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연재]개인의 시대와 매체의 윤리: 소셜포비아 정희진의 혼자서 본 영화①

by.정희진(여성학연구자) 2018-08-09조회 19,368

8월부터 12월까지 10회에 거쳐,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씨의 영화 리뷰를 정기적으로 연재합니다.
영화비평과 서평 분야에서도 활발한 글쓰기를 해 온 필자는 기존의 젠더(gender) 개념을 확장, 메타 젠더적  시각에서 새로운 영화 읽기를 시도하고자 합니다.
장르와 주제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영화를 대상으로 우리 시대 주요 이슈에 대한  필자의 '다른 목소리'를 기대합니다.

 
<소셜네트워크> 너머, <소셜포비아

<소셜포비아>는 인터넷 세계를 다룬다. 이 시대에, 인터넷을 ‘진짜’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virtual reality) 혹은 ‘가짜’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가상현실, 즉 ‘그럴듯한, 사실상의, 현실과 다름없는, 실질적으로, 잠재적인 현실’의 의미를 최대한 확장시키고 있다. 이제 가상현실은 ‘假像, 假想, 假相’이라고 해도 모두 말이 된다. 특히, 이 영화처럼 온라인에서 싸웠던 사람들이 실제 오프라인의 상대방을 찾아갔다가 벌어지는 이야기는 더욱 그렇다(물론, 온라인 베틀과 달리, 여성 한 명 vs 무리의 젊은 남성들의 만남은 온/오프의 평등성을 무너뜨리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이 영화에 대한 몇 가지 ‘선입견’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현피', '키워', '안구 정화' 등의, 모르는 단어/험악한 표현/줄임말에 익숙하지 않은 기성세대(?)나 인터넷 유저가 아닌 사람에게는 ‘어려운’ 작품이라는 것이다. 영화의 각본을 쓴 홍석재 감독도 인터넷을 따로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체 사용 여부가 곧 매체의 특성을 인식할 수 있는 전제는 아니다. 문제는 찬반 논쟁, 유저인가 아닌가, 인터넷에 우호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도구(매체)는 인간의 조건을 바꾼다.”는 사실, 그리고 그 효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공유하는 실천이다. 

인터넷 환경은 기술적, 담론적으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소셜포비아> 제작 당시였던 2014년의 용어는 벌써 공용어가 되었고(‘현피’는 국어사전에 등재되었다), '흉자', '태일해', '세월호 어묵'까지 매일 새로운/끔찍한/기발한 용어와 이벤트가 쏟아지고 있다. 대부분은 접근하기 두려운 고통스러운 언어들이다. 이 영화가 불편한 관객층은 인터넷 용어를 따라잡을 수 없는 기성세대가 아니라 인터넷 헤비 유저(heavy users)들일 것이다. 아이디(ID)를 몇 개씩 가지고 있으며, 거의 하루 종일 키워드 노동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모르거나 볼 가능성이 작다. 이 영화가 불편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이들은, 서구를 추격해야 한다는 식민성에 기반한 발전주의자(progressives)이되 어느 정도의 공공성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는 진보 진영(progressives)일지도 모른다(물론, 미션 임파서블이다).

이 영화는 제작하는 인간(호모 파베르),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인간의 특성, 인류의 제작성(자기 몸의 확장성)을 직면하는 작품이다. 때문에 ‘환경 영화’이기도 하다. 체르노빌부터 후쿠시마가 남의 일이 아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2018년 7월 말, 대한민국 서울의 기온은 40도에 육박하고 있다. 무엇인가가 도래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같다. 

<소셜포비아>는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이 외면하거나 무지한 분야인 매체의 정치경제학과 문화 권력에 관한 뛰어난 작품이다. 아마 바우만이나 프랑코 베라르디, 레오니다스 돈스키스 같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그들이 묘사한 한국 사회를 다시 썼으리라. 그들은 “이 시대의 금융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악마는 이케아와 페이스북”이라고 했는데, 한국 사회 버전은 '다이소, 몰카, SNS' 쯤 되지 않을까. 

