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동
Kim Su-dong / 金秀東 / 1934  ~ 
대표분야
감독
활동년대
1960, 197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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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수출전선의 전위 원양어업 (김수동, 1974)
오늘의 양식어업 (김수동, 1974)
옛성(이조건축의 미) (김수동, 1970)
돌다리 (김수동, 1970)
사관후보생 (김수동, 1970)
근대화의 에너지 (김수동, 1969)
밤나비 (김수동, 1969)
묵화 (김수동, 1969)
죽어도 한은 없다 (김수동, 1968)
(김수동, 1968)

주요경력

1934년 8월 1일 부친 김을한, 모친 민덕임 사이에서 1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59년 일본 다이에이(大映)영화사 조연출로 입사. 이후 5년 동안 마스무라 야스조, 오즈 야스지로, 요시무라 코자부로 등의 감독과 함께 작업. 주일공보관장 홍경모의 부탁으로 재일교포 영화인 유진식 등과 함께 주일공보관 패션쇼 <한국의 미> 촬영
1961년 유심평, 최당섭, 유진식, 김덕용 등과 함께 재일한국영화인협회 결성
1964년 귀국
1965년 첫 연출작 <만가>를 시작으로 1969년까지 7편의 영화 연출
1969년 <석유란 무엇인가>, <사관 후보생>, <히말라야의 도전>을 비롯하여, 문화영화와 교육영화 제작
1972년 KBS PD로 입사. 첫 작품 <반지>를 시작으로 연출활동 시작
1973년 단막극 <소년>(김수현 작, 김수동 연출) 미국 에미상 출품
1974년 일일연속극 <꽃피는 팔도강산> 연출
1986년 12월 KBS 예능국 제작주간
1987년 10월 KBS 예능국장
1989년 1월 KBS 예능국 제작주간
1989년 7월 KBS 방송심의실 심의위원,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 출강
1990년 3월 KBS 예능2국 드라마제작위원
1992년 KBS 정년 퇴임, KBS 영상제작단 PD
1994년 삼화프로덕션 이사
1996년 프리랜서 PD 활동,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 출강

기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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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김수동은 조선일보 기자와 서울신문 전무를 역임한 김을한(1906~1992)의 아들로 서울에서 출생했다(한국영화감독사전). 이후 한국전쟁을 피해 가족 모두가 일본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아버지를 따라 기자가 되려했으나 외국인의 신분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촬영기사였던 이창용의 소개로 다이에이(大映) 영화사에 입사하였다. 일본의 명감독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부초>(1959)에 참여하면서 연출수업을 했다. 또한 마스무라 야스조, 요시무라 코사부로, 미스미 겐지 등의 작품에 참여하면서 영상과 이야기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신상옥 감독의 일본 로케이션 촬영을 도우며 신상옥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신상옥 감독의 권유로 <만가>(1965)로 한국에서 감독 데뷔를 했다. 신필름에서 독립한 황기성과 함께 두 번째 작품을 기획하고 있을 무렵 이두용이 조연출을 자청하며 찾아왔고 이후 이두용과는 마지막 영화까지 함께 했다. 그가 연출한 영화들의 흥행 성적은 좋지 않았다. 영화 연출에 한계를 느끼고 있던 차에 일본 공보관 행사 때 알게 되었던 홍경모와 극작가 이상현으로부터 TV 드라마 연출제안을 받게 되었다(한국영상자료원). 이후 1970년대 후반까지 KBS의 TV프로듀서로서 텔레비젼 드라마 연출에 전념했다. <만가>의 여주인공 역을 맡았던 황승리가 그의 아내이다(한국영화감독사전).

* 참고문헌
『김수동 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한국영상자료원, 2010, 10~13쪽.
한국영화감독사전
(http://www.kmdb.or.kr/actor/mm_basic.asp?person_id=00004916&keyword=김수동)

[작성: 김성희]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32년 7월 8일 조선일보 기자(1926)와 서울신문 전무(1956)을 역임한 김을한(1906~1992)의 아들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일본의 성성(成成)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와 동보영화사 연출부에 입사. 34명이나 되는 조감독 밑에서 견습과정을 거쳐 5년 만에 조감독이 되었다. 일본의 조감독 시스템은 제 2 조감독이 6년이 되어야 투표로 제1 조감독이 되는데 행운을 얻은 셈이었다. 그때 감독으로는 저명한 고바야시 등이 있었다. 메가폰을 잡게 된 것은 일본에 촬영차 왔던 신상옥 감독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였다. 데뷔작이 당시 일본 독서가에 인기를 끌었던 하라다 세지코 원작 <만가>(1965)였다는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6.25 전쟁이 일어난 고등학교 3학년 때 피난지인 부산에서 본 프랑스 영화 <정부 마농>에 반해 영화감독을 동경하게 된지 15년 만이었다. 신필름 제작, 김진규,황승리 주연의 이 영화는 단조로운 부부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외간 남자와 놀아난 아내로 인해 실의에 빠져있던 건축설계사가 관절염을 앓고 있는 처녀와 사랑하게 되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고 죄책감을 갖게 된 처녀 역시 그의 곁을 떠난다는 내용. 그는 1년을 쉬고 1967년 한 해동안 옛애인과 재회했으나 서로 맺어질 수 없는 기혼자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단발머리 여학생 시절로 돌아가는 애틋한 러브스토리 <단발머리>를 비롯한 <여왕벌>,<마지막 요일>등 세 편을 발표했다. 그뒤 <죽어도 한은 없다>,<딸>(1968),<밤나비>(1969)를 내놓았으나 사실상 영화계 활동을 중단한 채 1970년대 후반까지 KBS-TV의 프로듀서로서 텔레비젼 드라마 연출에 전념했다. <만가>의 여주인공 역을 맡았던 황승리가 그의 아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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