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4월 『문예(文藝)』 제9호에 발표된 황순원의 「독짓는 늙은이」는 「소나기」와 더불어 교과서에 실려 있는 작품이자,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소설이다. 우리는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이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독짓는 늙은이」를 영화화할 때에 몇 가지 어려움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송영감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십여 쪽에 불과한 소설의 길이에 따른 내용의 부재를 어떤 방식으로 채워나갈 것이며 아내가 떠난 후로부터 시작되어 송영감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상황 묘사에 담긴 송영감의 심정을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에 대한 부담감 등이다. 하지만 <
독짓는 늙은이>(
최하원, 1969)는 소설의 중요한 이야기를 중간에 배치하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창작해서 액자구성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감독이 새롭게 해석한 부분과 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감독의 관점을 강조한다.
<독짓는 늙은이>는 양자로 보내졌던 당손(
김희라)이 성인이 되어 집을 찾아온 장면부터 시작한다. 폐허가 된 집안을 둘러보다 가마를 발견한 당손은 그 안에서 생활하는 거지 떼 틈에 있는 송영감(
황해)의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노인(
허장강)의 이야기엔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송영감과 옥수(
윤정희)의 우연한 만남과 결혼, 당손을 낳고 살아가는 단란한 모습과 석현이 옥수를 찾아온 상황을 보태어놓는다. 다시 노인과 당손의 모습으로 돌아오면 가마 구석에 거지 행색의 엄마 옥수와 당손이 만나는 장면이 이어진다.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당손의 애끓는 그리움과 어머니의 죄의식으로 얼룩진 삶을 한 장소로 불러 모음으로써 어떻게 모자간에 묻어둔 감정이 해소되는지 낱낱이 보여준다. 최하원은 흥미롭게도 원작에는 거의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인 옥수의 기구한 삶(이름도 생겼다)과 죄의식을 관객들에게 상세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망가져버린 자신의 삶을 구제할 유일한 길을 아들 당손에게서 찾도록 한다. 아들의 사모곡과 어머니의 모성애는 뒤늦게라도 해후한다.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스틸
한겨울 길을 걷다 발견한 옥수를 데려와 동상에 걸린 몸을 녹여주고 보살펴주는 장면은 옥수의 젊고 아름다운 육체와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독을 동일한 대상처럼 정성껏 대하는 송영감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원작에 없는 이러한 접근은 송영감의 욕망이 발현되는 장면을 묘사하는 방식과 옥수와 석현의 욕망이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장면을 불과 물의 이미지로 대비시킨다. 카메라는 예순이 다 되도록 혼자 살아왔던 송영감이 옥수의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장면을 오래도록 보여준다. 눈덩이가 녹기 시작하자 옥수의 육체는 물기로 뒤덮이고, 송영감은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녀의 아름다운 육신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카메라는 옥수의 다리, 상체와 송영감의 얼굴을 번갈이 보여줌으로써 흙을 주무르듯 옥수의 등을 매만지고 곡선을 빚어내듯 옥수의 종아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강조한다. 그리고 노인의 뜸막에서 타오르는 장작불이 인서트로 삽입된다. 견고하고도 아름다운 독을 만들던 송영감의 손길이 아름다운 육신을 향한 염원으로 전이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섬세하고 끈질기다.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스틸
게다가 눈이 녹아 만들어내는 물은 다음 숏의 냇가로 이어진다. 옥수의 고무신 냄새를 맡다가 민망한 내색을 하고, 옥수의 속바지를 펼쳐 보이고 냄새를 맡는 장면은 옥수의 육체에 온기를 불어넣던 그의 손짓보다 강렬한 욕망의 표시이다. 설원 곁을 흘러가는 냇물이나 옥수의 어깨에서 스르륵 녹아내리는 눈은 초록이 우거진 봄날의 냇가로 이어진다. 특히 옥수의 욕망이 냇가에서 발현되는 장면은 소설과 다른 <독짓는 늙은이>만의 고유한 표지가 된다. 옥수가 어린 당손(
김정훈)이 냇가로 흘려보낸 꽃을 들고 냄새를 맡는 장면은 눈여겨볼만하다. 옥수의 고무신/겨울/눈/송영감과 꽃/봄날/초록의 숲/옥수의 대비는 송영감의 욕망과 옥수가 욕망하는 대상을 대비시킴과 동시에 황혼녘의 송영감과 한창 젊은 나이인 옥수를 연상시킨다. 결정적인 장면은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거세게 내리는 날, 송영감이 자신을 가마로 밀어 넣는 악몽을 꾼 옥수의 눈에 비친 송영감의 시뻘건 얼굴이다. 물가에서 자신의 솔직한 욕망을 확인했던 옥수에게 불가에서 어른거리는 붉은 빛으로 물든 송영감의 얼굴은 욕망을 가로막는 불안이자 평생 불과 더불어 살아온 송영감의 삶 자체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날 집을 뛰쳐나간다.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스틸
노인에게 불은 독을 완성시키는 존재이자 사경을 헤매던 옥수를 살려낸 존재이며 노인의 쇠락과 죽음을 지켜보는 유일한 존재이고 그의 육신을 삼켜버린 존재이다. 최하원은 옥수 곁에 나무들과 산, 거세게 흐르는 물길을 배치하고 송영감의 곁에는 늘 장작불이나 가마의 불길을 배치시킨다. 아홉 살 때 흙을 만진 이후로 가마 곁을 떠난 적이 없는 송영감의 삶은 척박한 땅의 기운과 부드럽게 짓이긴 흙으로 대표되기에 그가 가마 앞에 단정히 앉아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몸을 던진 장면은 애처롭지만 한편으론 송영감이 마지막으로 매달렸던 삶의 한 자락을 떠올리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