영화적 완성도도 뛰어나다. 스토리텔링의 짜임새, 화면의 윤리성, 연기, 연출 모두 좋다. 2억 원의 제작비와 102분의 상영 시간으로 신자유주의, 매체 경제학, 변화하는 윤리와 자아, 개인의 개념, 젠더, 대중까지 근대성의 거의 모든 키워드를 연결(arrangement)한다. 그 연결도 매우 흥미롭다. 

현피는 ‘현실’의 앞글자인 ‘현’과 ‘Player Kill’의 앞글자인 ‘P’의 합성어로, 웹(web)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 오프라인에서 실제 살인이나 싸움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말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어떤 10대 학부모가 내게 한 말인데, 그들은 현피가 정기적으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피 덕분에 학교도 안 가고 친구도 없고 방안에만 처박혀 나오지 않던 아들이, 드디어 집 밖으로 나가 온라인 동료들과 함께 ‘세상으로’ 나갔다는 것이다(이 부모는 “아이가 강원도까지 갔다”며 흥분했다). 

‘키워’는 키보드 워리어(Keyboard warrior)의 줄임말로 컴퓨터 자판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戰士)를 말한다. 이들은 강력한 여론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듣는 사람(오프라인)의 무시’라는 더 큰 ‘권력’ 앞에서는 무기력한 존재다. 그들의 노동은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야기', '찌라시' 뿐일 수도 있다. 온라인의 물리력이 오프라인에서의 권력으로 계량할 수 있는 인식론이나 방법론은 ‘영원히’ 불가능하므로 온라인의 영향력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소셜포비아
소셜포비아
1인 매체와 인간의 조건

일본의 젊은 연구자 다카하라 모토아키는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삼인, 2007)를 썼다. 원제 그대로 『不安型ナショナリズムの時代―日韓中のネット世代が憎みあう本當の理由』, 이 책의 주제는 젊은이들이 자신에게 닥친 실업 문제를 인터넷을 통해 어떻게 자체 해결(도피)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저자는 이를 ‘불안형 내셔널리즘 시대’라고 명명한다. 인터넷 한․중․일전(戰). 내 기억이 맞는다면, 세 나라 남성들이 ‘3국 여성 미모 콘테스트’를 열어 인터넷 투표도 진행했다(당시 한국 남성들은 배우 김희선 씨를 국가대표 미인으로 선정했다).

다카하라 모토아키는 한․중․일 청년들이 각국의 본격적인 글로벌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저항 대신, 자신들을 해고 시킨 바로 그 기술(인터넷)을 사랑한다고 지적한다. 이 도구로 내셔널리즘만 한 것은 없을 것이고, 효과는 막강했다. 결국 자기 사회의 경제적 현실을 은폐하는 장치로 작동했다. 키보드 노동에는 시간과 열정이 필요하다. 그럴 만한 시간이 있는 사람들의 문화다. 게임 중독이나 혐오 발화는 “인간성 타락” 아니라 실업 문제다.

많은 이들이 SNS의 장점이자 단점을 속도와 순간적 영향력이라고 말한다.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극복하자? 하지만 매체, 미디어는 그 자체가 매시지 즉 정치다. 소위 ‘바람직한 방향’ 혹은 자신과 입장이 비슷할 경우에는 장점을 극대화하고(촛불 시위나 페미니즘의 확산...), 반사회적 현상(몰카, 혐오..)에 대해서는 법적 제재나 ‘새로운 휴머니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러한 대책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누구도 타인의 도구 사용을 원천적으로 금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더구나 완전히 대중화, 개인 소지품이 된 컴퓨터를?)

