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의 나라> 정형석 감독 인터뷰: 선택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다

by.장성란(영화 저널리스트) 2018-08-13조회 3,717

정형석 감독의 장편 <성혜의 나라>(2017)는 취업 준비와 쉼 없는 아르바이트로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스물아홉 여성 ‘성혜’의 이야기를 건조하게 담은 작품이다. 주인공이 처한 겹겹의 문제 상황은 현재 한국 사회의 여느 20대가 마주한 상황과 다르지 않은데, 영화는 단지 상황을 보여주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의외의 결론을 내리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 선택은 당신의 삶을 어디로 이끌까?’ 영화의 질문에 대해 정형석 감독은 다른 세대의 입장에서 차근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시 | 2018년 5월 25일(금)
참석자 | 정형석 감독, 장성란 영화 저널리스트
기록 및 정리 | 이아림 「영화천국」 편집부
사진 | 김좌상 포토그래퍼

장성란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수상을 축하드린다. 지난해 <여수 밤바다>에 이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연이어 관객에게 작품을 선보였는데 감회가 남다르시겠다.
정형석    작년에는 첫 출품이라 경황이 없었는데 가을에 ‘폴링 인 전주’(다시 보는 전주국제영화제)에 참여하면서 영화제에 다시 가고 싶어졌다. 영화제는 ‘내 영화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매력이다. 영화를 개봉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고, 관객과 만나 영화에 대한 평가를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루트가 영화제다. 그걸 작년에 경험하면서 자극을 많이 받았고 <성혜의 나라>를 부지런히 완성해 올해 전주영화제에 출품했다. ‘영화제에 가고 싶어서’ 영화를 만든 셈이다(웃음).

장성란    <성혜의 나라>는 취업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출구를 찾지 못하는 20대 인물을 다룬다. 이는 최근 한국독립장편영화가 가장 많이 다루는 소재 중 하나다. 출구 없는 현실에 갇힌 주인공의 감정적 고난을 파고드는 것이 한국독립영화의 ‘클리셰’로 자리 잡았다. 주인공을 사지로 몰아넣는 느낌이라고 할까. <성혜의 나라>는 접근 방식이 다르다. 주인공의 현실과 감정을 어떤 태도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나.
정형석    현실을 ‘보여주는 것’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작품이 많은 것 같다. 나는 그걸 보여주면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했다. 일단 최대한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걸 우선시하고 주인공들을 더 나쁜 상황으로 몰아넣으려고 하진 않았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정도로만 상황을 맞춰놓았다. 그리고 개입하지 않는 것. 촬영감독과도 다큐 느낌이 들게끔 가자고 이야기 나눴다. 그 방식을 영화의 끝까지 시종일관 유지했다.

장성란    ‘감상적이지 않은 태도’가 주효했다. 이는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감독들이 ‘가져야 하지만 갖기 어려운’ 태도인 것 같다. 젊은 감독일수록 취업 전선에서 고전하는 주인공을 심리적으로 너무 가깝게 여기고 그 상황에 몰입한다. 어쩌면 감독님은 그 시절을 지난 세대라 객관적인 관점을 취할 수 있던 게 아닐까.
정형석    그렇다. 철저히 영화에 개입하지 않고 거리를 뒀다. 기교적인 것도 다 덜어냈고 음악도 쓰지 않았다. 지나온 세대이다 보니 그 상황을 넓게 볼 수 있기도 하다. 동시에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가르치는 느낌을 줄 위험도 있지만. 청년세대가 자기 얘기를 찍어서 보여주는 것과 다른 세대가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찍어 보여주는 것은 다르다. 이 소재에 접근한 이유는 다양한 세대와 상황을 공유하고 소통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장성란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는 성혜(송지인)의 노동 현장을 연이어 보여준다. 서울의 일상적인 밤거리와 골목이 시점에 따라 노동 현장으로 탈바꿈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정형석    무심결에 지나친 공간이 누군가에겐 치열한 노동의 현장이다. 영화에서 성혜를 에워싸고 있는 많은 것은 그녀에게 짐이다. 남자친구인 승환(강두)이 성혜에게 ‘왜 네 집에 못 가게 하냐’고 짜증을 내는데, 성혜에겐 작은 방 한 칸이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에 누구의 침범도 허락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장성란    흑백으로 찍은 이유도 궁금하다.
정형석    흑백이 관객과 영화의 거리감을 유지하게 해준다고 봤다. 성혜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고자 하지만, 컬러인 경우 현실감이 지나치게 부각될 것 같았다. 흑백은 판타지적인 느낌을 주는데, 관객이 이 이야기에 접근하기 조금 수월한 면을 취하면서, 즉 보고 싶지 않은 정도의 현실감은 눌러주고 두 시간 동안 관객을 붙잡으면서 이야기를 묵직하게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관객이 따라오길 원했다.

