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중후반 이만희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아니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멜로드라마 세 편을 발표한다. <만추>(1966), <귀로>(1967), <휴일>(1968). 하지만 1970년대의 이만희는 그 시절의 창조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들국화가 피었는데>는 이만희가 <청녀>(1974), <태양을 닮은 소녀>(1974) 등을 발표하던 무렵의 작품이다. 이 무렵의 이만희 영화는 뭔가 지쳐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들 영화에 짙게 깔린 허무의 정서는 1960년대 영화에서도 드러난 것이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 그의 영화는 훨씬 더 어둡고 무기력하다. 심지어 죽음 충동이 감지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영화진흥공사는 설립 기념작 중 하나인 <들국화는 피었는데>의 연출을 이만희에게 맡긴다. 그것은 이만희가 이미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등의 전쟁영화를 통해 자신이 전쟁의 스펙터클을 얼마나 잘 다룰 수 있는 감독인지, 그리고 그 와중에도 인물 하나하나를 얼마나 개성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지 입증한 감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진흥공사는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어 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임권택의 <증언>(1972)의 성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1억에 가까운 제작비를 투자하고, 국방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제작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이만희는 (그 시절의) 임권택이 아니었다. 1970년 3차 개정 영화법과 1973년 4차 영화법을 연이어 발표하며, 검열을 통해 반공과 근대화를 찬양하는 국책영화만을 양산하려 했던 유신정권의 영화정책 앞에 이만희는 고개를 숙일 생각이 없었다. 영화를 정치적 수단으로 여기는 국책영화와 오로지 영화만이 영화의 목적이어야 했던 이만희의 만남에서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고, 결국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이만희와 영화진흥공사 간의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비균질적인 영화로 완성되고 말았다(그는 이 영화의 편집권을 빼앗기기까지 한다).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한국전쟁의 발발에서 서울수복까지의 기간을 담고 있다. 이만희가 영화에서 방점을 찍는 것은 북한의 공격에 속수무책 당하며 일방적으로 남으로 쫓겨 내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서울 수복의 기쁨을 잠시 보여주지만, 영화 말미에 배치된 이 장면들은 영화 전체의 분위기에서 이질적인 불순물처럼 억지로 붙어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들국화는 피었는데>가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몰고 온 무력감과 절망감, 그리고 그 끝에 짙게 깔려 있는 허무함의 정서를 담은 영화라는 의미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전쟁영화의 외피를 걸친 허무의 고백이다. 정대위(이대엽)가 진격해오는 북한 탱크를 향해 폭탄을 안고 뛰어드는 무모함은 군인의 사명감이나 용기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도무지 돌파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는 현실의 절망감에서 비롯된 자포자기의 행위에 가깝다. 이는 유사한 행위를 반복하는 송소위(고강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자신을 짓누르는 절망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 이 허무함은 전쟁이라는 영화의 소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또한 한편으로는 영화주의자였던 이만희가 온전히 자신의 영화를 찍을 수 없는 시대에서 느끼는 절망감의 토로이기도 할 것이다.
이로 인해, <들국화는 피었는데>에는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는 이질적 힘의 충돌이 남긴 흔적이 남아있다. 이는 영화 속에 영화진흥공사의 흔적과 이만희의 흔적이 공존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들국화는 피었는데>가 분열되고 찢겨진 이유다. 북한이 탱크를 몰고 진격해오는 장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당시 국방부의 지원 속에 완성된 국책영화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면서도, 북한군에 의해 말살된 마을 주민들의 참담한 죽음을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그려내는 등의 이만희다운 영화적 표현이 공존한다. 또한 영화 엔딩의 희망찬 진격의 이미지에서 드러나듯 반공영화의 전형성이 존재하면서도, 이데올로기를 냉소하며 전쟁 자체를 허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허무주의자로서의 이만희도 공존한다. 중심인물이 현대위(신성일)에서 돌이(김정훈)로 갑자기 전환되는 등 반복적으로 툭툭 끊기는 서사적 진행과 반공과 반전(이데올로기적 허무감)의 이질적 가치가 서로 충돌하는 등의 영화적 결함은 시대와 불화하는 자와 그 시대를 강요하는 자의 공존이 불러일으키는 불협화음의 증거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를 한국영화의 암흑기라 부른다. 그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이 시대의 영화를 주목해야 한다면, 암흑의 절망 속에서도 자신의 영화를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이들의 몸부림의 흔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현목은 투항했지만, 이만희와 하길종의 영화는 있는 힘을 향해 무언가를 지킨다. <들국화는 피었는데>의 비균질성이야말로 이만희의 몸부림친 증거다. 그렇기에, 참 처연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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