또한, 그 어떤 도구도 장단점이 있다. 발명전부터 나쁜 동기를 가진 매체는 없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모두 좋은 뜻이었거나 그런 의도였다고 강변한다(황우석 씨 사태가 좋은 예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노벨은 사람들의 고된 노동에 대한 안타까움이 동기였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문제의 핵심은, 핵이든 콘돔이든 다이너마이트든 SNS이든 이 모든 ‘오브제’들이 인간의 삶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나는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발명품을 꼽으라면 인쇄술, 콘돔, 인터넷이라고 생각한다. 콘돔은 인구 조절과 인류의 반 이상인 여성을 평생 동안의 임신과 육아에서 해방시켰으며, 인쇄술과 인터넷은 인간의 언어와 그에 따른 총체적인 구조 변동(국가의 출현 등)을 가능케 했다. SNS는 혁신적인 매체다. 그만큼 중요하다. 은행 건물도 없는 아프리카의 내전 국가에서 스마트 폰을 가진 몇몇 부자들은 인터넷으로 국제 금융 시장에서 주식 투자를 하고 돈을 번다. 포스트스페이스, 포스트휴먼의 시대다.
 
소셜포비아
 
SNS의 평등주의?

몇 년 전 나는 SNS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어느 ‘명망 있는 남성 지식인’이 내 글에 대해 (분노에 가까운) 혹평을 했고, 그의 페이스북에 많은 사람이 '좋아요'를 누른 사건이 있었다. 지인이,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의 명단을 내게 보내주었는데, 내 친구까지 있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요지는 “당신(나)은 신문 지면을 갖고 있으므로 매체가 있는 기득권자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SNS가 지면이므로 이를 비판하는 것은 이기적”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SNS는 평등과 민주주의를 상징한다. 

사람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바로 1인 매체의 등장이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주업이 SNS에 글을 쓰는 사람의 ‘인생고(capacity)’와 어느 정도 ‘평가받은’ 단행본을 10권 정도를 낸 사람의 삶은 같지 않다. 그러나 SNS 문화는 후자를 기득권자이자 '골고루 평등'을 위해, 더 이상 글을 쓰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간주한다. SNS가 필요한 사람들은 또 있다. SNS에서 자기선전 후 오프라인에서 픽업되어야 하기 ‘때문에’ SNS가 필수적인 사람들이다. 이미 신문 등 기존 매체들은 소위 오피리언 리더들의 페이스북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페이스북을 기사화한다. 취재가 필요 없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페이스북에 쓴 글을 책으로 묶어내는 일도 심심찮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이러한 현상의 바람직 여부가 아니라 자아실현, 자기 PR 도구로서 SNS의 절대적 유용성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몇 년 이상의 노력과 노동, 비용을 기울인 저작에 대해 '최악', '저질', '친일' 등의 댓글 테러로 그 텍스트들이 평가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그런 힘이 있다면, 디스토피아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형태의 ‘자아실현’이 만연한 사회라면 공동체는 무너질 것이다. 이전 시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종이 신문이 인터넷으로, TV보다 유튜브가 대세인 시대에 개인(the person)의 노력과 능력 차이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사회 정의로서 평등이 아니라 추상적 개인(individuals)인 인간은 모두 같다는 ‘하나의 덩어리로서 평등(sameness)’, 즉 전체주의다. 평등은 지구상 70억 명 인구가 모두가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등은 구조적 불평등에 저항하는 것이지 개인들의 개별적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평등. 이것이 역설적으로 온라인 공간에서 혐오가 허용되는 이유다. 성별, 인종, 나이에 따른 차별이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차별을 인식하고 사회를 바꾸는 대신 차이가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혐’이나 ‘여혐’이나 다 똑같고, 억울하면 너도 혐오 발화를 하라는 식이다. 성 소수자를 혐오하는 페미니즘이나 이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이나 모두 같은 페미니즘이라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페미니즘‘들’이 한국 사회에 등장했다. 