장성란    캐릭터 구성도 흥미롭다. 등장인물 중에 두드러진 악역이 없다. 승환은 성혜와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주는 인물이고, 전 직장의 동료(이미도)와 집주인 아주머니, 전화로만 등장하는 엄마 등은 성혜의 고난을 더하는 역할이지만 완벽하게 악인이라곤 할 수 없다. 모두 조금씩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정형석    현실적인 톤을 원했기 때문에 캐릭터를 작위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중 옛 직장 동료의 경우 영화에서는 여성인데 시나리오에서는 성혜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가진 남성 동료로 설정했다가 나중에 바꿨다. 여성 동료라면 성혜가 ‘성희롱 고발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왜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나’ 원망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주인은 악의는 없지만 성혜의 마음을 할퀴는 대사를 던진다. 월세를 올리는 것도 서러운데, “내 자식이 결혼하는데 이런 집에서 살게 할 수는 없잖아”라는 말이 듣는 이 입장에선 더 마음 아픈 거지.
사실 마음에 들지 않는 캐릭터도 있다. 성혜가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간 신에서는 ‘남자친구가 있느냐’ ‘부모님은 뭐 하시냐’ 등 전형적인 멘트를 던지는 면접관이 등장한다. 그들은 다분히 기능적인 캐릭터로서 클리셰를 부여했기에 내가 만들었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장성란    영화에서 ‘성혜의 얼굴’에도 주목할 만하다. 성혜는 이런 현실에 갇혀 있는 동안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작정한 것처럼 표정 변화가 없다. 이렇게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정형석    일단 성혜의 삶에 즐거운 게 없으니까. 팍팍한 일상은 매일 반복되고, 남자친구가 있지만 그조차 짐이고, 삶에서 웃을 일이라곤 찾기 힘든 상황이지.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로봇, 기계라는 함의다. 영화를 통해 사회 ‘시스템’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자 했다. 제목이 ‘성혜의 나라’인 이유도 시스템을 염두에 둔 것이다. 사회가 굴러가려면 이를 구성하는 모든 세대가 계속 돌아가야 한다. 사람들은 이를테면 기계인 셈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성혜가 기계임을 멈추고 사람으로 해방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시스템의 체인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 대부분은 그걸 끊지 못한다. 삶이 무너질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각자의 상황에 던져졌다. 성혜가 노동하는 삶에, 고시생은 끊임없이 공부하는 삶에 던져졌듯. 우리는 노동과 공부 자체가 인생의 본질적 목표가 되어버려 쳇바퀴 굴러가듯 하던 걸 ‘계속 한다.’ 사람들은 내몰린 셈이다. 극중에서 성혜의 한 친구는 고시원에서 자살하는데, 계속 더 나아갈 수 없어 죽음을 택한 것이다. 성혜 역시 부모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계속 그 고리를 끊지 못하고 굴러가지 않았을까. 성혜는 스스로 굴레를 끊었는데, 이 엔딩은 하나의 쳇바퀴가 멈추면 다른 데서 멈추고 또 다른 데서 멈춰 사회가 무너질 거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개인에게 동기부여를 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쳇바퀴 도는 것’ 자체를 목표처럼 살게끔 강요한다. 그게 반복될 때 이 사회가 어떻게 될지 경고하고자 했다.

장성란    성혜가 놓인 상황 하나하나가 짚어볼 만한 사회적인 문제를 암시한다. 그가 겪고 있는 문제를 정리해보면 일단 취업 문제가 있고, 미취업 상태가 건강과 스트레스 문제로 이어진다. 유일한 휴식처이던 집에서조차 월세 문제로 곧 나가야 한다(주거의 문제). 이런 처지에서 연애와 결혼은 무의미해진다. 성혜와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는 자살한다. 특히 성혜가 4년 전 취직한 회사에서 성희롱 사건 때문에 일을 그만뒀다는 설정은 우리 사회 성차별의 문제까지 아우른다. 이런 세부 묘사가 무척 설득력 있다.
정형석    인물에게 특수한 상황이나 사건을 부여하기보다 그들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아주 작은 부분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사회적 문제들을 캐릭터에 의도적으로 넣은 게 아닌데 내 주변에서 비슷한 케이스를 찾는 과정에서 보니 그런 삶이 굉장히 보편적이고 더 암담하더라. 그중 직장 성희롱 문제 앞에서 성혜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일 것이다. 참거나 그러지 않거나. 사실 많은 여성이 그 상황을 참는다. 성혜는 참지 않았는데 그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았다. 영화에선 흘러가듯 묘사되지만 사실 그건 성혜가 삶에서 부딪힌 매우 큰 사건이었다. 밖에서는 작아 보이는 하나하나의 크기가 당사자에게는 다르고, 그건 우리 삶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바꾼다는 의미로 보면 좋겠다.
부모의 죽음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삶에서는 직접 겪지 않으면 남의 일일 뿐이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과 성희롱을 당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모두 아주 큰일이다. 교통사고는 금전적인 보상을 받았지만 성희롱은 상처만 남겼고. 교통사고는 내 의지로 피하거나 선택할 수 없는 사고지만, 성희롱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 상황을 다르게 만들 수도 있는 ‘사건’인 셈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성혜가 처한 악순환의 상황을 끊어주는 것은 ‘사고’다.

