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실은 눈멀기로 말하면 타고난 놈인데, 그 얘기 한번 들어들 보실라우? 어릴 적 광대 패를 첨보고는 그 장단에 눈이 멀고, 광대 짓 할 때는 어느 광대 놈과 짝 맞춰 노는 게 어찌나 신나던지 그 신명에 눈이 멀고, 한양에 와서는 저잣거리 구경꾼들이 던져주는 엽전에 눈이 멀고, 얼떨결에 궁에 와서는... 그렇게 눈이 멀어서... 볼 걸 못보고, 어느 잡놈이 그놈 마음을 훔쳐 가는 걸 못 보고. 그 마음이 멀어져 가는 걸 못 보고. 이렇게 눈이 멀고 나니 훤하게 보이는데 두 눈을 부릅뜨고도 그걸 못보고... 그건 그렇고! 이렇게 눈이 멀어 아래를 못 보니 그저 허공이네, 그려. 이 맛을 알았으면 진작에 맹인이 될 걸.” 한탄인지 푸념인지 아님 깨우침인지. 장생이 마지막으로 내뱉는 처연하면서도 담담한 이 대사는 영화의 모든 걸 아우르며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절대 권력자인 왕도 마음껏 누리지 못한 자유와 신명으로 세상을 풍자하고 조소하던 광대들의 비극적인 운명과 사랑을 담아낸 이 영화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한민국 최고 흥행작이 되었다.
2006년 초 <
왕의 남자>가 <
실미도>와 <
태극기 휘날리며>를 넘어 1,230만명이란 초유의 관객동원 신기록을 세웠을 때 모두가 놀랐다. 연출자인
이준익은 <
황산벌>이 성공했지만 아직 감독보단 제작자 및 영화수입으로 더 유명했고, 주연배우들인
감우성,
정진영,
강성연은 스타급 흥행배우라고 말하기엔 다소 무게가 떨어졌으며,
이준기는 완전 신예에 불과했다. 원작인 연극 <이 爾> 역시 2000년 초연 당시 각종 상을 휩쓸며 인기를 누린 작품이었지만, 엄연히 연극의 흥행과 영화의 흥행은 다르기에 이 정도 파괴력을 보일 것이라 예측한 이는 드물었다. 아니 사실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천만 영화는
강우석과
강제규란 검증된 흥행사가 만든 딱 두 편에 지나지 않았으니.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한 무오사화 즈음을 배경으로 전통적인 소리가 가득한 마당극에, 소학지희가 펼쳐지고, 동성애를 암시하는 장면까지 어느 것 하나 흥행할 요소라고 감히 말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오히려 그런 부분들이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와 ‘왕남폐인’들을 양산하며 흥행광풍을 불러왔는지 모른다. 가히 <왕의 남자> 신드롬이었다. 7개월 뒤 <
괴물>에 의해 다시 순위는 바뀌었지만 <왕의 남자>는 <
7번방의 선물>이 나오기 전까지 가장 적은 제작대비 최고 흥행수익을 올린 영화로 남아 있다. 음악을 맡은
이병우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괴물>과 <
해운대>까지 연이어 천만 영화를 터트리며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음악가 중 한명이 되었다. 포크듀오 ‘어떤 날’의 멤버이자 기타리스트로 유명한 그는 1994년 오스트리아 빈 국립 음악대학을 수석 졸업한 이후 1996년 <
그들만의 세상>을 필두로 영화음악에 뛰어들었고, 미국 피바디 음악원을 졸업한 이후 2001년 애니메이션 <
마리이야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영화계 행보를 이어나갔다. 2003년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와 <
장화, 홍련>의 잇단 성공으로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호러와 코미디, 가족물과 음악영화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특유의 서정적인 선율과 독보적인 멜로디 감각을 선보이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왕의 남자>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에 이은 그의 두 번째 사극으로, <스캔들>이 기존의 전통적인 국악 스코어에서 벗어나 바로크 시대의 챔버 사운드를 들고 와 사극에 새로운 시각과 독특하고 세련된 양식미를 부여했다면, <왕의 남자>는 그 챔버 스트링 앙상블을 유지하되 대금이란 전통악기를 전면에 내세워 보다 한국적인 색채와 스타일의 절충을 꾀하고 있다. 대금은 부드럽고 아름답지만 어두운 음색의 저취와 평취, 그리고 선 굵고 장쾌한 음색의 역취에 이르는 세 가지 음역대에서 변화무쌍하면서도 맑고 여무진 소리를 들려주는 악기다. 따라 장생과 공길, 연산이라는 복잡다단한 세 캐릭터의 슬픈 사연을 한데 엮어낸 선율을 연주하기에 더없이 탁월한 선택으로 여겨진다.
