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갑
Kim Hee-kap / 金喜甲 / 1922  ~  1993
대표분야
배우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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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깜보 (이황림, 1986) 뺏다영감
88 짝꿍들 (서윤모, 1984)
사후세계 (장일호, 1981)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읍니다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김수형, 1980)
난 모르겠네 (심우섭, 1980) 강사장
그 여자 사람잡네 (이형표, 1980) 아버지
아리송해 (심우섭, 1979) 최상무
낙조 (이형표, 1978) 원노인
남궁동자 (김수형, 1977) 할아버지
시집가는 날 (김응천, 1977) 맹노인(맹진사의 부)

주요경력

1946년 반도가극단에 들어가 무대 뒤에서 대사를 읽어주는 업무를 하던 중 대구 폭동으로 자리를 비운 배우들을 대신하면서 연예계에 본격 진출
1953년 가도가극단 단원
서라벌악극단 단원
1985년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예술공연단 일원으로 방북

기타정보

기타이름
합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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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2년 함경남도 장진에서 태어났다. 회성중학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도항하여 메이지(明治)대학 별과에서 수학했으나 1942년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고 한다. 전력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해방을 맞아 서울로 내려간 뒤 1946년 3월부터 반도가극단에서 연출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 <장화홍련전> 공연에서 무대에 선 것을 계기로 반도가극단의 간판 배우로 활동하게 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 수복 전까지 계림극장 지하에서 은신생활을 했으며, 이후 선무공작대(군예대) 소속으로 활동했다. 이후 가도가극단, 서라벌악극단 등을 거치며 악극단 생활을 하던 중 한형모 감독으로부터 출연교섭을 받아 영화 <청춘쌍곡선>(1956)에 출연하게 되면서 일약 인기 영화배우로 부상했다. 1958년 권영순 감독의 <오부자>에 양훈, 양석천, 구봉서와 함께 출연하면서 “합죽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박시춘의 <삼등호텔>(1958), 김화랑의 <한번만 봐주세요>(1958), 강대진의 <박서방>(1960), 신상옥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등에서의 코믹한 연기를 통해 대표적인 희극배우로 자리 잡았다(김희갑). 특히 1962년의 <와룡선생 상경기>에서는 서울로 상경하여 제자들을 만나는 노(老)선생 역할을 맡아 좋은 반응을 얻었다. 1964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 19개 도시를 순회하는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동행한 배석인 감독과의 인연으로 1967년 <팔도강산>에 출연했다. 이 작품의 큰 성공은 5편까지 제작된 후속 시리즈와 1974년의 KBS 일일연속극 <꽃피는 팔도강산>으로까지 이어졌으며, 이 모든 작품에서 김희갑은 자신의 이름을 딴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김희갑).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많은 작품에 출연했으며, “한국의 채플린”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59년 어용 예술인 단체였던 반공예술인단의 단장 임화수에게 폭행을 당해 화제가 되었으며, 1985년에는 남북한 문화예술단교환방문으로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경향신문). 1993년 5월, 71세를 일기로 지병으로 별세했다(동아일보).

* 참고문헌
경향신문 1993년 5월 20일자 17면
동아일보 1993년 5월 20일자 31면
김희갑, 『어느 광대의 사랑』, 삼진기획, 1992.

[작성: 김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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