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현
Kim Si-hyun / 金詩顯 / 1935  ~ 
대표분야
감독, 제작/기획
데뷔작품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1964
활동년대
1960, 1970, 198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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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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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대남 (김시현, 1988)
사랑의 미로 (김시현, 1986)
밤을 벗기는 독장미 (김시현, 1985)
홍병매 (김시현, 1984)
스타페리 불청객 (김시현, 1984)
뇌권 (김시현, 1983)
소림사 용팔이 (김시현, 1982)
인자문살수 (김시현, 1982)
흑표비객 (김시현, 1981)
용문파계제자 (김시현, 1981)

주요경력

1955년 영화계 입문
한맥 영화사의 춘사 영화 예술제 부회장으로 활동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50년대와 60년대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문학을 가까이 하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많은 문학 작품을 읽고 시 등을 창작하기도 했다. 우연히 <영원의 모상>이라는 영화 촬영을 대구에서 촬영할 때 감독과 접촉하여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1955년 영화계에 입문하여 조감독 생활을 하다가 1964년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애착작품 및 사유
애착이 가는 작품은 1985년 작 <밤을 벗기는 독장미>이다. 대부분의 작품이 정의와 의리에 관한 무협이나 액션 영화였지만 이 영화는 스릴러물로 여자의 한과 집념의 무서움을 그린 작품이었다.
영화속 명소
기억에 남는 영화속의 명소는 제주도 어느 큰 절벽이다. 어느 영화였는지, 그 절벽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곳에서 액션 영화 촬영 중 고급 자동차를 절벽에서 떨어뜨렸는데 워낙 절벽이 길고 장엄해 크레인으로 3분의 1도 끌어 올리지 못할 정도였다. 다른 명소로는 강원도 울진의 불령 계곡의 절벽과 계곡은 무협과 액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지만 특히 불령 계곡이 공해가 없고 맑은 곳이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65년 데뷔 이후 20여년간 대부분 작품은 정의감과 꿈의 실현을 테마로 하는 액션 협객 영화였다. 70년, 80년대 극장을 가득 메운 영화의 유행과는 별개로 일관성 있는 작품만을 추구하였다. 외길과 한 장르만의 영화를 고집하는데는 그 이유가 있다. 정창화 감독 밑에서의 조감독 시절 홍콩에서는 우리로부터 태권도 영화를 배워 액션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제작자들의 사명감이 투철하지 못해 우리 태권도 영화가 역수입되고 이에 분노를 느껴 국기를 영화로 만들어 세계를 정복하자는 신념 하에 무협 영화를 제작, 수출하게 되었다. 당시에 우리 액션영화로 3만 3천불을 비롯 수십편의 영화를 홍콩 수츨을 기록하여 어려운 경제 시기에 외화 획득에 기여했다. 액션 협객 영화에서 미학은 강한 가운데 부드러움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액션이나 무술의 남성적인 강렬한 이미지와 강한 정신력에서 가장 인상적인 모습을 그리는데 중점을 두었다.
수상내역(영화)
1966년 신인 감독상 <긴 여로>/
영화 연예 인기상/
한국 쿵후 협회 공로패/
영화 70주년 기념 공로 영화인상/
춘사나운규영화예술제 공로상/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김시현은 대구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에 입학했으나 2년까지만 다니고 중퇴했다(한국영화감독사전). <영원의 모상>이라는 영화가 대구에서 촬영될 때 그 영화의 감독과 만나 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1955년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이후 10여 간 조감독 생활을 하다가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65)로 감독 데뷔하였다(한국영상자료원, KMDb).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65), <긴 여로>(1966)가 평단의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김시현은 충무로의 기대주로 부상했다(경향신문).
초기에는 현대적인 소재의 첩보액션영화를 주로 만들었고, 후기에는 권격액션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홍콩에 진출한 정창화 감독의 조감독을 했었던 그였기에 액션영화에 재능이 있었다. 그는 홍콩액션영화가 국내 영화시장을 장악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태권도와 쿵푸를 바탕으로 한 액션영화를 만들어 1970년대 액션영화 제작 붐을 이끌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쿵후협회의 공로패를 수상하기도 했다. 57번째 영화인 <대남>(1988)을 끝으로 은퇴하였고 이후에는 춘사영화예술제 부회장으로 활동했다(한국영화감독사전).

* 참고문헌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설문조사, 2001.
KMDb
(http://www.kmdb.or.kr/actor/mm_basic.asp?person_id=00001506&keyword=김시현)
경향신문 1966년 2월 23일자 5면.
* 수상내역, 주요경력-네이버 인물검색

[작성: 김성희]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35년 12월27일 출생. 대구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에 입학했으나 2학년까지만 다니고 중퇴했다. 감독은 1965년 <성난 얼굴로 돌아 보라>라는 영화로 데뷔를 했다. 이후 <긴 여로>(1966년) <뜨거운 안녕>(1967년) <유랑의 검호>(1968년) <필살의 검>(1969년) <내일 있는 우정>(1970년) <무정의 네온가>(1971년) <제3의 추적>(1972년) <황사진>(1973년) <흑표>(1974년) <강인의 무덤>(1975년) <석별>(1975년) <대탈출>(1976년) <설중매>(1976년) <흑도>(1977년) <최후의 정무문>(1977년) <오대제자>(1978년) <정무지보>(1978년) <무림오걸>(1979년) <응권>(1980년) <삼원녀>(1981년) <인자문살수>(1982년) <뇌권>(1983년) <홍병매>(1984년) <밤을 벗기는 독장미>(1985년) <사랑의 미로>(1986년) <대야망>(1987년) <대남>(1988년) 등을 연출했다. 감독이 데뷔 이후 20여 년 동안 줄기차게 손을 댄 장르는 액션 협객영화였다. 사실 이 장르는 감독이 활동했던 7-80년대의 흥행을 이끈 주류 장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특정 장르만을 고집한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홍콩까지 영입되어 한국식 액션영화의 수준을 알렸던 정창화 감독 밑에서 조연출을 했었던 김시현 감독은 우리한테 한 수 배운 홍콩이 오히려 무협액션에 강세를 보이는 것에 불만을 느꼈다. 게다가 홍콩액션물들이 봇물처럼 역수입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의 태권도 및 쿵후를 바탕으로 한 무협 액션영화에 치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공로가 인정되어 ‘한국쿵후협회’에서 주는 공로패를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이밖에 <긴 여로>라는 영화로 신인감독상(1966년)을 받았고, 한국영화 70주년 기념 공로영화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감독의 대표적 작품은 1985년에 만든 <밤을 벗기는 독장미>라는 영화다. 이 영화는 액션영화가 아닌 스릴러물인데, 여자의 한과 집념의 무서움을 그린 작품이었다. 감독은 1955년 영화계에 입문한 이후 10여간의 조연출 생활을 거쳐 감독으로 데뷔하여 숱한 액션영화들을 만들어왔다. 현재는 현역에서 은퇴하여 춘사 나운규 감독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한맥 영화사의 ‘춘사영화예술제’의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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