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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
Kim Jung-hoon / 金廷勳 / 1961 ~
대표분야
배우
데뷔작품
<이세상 끝까지> 1965
활동년대
1960, 1970, 1980, 1990, 2000
DB 수정요청
소장자료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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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라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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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새벽
(김주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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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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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고
우리들의 고교시대
(김응천,문여송,석래명, 1978)
재수
고교 고단자
(김인수, 1978)
강식
슬픔이 파도를 넘을 때
(조문진, 1978)
성규(고등학생)
수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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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회 부일영화상(1970)
:
특별상(
)
주요경력
1982년 국립타이완대학교 사학과 입학
1989년 2월 귀국 후 광고대행사 "디딤기획사" 운영
1990년 훈 이벤트 대표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사촌형이 <신필름>에 근무했었는데 갑자기 아역이 필요하다고 해서 출연하게 되었다. 부모님의 반대가 컷지만 어린 나이에도 영화찍은 일을 좋아해서 그후로도 영화를 하게 되었다. 어렸을때는 고생했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한달에 7작품을 한꺼번에 찍었던 적도 있었는데, 납치사건도 종종 겪었다. 비라도 내려 촬영이 펑크나면 그걸 떼우기 위해서 였는데, 약속된 영화사쪽에서 찾으로오면 제작부장들이 나와서 싸우는 동안에 영활 찍기도 했던 에피소드가 있다.
주요 영화작품
이세상 끝까지(1965,고영남)
미워도 다시한번(1968,정소영)
필사의 검(1969,김시현)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970,정진우)
꼬마신랑(1970,이규웅)
고교얄개(1976,석래명)
얄개 행진곡(1977,석래명독)
주요기타작품
1976년 똘똘이의 모험(TBS)
1977년 서울로 가는 길(TBS)
1991년 KBS2 월화드라마 <3일의 약속>
2005년 EBS <지금도 마로니에는>
2005년 EBS 문화시리즈 지금도 마로니에는(뮤지컬)
2008년 돌아온 고교얄개(뮤지컬)
애착작품 및 사유
우리나라 대표 멜로물로 손꼽히는 '미워도 다시한번'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서울에서만 26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관객이 들었는데, 국도극장에서 세운상가 쪽으로 끝이 보이지 않던 줄이 기억난다. 그리고 70년도에 찍었던 '꼬마신랑'도 대표작품중 하나로 알려졌다. 무척 고생했던 작품으로 신상옥 감독님의 '13세 소년'이라는 전쟁물과 청춘물의 시대를 열었던 '고교얄개'가 기억나는 작품들이다.
하고싶은 말
우리나라 제작사들은 스텝들에게 투자를 너무 안한다. 좁게 대만의 경우만 하더라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영화에 흥미를 가진 젊은이들에게 나라에서 우선해 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마치고 돌아오면 2-3년 정도 방송국 생활을 거쳐 능력있는 젊은이들에게 입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81년 정도만 하더라도 홍콩이 우리영화보다 10년쯤 뒤떨어져 있었는데 불과 6,7년만에 우리보다 10년을 앞서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시장이 좁다는 핑계만을 대기보다는 앞을 내다보고 투자를 활성화하기 바란다. 그리고, 유행에 휩쓸리는 제작현실을 지양했으면 한다. '쉬리'이후 갑자기 빅버젯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아 졌는데 다양한 영화시장이 형성되었으면 한다. 그만큼 성숙된 관객의식이 되어야 하는것도 뒤따라야 할 일이다.
영화속 명소
어렸을때 사극을 찍으러 지방에 자주 갔었다. 지금 기억에 그당시 우리나라의 공기가 무척 좋았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는 그렇지 못해 아쉽다. 호주나 대만같은 경우 자연경관을 잘 보호해 깨끗하고 맑은 자연을 접할 수 있느데, 우리나라는 산이나 바다 곳곳에서 버려진 쓰레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보호가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어려서부터 연기생활을 해서 많은 역할들을 맡아보았는데, 유독 악역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다.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나라 연출자들은 너무틀에박힌 역할만을 고집하는 경향이 짙어 이미지 변신이 어렵다. 외국의 경우, 선한 외모의 연기자가 180도 이미지를 바꾸어 악역을 연기하는 경우도 많다. 프로 연기자는 어느역을 주어도 어느정도의 소화는 다 해내리라고 생각한다. 연기의 폭이 좁은게 아쉽다.
자기소개 및 취미
매주 일요일마다 동료연예인들과 축구를 할 정도로 스포츠를 즐긴다. 고등학교때 수영선수 생활을 했던 경험도 있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말을 잘 못하는데, 그걸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건방지게 보는 사람이 다소 있지만 무척 털털한 성격이다. 대만과 인연을 맺은건 '미워도 다시한번'이 동남아 지역으로 수출이 되 히트되면서 필리핀 국경의날 초대되어 갔던 자리에서 대만 영화사의 섭외를 받아 약 1년간 그곳에서 영화를 찍으며 체류하면서 부터이다. 어려서부터 연예활동을 시작해 학교생활등 어려움이 많았다. 연예인도 일반인과 똑같은 사람인데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각이 많다. 좀더 보편적인 시각으로 연예인을 바라봐 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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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김정훈은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사랑받은 아역 스타이다. 그는 네 살 때, 고영남 감독에게 픽업되어 <이 세상 끝까지>(1965)에서 아역으로 데뷔했다(영화백과). 3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미워도 다시 한번>(1968)에 아역으로 출연하면서 김정훈은 일약 스타가 됐다. 이후 <미워도 다시 한번> 1, 2, 3편에 출연하였다. 주연을 맡은 <꼬마신랑>(1970)이 크게 히트하면서 김정훈이란 이름보다 ‘꼬마신랑’이란 애칭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꼬마아씨>(1970), <꼬마사장과 여비서>(1971), <꼬마신랑(제3편)>(1971), <쌍동이 꼬마신랑>(1971), <꼬마암행어사>(1971) 등에 출연하면서 ‘꼬마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 시기 아역배우 김정훈은 출연료도 성인 톱스타급으로 받았다. 동갑내기 아역스타인 이승현과 함께 출연한 <고교얄개>(1976)가 크게 흥행하면서 하이틴 영화 붐이 일어났고 김정훈도 하이틴 스타로 각광을 받았다(인터뷰365).
김정훈은 국내에서의 인기를 뒤로 하고 화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82년 대만으로 유학을 떠났고, 대만에서 역사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89년 귀국했다. <고고얄개>로 호흡을 맞추었던 석래명 감독의 <홀로서는 그날에>(1990)에 출연하며 성인연기자로 신고식을 치렀다. 이후 광고대행사인 ‘디딤’과 이벤트 회사인 ‘훈 이벤트’를 설립해 운영했다. 중국어와 영어에도 능숙하다(동아일보, 경향신문).
* 참고문헌
“한국의 매컬리 컬킨 ‘꼬마신랑’ 김정훈”, 인터뷰365, 2008/10/08.
(http://www.interview365.com/news/1647)
동아일보 1989년 12월 9일자 17면.
경향신문 1990년 5월 17일자 17면.
* 주소,수상내역(영화)-영화백과 제1권 120쪽.
* 최종학력, 주요작품(기타)-네이버 인물검색
[작성: 김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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