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빨간 마후라: 4월의 영화 Ⅰ 신상옥, 1964

by.김영진(영화평론가) 2020-04-01조회 9,077
빨간 마후라 스틸

어렸을 때 작은 외삼촌과 함께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를 봤다. 마포 극장에서 리바이벌 상영이었다. 극장은 입추의 여지없이 만원이었다. 나관중 소령(신영균)이 부상을 입은 채 불타는 비행기를 몰아 다리 폭파의 임무를 완수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애가 닳았다. 전쟁이 끝난 후 에필로그, 시민들 앞에서 전투기들이 쉭 쉭 소리를 내며 곡예를 할 때 어린아이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나는 공군이 될 거야요. 이 다음에 커다랗게 자라면...”으로 시작하는, 육군, 해군, 공군으로 번갈아 바꿔 당시 아이들이 자주 불렀던 노랫말처럼. 

다시 본 <빨간 마후라>는 클리셰 덩어리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불쑥 뚫고 튀어나오는 감독이자 제작자 신상옥의 기개가 화면에 넘친다. <성춘향>(1961)의 기록적인 흥행 성공 이래 충무로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굳힌 신상옥의 영화사 신필림은 작은 방송국과 맞먹는 규모였지만 <빨간 마후라>가 극장에서 흥행할 때 부도를 맞을 만큼 경영상태는 오락가락했다. 신상옥의 그릇은 할리우드식 스튜디오를 지향했으나 한국영화산업의 형편은 영세했고 전근대적이었다. 생전의 사석에서 신상옥 감독을 뵈었을 때 그는 지방 극장들에서 수금액이 제때 올라오지 않아 늘 자금난에 시달렸다고 회고했다. 그런데도 <빨간 마후라>는 한운사 집필의 원작료만으로 당시 영화 한 편의 제작비에 준하는 금액을 썼고 공중전 촬영에 세 대의 카메라를 동원했으며 당시 한국영화 표준이 흑백이었던데 반해 화려한 색채 필름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2년. 전투기들이 사천 기지에서 강릉 제10 전투 비행대로 향한다. 씩씩한 음악은 휘파람 소리로 바뀌고 묵직한 남성 중창의 주제가 ‘빨간 마후라’가 흐른다. 배대봉 중위(최무룡)를 비롯한 아홉 명의 젊은 조종사가 전대장에게 신고를 한다. 홍길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전대장은 모두에게 빨간 마후라를 나누어주면서 말한다. “전투나 사랑이나 비겁하지 말아라!” <빨간 마후라>에는 오글거리는 대사가 많다. 인간이라기보다는 군인이 하는 대사가 많고 인간의 정념이 드러나는 대목에선 예외 없이 감상주의가 튀어나온다. 그러면서도 그 감상주의를 있는 힘껏 부정하는 또 다른 감상으로 틀어막는다. 이를테면 조종사와 벼락 결혼했다가 과부가 된 지선(최은희)를 연모하는 조종사 배대봉은 실의에 빠져 지내다 새 출발을 결심한 지선의 이사를 도와주는 장면에서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저희들 조종사들은 오늘만을 생각합니다. 내일은 알 수 없는 거고 오늘을 충실히 살기 위해서는 어제를 돌아볼 겨를이 없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살기로 했었는데 이젠 자신이 없어졌어요.” “그럼 죽어야겠죠.” “네?” “그러나 살아 주십쇼. 제발. 슬픔은 누구에게나 있는 겁니다. 자기만이 비극의 주인공인 것처럼 제발 생각지 말아 주십쇼.”
 

이런 장면 다음엔 가차 없이 출격에 나선 전투 비행단의 장면이 이어지고 화면엔 전투기 굉음과 그들이 창공을 횡단하는 수평과 수직의 움직임이 빠른 속도로 교차 된다. 매번 전투는 예상치 못한 질곡에 빠지고 누군가는 전투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며 누군가는 구사일생의 기회로 살아난다. 신상옥의 회고에 따르면 이 영화는 공군의 비협조로 애를 먹으며 찍었다. 비행기 조종간에 카메라를 설치해 전투 장면의 박력을 담아내려 했던 시도가 웬만한 장편영화 한 편 분량의 필름만 소모하고 실패하면서 신상옥이 직접 잡은 카메라는 정교한 사전 계획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순발력과 임기응변으로 대다수 전투 장면을 담아낸다. 화면에는 하늘에서 선회해 지상으로 다가오는 전투기들을 마치 실제 전투에서 맞닥뜨린 것처럼 다급하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절박함이 담겨 있고 예전 기록 필름에서 가져온 듯한 북한군의 사격장면조차도 그 절박함에 응대하는 느낌을 준다. 위험을 무릅쓰고 공군 편대를 하늘에서 쫓아다니며 황망하게 찍어낸 듯한 숏들이 기록영화적 질감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이 하늘의 드라마와 병치되는 지상의 드라마는 급박한 전투 장면의 리듬만큼이나 빠르고 느닷없다. 나관중은 동료 고도원이 이북 출신 여성 지선과 벼락 결혼을 한 뒤 전투에서 사망한 걸 가슴 아파하며 지선의 안위를 위해 후배 배대봉 중위가 지선과 사귈 것을 권유한다. 고도원과 지선, 배대봉과 지선의 사랑이 지상의 드라마로 전개될 때 나관중은 그들의 보호자, 나아가 모든 후임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정작 그 자신은 전투에서 죽어야 할 운명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가 죽은 뒤 그가 생전에 쓴 유서에는 “나는 전쟁에만 필요한 놈이다. 나 같이 무식하고 더럽고 쓸모없는 인간은 빨리 없어지고, 순수한 너희들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너희들은 자라나라, 나는 그 밑에 깔릴 재다, 거름이다.”라고 적혀 있다. 
 

신상옥은 자신의 대표작인 이 영화를 ‘반전영화’라고 자평했으나 거기에는 카레이싱에 임하는 카레이서의 심정에 준하는, 죽음의 경계에 임박해서야 삶의 절박함을 느끼는 살아 있는 자들의 흥분과 절망이 있다. 그것은 여자들의 보호자를 자임하면서도 여자들의 보호를 원하는 남성들의 이중적인 욕망과 겹쳐 있는데 이 모순을 헤집는 것은 창공을 가르는 비행기들의 거침없는 속도와 에너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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