온라인에서 ‘차이’ 혹은 위계를 결정하는 요소는 단, 한 가지다. 강한 멘탈. 사회성과 타인, 인간관계를 무시하는 정신 승리, 어떤 공격에도 굴하지 않는 강심장, 거침없는 뻔뻔함, 누가 더 ‘기’가 세고 거짓말을 잘하는가이다. 혐오 발화의 능력도 바로 이 무신경함에 달려 있다. 타인의 고통이나 감정에 민감한 사람은 ‘루저’가 된다. ‘홍어’나 ‘오뎅’ 같은 슬프리만치 끔찍한 비인간적 발화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찬양하는 극한의 비윤리성에서만 가능하다. <소셜포비아>의 채팅 장면과 배우 류준열의 명연이 돋보이는 카메라의 시선은 이에 대한 감독의 비판 정신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소셜포비아 스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의 시대

SNS가 ‘논쟁’, ‘민주주의’의 장이라고 거짓말하거나 믿거나 착각하는 사람은 마크 주커버그 말고도 많을 것이다. 내 경험(주로, '미투'와 성폭력, 젠더 관련 사안)에서 보면, SNS에서의 대화는 만나서 이야기하면 해결될 문제를 관중을 모셔놓고 마치 검투사처럼 논쟁(?)을 벌임으로써 공연을 하는 듯하다. 대화를 통해 ‘진실’을 밝히기보다 여론전에 주력하는 것이다. 이때 승패는 키보드 속도와 상대방에게 효과적으로 모욕을 줄 수 있는 능력, 꼬투리 잡기, 열 받게 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SNS의 특징은 속도가 아니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1인 미디어라는 데 있다. 이를테면, 한 사람의 ‘인터넷 셀럽’이 때론 국영 방송사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트위터의 경우 어느 유명 지식인의 팔로워가 100만 명에 육박했는데, ‘6대 종합일간지’의 중 모 신문사의 팔로워는 60만 명선이었다. 노조원 만 명이 넘지만 (두 개의 노조가 있어서) 민주노조의 트위터 팔로워는 400명인데, 매스컴 플레이에 익숙한 ‘노조 활동도 하지 않는 스타 노동자’의 팔로워 수는 5만 명이었다. 문제는 이 노동자가 노조의 합의된 공식적 입장을 자신의 SNS 파워를 이용, 사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거짓 선전을 반복했다는 점이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개인의 힘이 극대화된 시대가 존재했던가. 어느 누가 이 무한한 자기 만능 감을 선사하는 이 매체를 포기하겠는가. 스마트폰은 이미 우리 몸이다. 맥루한의 명언, 미디어는 우리 몸의 확장이다(extention of men). 게다가 별다른 규제도 없다. 근거 없는 비난, 혐오 표현, 신상털기 모두 완벽하게 가능하다.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무시해라, 집착 마라”, “탐라(타임 라인)일 뿐이다”, “SNS에 들어가지 말라” 등의 ‘위로’ 혹은 피해자 비난을 들을 뿐이다. SNS의 ‘부작용에 대한 무시’는 해결이 아니다. 홍석재 감독은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이들을 괴물로만 보지 말아 달라”고 말했지만, 이들은 이미 ‘괴물’이다. 우리는 온라인에서 끔찍했던 이가 오프라인에서 지극히 평범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인 사건들을 알고 있다. 문제는 나를 포함, 인간은 모두 그럴 가능성이 있다. 사실 나는 온라인의 피해자도 피해자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용자(가해자)’가 SNS를 통해 자신을 구성하고 사회를 만들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소셜포비아>는 근대 초기 신분 사회로부터 해방된 자유주의적 개인이 이후 100년이 지나자마자, 신자유주의적 각자도생의 개인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기 통치자로서 개인의 힘은 막강해졌지만, 사회적 자아는 모두 자본에 종속되었다. 각자도생 시대의 개인의 자유는 통치 원리인 ‘힘센(비윤리적인) 개인’의 등장이며, 결국 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파괴한다. 
 
