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시대적 감수성의 재발견 한국영상자료원 원로영화인 구술③ 영화감독 김수동

by.김승경(영화사연구소) 2012-11-28조회 1,637
김수동

김수동은 193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안동 김씨 가문과 여흥 민씨 가문의 후손이라는 것은 일제 강점기인 어린시절에 오히려 짐처럼 느껴졌다. 나라와 백성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왕과 그 신하의 집안이라 생각하며 권위와 권력에 대해 무관심하게 자라났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1950년 말 동경특파원인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의 초중고 생활이 책과 함께한 시간이었다면 그의 대학생활은 영화와 함께 한 시간이었다. 고전영화관에 하루종일 앉아 장 르누아르, 르네 끌레르 등이 감독한 프랑스 영화를 보았고, 오즈 야스지로 등의 영화를 보며 인간의 가장 평범한 이야기인 관혼상제를 소재로 깊은 울림을 만들어 내는 것에 감동하였다.

대학 졸업 후 일본 다이에이(大映) 영화사에 들어가서 5년 간 조연출로 근무한다. 이곳에서 오즈 야스지로, 마스무라 야스조, 요시무라 코자부로 감독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고, 그들의 감성과 영화 기법을 배웠다. 1964년 신상옥 감독의 제안으로 한국으로 돌아왔고, <만가> (1965), <단발머리>(1967), <딸>(1968) 등 7편의 극영화를 만들고, 문화영화를 만들다가 1972년 KBS 드라마 PD로 입사하여 <꽃피는 팔도강산> <아내> <옛날의 금잔디> 등 160여 편의 드라마를 연출하였다.

혹자는 김수동 감독이 영화계에 기여한 바가 크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1960년 대 그가 만든 작품들은 운명이나 집안, 사회 등의 개인이 넘어설 수 없는 외부요소보다는 개인의 감성과 주인공 간의 사랑 그 자체가 주제가 되었다. 당시 비극적 운명을 토대로 한 멜로드라마가 유행했던 시절 이러한 주제들은 관객들에게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여성인권이 조금씩 신장되고 있던 시대에 ‘여성자아찾기’를 주제로한 그의 영화는 신선한 파문을 던져주었고, 세련된 영상미를 보여주었다.
영화와 드라마의 간극 좁히기

그의 활동은 KBS PD로 입사한 후에 더욱 활발해지는데 영화같은 드라마를 만든 것이 바로 그것이다. 1970년대 당시 TV 드라마는 라디오 드라마를 화면으로 옮겨놓은 듯한 연속극 형태가 주류를 이뤘는데, 5부작 일일연속극, 등의 단막극을 시도하다가 1984년 90분짜리 단막극인 <드라마 게임>이 시작되면서 TV영화에 대한 가능성을 실험하게 되었다. 1회를 시작으로 60여 편의 작품을 연출하면서 당시 드라마에서는 생소한 올로케이션 촬영, 롱테이크 기법 등을 통해 영상미를 끌어올렸고, 자신의 장기인 잔잔한 영상 속에서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탐구를 통해 TV드라마를 ‘예술’이라는 범주에서 논할 수 있게 하였다.

김수동 감독과의 인터뷰의 시작이 1950년 대 일본영화계가 가장 정점에 있었다고 평가되는 시기의 일본영화계를 증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감독이라는 점이었다면, 한국의 도제시스템 속에서 영화를 배우지 않은 감독으로서 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른 구술인터뷰에서는 얻을 수 없는 수확이었다. 또한 영화감독 출신으로 방송 드라마 PD가 된 유일한 사람으로서 겪었던 어려움이나 방송과 영화의 매체 간의 차이, 드라마 내에서의 영화적 시도 등은 영화와 방송의 매체 융합시대를 살아가는 영화인들이 한번쯤 귀를 기울여야할 이야기들이다.

✽구술 원문은 영상자료원 2층 영상도서관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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