장성란    부모님의 교통사고에 대해 가해자로부터 성혜가 받는 합의금은 왜 하필 5억 원인가.
정형석    2억은 너무 적고, 10억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적절한 액수가 5억이라고 봤다(웃음). 그런데 그 5억조차 따지고 보면 큰돈이 아니라는 게 너무 씁쓸한 거지. 공연을 하다 보면 주변 젊은 친구들의 경제 사정이 다들 너무 어렵다. 어찌 보면 영화 속 성혜는 취업준비생일 뿐이다. 그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로 한 달에 150만~160만 원을 번다. 그런데 현재 최저생계비가 157만 원이라더라. 계산한 부분은 아니었는데, 성혜가 5억 원을 보험회사에 맡기고 40년 동안 한 달에 받을 돈도 그 정도다. 즉 보험회사에서 받는 돈으로 생존은 하지만 ‘생존만 가능하다’는 의미다. 다른 즐거움이나 행복을 추구하지 못하는 삶이다. 그런데 매월 그 돈조차 벌지 못하는 청년이 상당히 많다. 주변에 연극하는 친구들을 보면 더 그렇고. 성혜의 경우 꿈과 비용을 맞바꾼 것도 아니고 단지 생존하는 데만 그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는 게 씁쓸하다.

장성란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 중에서 아마도 가장 도발적인 결말을 선보이는 것 같다. ‘개인을 부품처럼 쓰는 이 사회에서 더 이상 부품 노릇을 하지 않고 노동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 무척 대담하다. 돈 조금 더 벌겠다고 그 모든 스트레스 껴안느니 그런 선택을 하는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결국 그렇게 택한 것이 매달 150만 원짜리 행복이라는 게 더 처절한 비극처럼 느껴진다.
정형석    엔딩에서 성혜는 웃고 있지만 진정으로 웃고 있지 않다. 결국 성혜도 그다지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처음 이 영화가 시작된 계기가 바로 그 결말이다. 시나리오를 시작할 때, 스물아홉 청춘을 모델로 해서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지금 그들이 가진 고민과 삶에 대해 질문했다. 그 과정에서 큰돈이 갑자기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해서 주변에 물어봤다. 그런 질문을 한 것도 내가 기성세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40세를 넘긴 세대는 상당수가 목돈을 쪼개서 살 거라고 이야기했지. 그런데 젊은 세대에게 물어보니 단 한 명도 ‘연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카페를 차릴까, 유학을 갈까 등등…. 20대인 한 친구는 연금에 대해 굉장한 거부감을 보였다. 속물적이고 패배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영화에 대한 반응도 세대에 따라 다른 거다.

장성란    주인공 성혜를 왜 스물아홉 살의 여성으로 설정했나.
정형석    인생에서 가장 불안한 시기인 데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남성보다 훨씬 어려운 게 사실이다. 승환의 경우 지인에게 신세 지거나 허허실실 눙치고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 성희롱을 포함해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작은 부분들이 남성에 비해 훨씬 어렵다. 영화에 담지 않았지만 성혜가 후반부에 신문보급소 일을 그만두는 장면에서 보급소장을 맡은 배우가 애드리브로 ‘끝나고 소주 한잔하지~’라고 말했는데 그것조차 성혜에겐 또 하나의 공포로 작용할 수 있다.

장성란    한국에서 여성 관객이 스크린을 통해 보고 싶어 하는 동시대의 이야기를 상업영화보다는 독립영화 쪽에서 더욱 활발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정형석    다른 매체와 인터뷰할 때 ‘젊은 여성 감독인 줄 알았다’고 하시더라(웃음). 사실 독립영화에서도 갑갑한 부분은 있다. 사고가 가지를 뻗어 더 멀리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하고. ‘보여주는 것’에 머물거나 ‘힘들다’고 얘기하고 끝나는 느낌이 있다. 언젠가부터 스크린에서 청춘영화가 사라졌다. 1980년대엔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 같은 영화가 있었는데, 지금 그런 영화를 만들면 너무 이상적이라고 질타받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도 그런 청춘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내 세대가 이 시대 스물아홉 무렵의 청춘에 대해 얘기할 때엔 뭔가를 좀 짚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성란    극작과 연기, 연출 등 공연계에서도 다방면으로 활동하는데, 영화를 계속 찍는 동력은 무엇인가.
정형석    창작자 입장에서 멈춰 있으면 도태되는 것 같아서 끊임없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영화나 연극은 창작이라는 큰 틀에서는 같되 표현하려는 메시지에 따라 연극이 더 적합할 수도, 영화가 더 나을 수도 있는 거지. 무대 작업을 계속하지 않았으면 영화도 못했을 것 같다. 글 쓰고 무대를 연출하고 출연하는 작업은 다시 영화 작업의 원동력이 된다. 1년에 영화를 한 편씩 만드는 게 목표다. 닥치는 대로 하다 보면 ‘저 사람에게 뭐가 나올까’ 궁금해할 수도 있지 않겠나(웃음). 대신 늘 중요한 것은 ‘잘 만드는 것’이다. 스타일이나 장르를 추구하기보다는 어떤 방향으로든 ‘잘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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