소셜포비아
 
<소셜포비아>의 착목 지점, 글쓰기

1인 매체의 시대. 매체만으로는 완전히 평등하고, 나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고, 어떠한 노력도 필요 없는 시대. 누구나 판관, 감별사, 평론가가 될 수 있는 시대. 그런데, 이들이 오프라인으로 나올 때 혹은 두 세계를 병행할 때, <소셜포비아>의 여자 주인공 캐릭터가 등장한다. 감독의 영리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영화 대사 그대로,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에고는 강한데, 그에 걸맞은 알맹이는 없는 사람. 타인을 비난하는 데 익숙하지만, 자신은 절대 견딜 수 없는 욕먹음(커멘트)”. 그녀는 대학에서 글쓰기 수업 강의를 듣는 학생, 작가 지망생이다.

글쓰기의 정의는 이견이 없다. 글은 ‘자기’ ‘생각’을 ‘표현(재현)’하는 ‘노동’이다. 자신을 아는 일은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법이고, 생각하기는 가장 외로운 작업이다. 글쓰기는 중노동이다. 글쓰기는 두렵고, 어렵고,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SNS에서의 글쓰기는 자본의 입장에서 너무도 손쉽고 이익이 막대한 돈줄이자 중우(衆愚) 정치다. 키보드 사용자의 노동과 시간은 고스란히 ‘구글’이나 ‘삼성’이 가져가지만,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우리의 영혼을 바친다. 그 대가는?

SNS에서의 글쓰기는 매체의 특성상 기본적으로 자기 홍보, 자기주장, 자기도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기 조작을 넘어 자기 망상으로 진화하는 경우도 숱하다. 나중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어려우며,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어느 축구 감독의 말대로 “SNS는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SNS 헤비 유저라면 ‘지식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SNS에서는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요구받지도 않는다. SNS에서의 자아와 현실에서의 자아는 다르다. 일상적 공간에서도 다른데(예를 들어, 혼자 있을 때와 여러 사람이 같이 있을 때), 관음증과 노출증을 전제로 하는 공간에서 ‘진정한’ 자아 찾기는 불가능하다. <소셜포비아>의 여자 주인공이 타인의 커멘트를 극도로 기피하는 것은 조금도, 부분적으로도(타인에 비친) 자신을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의 욕망은 포기하지 못해서 온라인으로 도피한다. 만일, 그녀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한 곳에서만 글쓰기에만 매달렸다면,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하는 대사를 보자. “한국에 간첩이 몇 명인지 알아? 오만이야. 오만. 그렇게 많은데, 왜 안 잡히는 줄 알아? 자기들끼리 서로 상대가 간첩이라며, 간첩을 잡으러 다니거든.” 이것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개인들이 각자 누구인 줄 모르고 좌충우돌하면서, 그라운드 제로에서 서로를 외면한 채 똑같은 제복을 입고 뫼비우스 띠의 선상(線上)을 헤매는 장면에 대한 묘사다. 우리는 자신이 ‘간첩’인 줄 모르는 간첩들이다. 모두 개성을 주장하는 개성 있는 다름(distiction)을 주장하는 개인들이되, 개별적으로 자본에 포섭되어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 모두가 모두의 아바타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쇄물(책)을 소환할 때다. 아, 책도 온라인에서 파는군. 

지금으로서는 잠시 SNS을 중단하고 오프라인에서 글쓰기가 유일한 저항처럼 보인다. 너 자신을 알라. 생각을 하라. 죽도록 연습하고 표현하라. 그런 점에서 영화의 백미는 글쓰기 수업 파트다. 소셜 네크워크의 본질을 꿰뚫는 감독의 통찰력과 영화를 만드는 뛰어난 ‘작전 구사력’이 돋보인다.
 
소셜포비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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