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배우 이름 하나 때문에 사라진 영화를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김시현 감독의 1966년 작
<스파이 제5전선>이 딱 그런 영화인데, 이 영화에서 주연배우
황정순이 어떻게 나왔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제목만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북한 간첩이 나오는 첩보물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그 최종 보스 악역 그러니까 ‘북괴 중앙당 연락부장’을 연기한 배우가 바로 황정순인 것이다. 포스터를 보면 마담 헤어스타일에 안경을 쓰고 표독한 악역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 배우가 이 표정을 어디까지 밀고 갔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스파이 제5전선> 포스터
영화는 북한 간첩의 실패한 암살 시도로 시작한다. 표적이 된 사람이 누구이고 왜 죽이려고 했는지 따지는 것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간첩 행위는 100퍼센트 맥거핀으로, 간첩 행위라는 것이 중요할 뿐,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 맥거핀 간첩 행위를 하러 ‘북괴 중앙당 연락부장’ 최영순이 남한에 잠입을 하는데, 이미 우리 편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단지 이 우리 편이 ‘남한’인지는 잘 모르겠다. 각본에는 내내 이들을 CIA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CIA는 한국인 장교만으로 구성된 조직이고 대사엔 조직 이름 언급이 없으니 여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CIA 조직에서 꽤 중요한 위치에 있는 한대령이라는 사람이 20여 년 전에 헤어진 최영순의 아들이란 것이다. 시작부터 그는 어쩌다가 어머니가 이렇게 악마와 같은 존재가 되었는지 궁금해하는데, 미리부터 말한다면 답은 없다.
최영순은 공항에서 삐땅이란 고정간첩과 만난다. 이 인물이 사실은 ‘CIA’가 심어놓은 이중첩자라는 건 첫 페이지에서부터 눈치챌 수밖에 없는데, 이 영화의 커버에 적힌 부제가 ‘간첩 삐땅 시리즈 제1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 인물을 갖고 2화가 나올 수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 인물은 철저하게 일회용일 수밖에 없는 게, 그는 위에 언급한 한대령이란 인물의 동생, 그러니까 또 최영순의 아들인 것이다.
영화의 내용은 이중첩자를 찾아내려는 영순의 시도와 정체가 들통 나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려는 삐땅의 머리싸움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여기서 엄마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삐땅의 내면 갈등 같은 기대하지 말기 바란다. 영순 역시 영화 후반에 형제가 만나 어머니를 부르기 직전까지는 전형적인 반공물 간첩이다. 깊이 따위는 전혀 없는 사람이며 오로지 악당의 표면만이 존재한다. 딱 도금봉 스타일의 캐릭터인데 이 역할을 황정순이 하고 있으니 이를 연기하면서 얼마나 재미있어했을까?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60년대에 남한에서 영화를 만들었던 남자들이 나쁜 어머니와 좋은 어머니를 어떻게 그렸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타임캡슐이다. 물론 이들에게 ‘어머니’란 좋은 여자와 나쁜 여자를 구분하는 단서이다. 북한이라는 손쉬운 허수아비를 내세워 ‘나쁜 엄마’라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아들의 절규 한 번으로 무너져 버리는 괴물을 직설적으로 그리는 이 영화의 스토리는 이들을 이해하기 위한 안내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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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사라져 버린 시나리오 읽기 연재가 끝난다. 소개한 영화들 중에는 사라져서 아쉬운 수작처럼 보이는 영화도 있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번 구경해보고 싶은 괴작도 있다. 하지만 이 중 대부분은 그냥 사라져도 아쉬울 것 없는 작품들이다.
이런 작품들을 굳이 소개한 이유는, 지나가 버린 시대를 읽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창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걸작들이 아니라 잊히고 소실된 작품들일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걸작들은 시대를 무시하고 지금까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특이한 괴물이기 때문에 살아남는다. 하지만 한 시대를 살아남는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정신세계는 그보다 훨씬 허약하고 초라하며 어리석다. 지난 반세기 동안 유럽 국가라면 2백 년은 걸렸을 변화를 겪은 우리나라라면 그 차이가 더 노골적이다.
우리는 이들을 당시 상황을 통해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계급 차별적, 성차별적, 폭력적인 사고방식이나 행동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당시 펜대를 쥐고 있던 사람들을 굳이 이해하는 대신 (그들은 이미 불필요할 정도로 꼼꼼하게 이해받고 있다) 그들이 별 생각 없이 행했던 언어와 사고의 폭력의 희생자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게 더 유익하다고 본다.
물론 우리가 후손들에게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로 보일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유익할 것이다. 이들은 이미 대부분 잊혀 영상자료원 구석의 아무도 읽지 않는 책 묶음으로 남았지만 우리들의 바보짓은 이미 인터넷에서 박제되어 보존되고 있고, 아마 우리가 죽을 때까지 어딘가에 남아 키워드 하나로 불려 나올 것이다. 후손들이 관대할 거라고는 꿈도 꾸지 마시라. 조상들의 바보짓처럼 비웃기 쉬운 건 없다. 오싹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