이병우와 그가 음악을 한 영화들
영화에서 가장 처음 마주치는 오프닝 크레딧의 ‘프롤로그-먼길’은 바로 그 대금의 맑지만 투박한 음색을 확인할 수 있는 큐로, 토속적이면서도 처연한 감성을 담아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다. 메인 테마인 ‘반 허공’이 변주된 곡인데 이는 이후 ‘돌아올 수 없는’, ‘세상 속으로’, ‘행복한 광대들’, ‘꿈꾸는 광대들’과 ‘에필로그?돌아오는 길’ 등으로 영화 내내 이어지며 길목이라 할 수 있는 부분에 위치해 극을 관망하고 정서적인 통일감을 부여한다. 특히나 반복적으로 무겁게 짓누르는 저음의 첼로는 광대들의 목숨을 건 풍자와 연산의 피비린내 나는 황음무도, 처선의 절개와 녹수의 질투를 한데 모아놓은 - 불안하고 비통한 심리의 선율로, 하나같이 비극적인 결말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잔혹한 운명을 상징한다. 이 위에 얹은 아름답고 서글픈 멜로디만이 그들을 위로하고 달래준다. 여러 테마를 사용하기보다 간단하면서도 다양한 변주를 통해 심리적인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그의 스코어들은 명료한 상징과 장치적인 효과를 갖는다. 주된 선율을 생략한 채 조심스런 감정을 드러내는 ‘연정’이나 주제부를 단순화시켜 연산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아낸 ‘그림자놀이-봉황은 울지 않는다’, ‘자궁 속으로’ 같은 큐들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밖에 ‘인형놀이’나 ‘반정의 북소리’처럼 간단한 타악 리듬으로만 그 상황의 분위기를 연출하거나 불길한 조짐의 ‘파적심의 울음소리’나 ‘장생의 외침’과 같이 질주하는 스트링과 파열음의 대금, 강렬한 퍼쿠션을 조성해 서스펜스를 극대화시키기도 한다. 신디 프로그래밍이 가미된 ‘광대 사냥’의 경우는 마치 제리 골드스미스나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를 듣는 듯 정석적이고 장르적인 사운드를 들려준다. 연극과 달리 영화는 장생의 시점으로 극을 이끄는데, 이를 위해 이병우는 특별히 극 후반 장생의 테마를 배치했다. 처연하고 구슬픈 대금의 ‘눈먼 장생’이 바로 그 곡이다. 절제되고 담백한 메인 테마 ‘반 허공’과 달리 이 곡은 절절하고 거칠게 한(恨)을 토로하는 아름답고 강렬한 선율을 가졌다. 이 선율이 흐르며 장생은 지난 과거를 반추하며 지금의 심적/육체적 고통을 승화시키고, 이 선율이 흐르며 공길은 연산에게 반 허공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연을 나타내는) 줄 위는 땅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반 허공이라고. 결과적으로 ‘눈먼 장생’과 ‘반 허공’은 대비되면서도 서로 이어진 이란성 쌍둥이와 같은 테마인 셈이다. 이 곡은 이병우가 직접 장생의 심정을 담아 작사한 주제곡 ‘가려진’으로 장재형이 불러 사운드트랙의 맨 첫 트랙에 실렸다. 시종일관 광대놀음의 풍물패 소리와 궁중음악이 깔리지만 그럼에도 이병우의 1분이 채 안 되는 짧은 큐들은 적재적소 빈 여백에 효과적으로 자리 잡아 내러티브와 캐릭터의 감정선에 밀접하게 연계돼 유기적인 호흡을 들려준다. 길이나 분량과는 다른, 밀도의 위력이다. 그간 이병우 영화음악에서 두드러진 건(물론 뛰어난 멜로디와 좋은 편곡의 힘도 무시 못 하지만), 감정과 경이의 순간을 포착한 놀라운 공명감이었다. 그 날카로운 울림이 관객들을 울리고 웃기고 가슴을 아리게 만들며 짙은 여운을 남겼다. 기타 디자이너로 직함을 늘리며 잠깐 동안 영화계에서 멀어진 이병우는 2013년 가을 세 번째 사극 <
관상>으로 다시 영화음악가에 복귀한다. 이전의 두 사극과는 또 다른 한국적 울림과 아름다운 멜로디로 무장해 관객들의 감성적인 약점을 치밀하게 파고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왕의 남자> 사운드트랙으로 미리 예습을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사운드트랙은 영상자료원(K-0038)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참고적으로 이선희의 ‘인연’은 <왕의 남자>의 주제곡이 아니다. ‘인연’의 뮤직비디오에 <왕의 남자> 클립이 쓰였을 뿐이다. 따라 사운드트랙에서 그 곡을 찾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Track List
1. 가려진 - 장재형
2. 먼 길
3. 각시탈
4. 돌아올 수 없는
5. 너 거기 있니? 나 여기 있어
6. 세상 속으로
7. 위험한 제의 하나
8. 행복한 광대들
9. 내가 왕이 맞느냐?
10. 위험한 제의 둘
11. 꿈꾸는 광대들
12. 수청
13. 인형 놀이
14. 연정
15. 그림자 놀이 -봉황은 울지 않는다
16. 피적삼의 울음소리
17. 광대사냥
18. 광대의 죽음
19. 어서 쏴
20. 질투
21. 장생의 분노
22. 내가 썼소
23. 애원
24. 장생의 외침
25. 눈먼 장생
26. 자궁 속으로
27. 반정의 북소리
28. 반 허공
29. 돌아오는 길
30. 반 허공 Guitar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