지털 음원 커버(우)
영화상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쓰인 곡은 도끼를 든 갱들과 어두운 터널 속에서 혈전을 벌릴 때 등장하는 ‘Blackout Fight’다.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다 성냥을 떠올리고 형세 역전을 일궈내는 흐름에 배치돼 있는데, 고요하던 엠비언트 사운드가 점차 고조되다 휙휙 몰아치는 스트링과 파워풀한 퍼커션이 가세해 절정에 치닫는 혼과 브라스가 순차적으로 어우러지는 이 곡은 진정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고 관객들을 흥분케 하는 묘미가 있다. 테마나 멜로디라 할 것 없이 단순무식하게 오스티나토를 위압적으로 몰아붙이는 큐이지만, 그래서 더 기차라는 배경이 도드라지고 대치라는 상황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트랙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처음 반란을 일으킬 때 흘러나왔던 ‘Requesting An Upgrade’와 메이슨을 처단하고 난 뒤 앞 칸으로 전진하는 장면에서 쓰이는 ‘We Go Forward’ 역시 쉽게 잊을 수 없는 큐들로 짧고 점층적인 미니멀한 사운드가 가진 위력과 효과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곡이다. 마르코 벨트라미는 특히 오케스트라에 각종 이펙트나 다양한 소리들을 접목시켜 종종 자신만의 특색 있는 사운드를 창출하는데, 주로 호러 영화에서 활용될 법한 효과들을 정극에 도입해 독특한 긴장과 염세적인 분위기를 묘사해낸다. <
맥스 페인>과 <
허트 로커> 등에서 사용돼 이미 검증된 바 있는 이 방식은 ‘This is the End’, ‘Axe Gang’, ‘The Seven’, ‘Steam Car’, ‘Snow Melt’ 등에서 언뜻 드러나며 음계가 표현해낼 수 없는 지점의 감성을 포착하는 동시에, 음향과 멜로디의 접점과 경계를 통해 황폐하면서도 위협적이고 복합적인 심상을 자아낸다. 시스템과 전복적인 세력 간의 충돌로 읽혀질 수 있는 ‘소리’와 ‘테마’의 충돌은 마르코 벨트라미가 그간 담당해온 여러 디스토피아 사운드트랙의 중추이자 근간인 셈이다.
반면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Sushi’나 ‘Yona’s Theme’ 같은 서정적인 큐들의 배치는 다른 큐들과 극명하게 대비되며 모노톤 일색의 스코어에 일말의 휴머니즘을 설파한다. 금방 꺼져버릴 것 같은 성냥불이지만 온기와 밝음을 머금은 것처럼 적지만 분명한 어조로. 그는 최근작인 <
소울 서퍼>나 <더 세션>을 통해 이런 종류의 감정에 대해 탁월하게 공감을 자아낸 바 있다.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This is the Beginning’은 영화 내내 유지해왔던 디스토피아의 톤을 뒤집어 그 희망적인 시선을 계속 이어주는 곡으로 할리우드 특유의 파워풀하면서도 큰 스케일의 관현악 사운드를 유감없이 접할 수 있는, 사운드트랙의 백미이기도 하다. 육중하면서도 스피디하게 달려가는 기차를 형상화한 듯한 리듬과 서사적인 구조는 물론 결말에 이르러서 기차 탈선의 느낌을 상징하는 금속성의 엠비언트 소리들의 충돌로 곡을 마무리 짓는 것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트랙리스트엔 따로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맨 마지막 곡인 ‘Yona’s Theme’가 끝나고 나면 몇 초 지난 뒤에 사운드트랙의 이스터 에그로 마르코가 제일 처음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윌포드 찬가’의 데모 버전(그의 가족들이 직접 불렀다!)이 흘러나온다. 사운드트랙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삽입곡으로 등장하는 곡들의 면면도 흥미롭다. 단백질 블록을 만들어내는 칸에서 조리사가 틀어놓았던 음악은 하드록그룹 Cream이 부르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Strange Brew(수상한 제조)’이고, 식물원 칸에서는 영화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클래식 중에 하나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988이 흘러나온다. 사우나 칸에서는 Ray Noble의 ‘Midnight With The Stars And You’가 슬쩍 들리는데 영화 <
샤이닝>의 엔딩곡으로 쓰였던 노래로, 봉준호 감독이 스탠리 큐브릭에 대한 헌정을 담아 선택한 곡이라고 한다.
<설국열차>를 봉준호 감독의 베스트라 단언할 수 없을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마르코 벨트라미 역시 <설국열차>가 최고작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필모 중에서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품었고, 세계적인 공감대를 공유하기 위한 승부수를 띄웠다. 마르코 벨트라미 역시 생소한 아시아 영화에 도전했으며, 자신의 필모에서(최신작인 <
더 기버: 기억전달자>까지 포함해) 가장 극대화된 디스토피아 사운드를 완성해냈다. 끝에서 시작해 시작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갖는 힘은 언제나 크다. 그 울림을 고스란히 간직한 음악 역시 귀중하다. 마르코 벨트라미의 <설국열차>는 그런 에너지들이 충돌하고 폭발하며 힘차게 질주해대는 비장의 OST다.
Blackout Fight
Track List
1. This Is The End
2. Stomp
3. Preparation
4. Requesting An Upgrade
5. Take The Engine
6. Axe Gang
7. Axe Schlomo
8. Blackout Fight
9. Water Supply
10. Go Ahead
11. Sushi
12. The Seven
13. We Go Forward
14. Steam Car
15. Seoul Train
16. Snow Melt
17. Take My Place
18. Yona Lights
19. This Is The Beginning
20. Yona’s The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