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등급정보
(1)
심의일자 1995-04-19
심의번호 제95-132호
관람등급 중학생가
상영시간 232분
개봉일자 1995-05-05
(2)
심의일자 1982-03-19
관람등급 12세미만불가
상영시간 228분
개봉일자 1982-03-25
(3)
심의일자 1978-01-19
심의번호 외제1360호
관람등급 국민학생관람불가
상영시간 232분
(4)
상영시간 226분
개봉일자 1957-03-25
(수도극장, 국도극장(동시개봉))
(5)
상영시간 230분
개봉일자 2021-04-28
(리마스터링 재개봉 (2021))
다른제목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극장 개봉)
개봉극장
國都劇場(1982년 개봉극장), 명보, 신영 외(1995년 개봉극장)
노트
1957년에 수도영화사가 수입하여 수도극장과 국도극장에서 동시 개봉하였다. 그러나 개봉되기 오래 전부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관한 입소문이 상당했다. 영화 제작 과정은 언론을 통해 잘 알려지고 있었다. 1930년대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제작비 425만 달러, 12명의 참여 작가와 3명의 감독(조지 쿠커, 샘 우드, 빅터 플레밍)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거나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은 비비안 리는 1,400명의 여배우의 오디션을 거쳐 선발되었다는 식의 뉴스가 화제가 되곤 했다.
소설의 인기 자체가 상당했다. 마가렛트 미첼의 원작은 “4천만인의 독자와 49개 국어를 이미 차지한 출판사상 경이의 소설!”(일간지에 실린 서적 홍보문구)이었다. 한국에서도 1953년에 원작 소설이 번역 출판되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상황이었다. 1956년 6월에는 연극으로도 각색되어 극예술협회의 창립 기념으로 공연이 올라가기도 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그 인기는 소설을 뛰어넘었다. 국도극장만 하더라도 46일 동안 장기 상영했고, 관객수 8만 명이 넘어 그해 개봉된 영화들 가운데 최고의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웠다(주석 1). 그러나 당해 최고의 흥행 성적에도 불구하고 영화사는 수습하기 어려운 적자를 내었다. 수입가격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외화의 평균 수입가격은 5천불에서 8천불 사이였고 1만불 정도면 “좀 쓸만한” 작품을 수입할 수 있는 높은 가격에 속했다(주석 2). 5만 4천불에 달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수입료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한편으론 이 영화를 두고 검열의 일관성 여부를 묻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가 즐비한 광경 때문에 한국의 관객에게 염전(厭戰) 사상을 고취시켜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열에 통과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서울대의 의과대학을 비롯한 몇몇 학교에서 80환의 관람료를 받고 영화를 상영한 사실도 문제가 되었다. 문교부의 검열도 받지 않은 영화를 흥행장이 아닌 학교에서 공공연한 입장료까지 받고 상영한 것은 불법이라는 것인데(주석 3), 문교부 당국자는 이 사안을 두고 “필름을 압수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주석 4)라고 까지 말하며 강경한 태도를 표했다. 결국 서울시 경찰 당국이 진상 조사에 착수하여, 서울대 관계자들을 문초하고 치안 재판에 회부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1. "관객 동원 수에서 본 국내외 영화 베스트 텐", 서울신문, 1957.12.29(4)
2. "관객수 제작(수입)비 세율로 본 영화기업의 현황", 서울신문, 1958.03.30(4)
3. "서울대 관계자 경찰에서 문초 / 불법영화 상영문제", 조선일보, 1956.11.10(2)
4. "추천도 안 된 영화 학교에서 상영 / 문제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조선일보, 1956.11.09(석3)
- 오영숙(영화사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