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멘탈 시네마의 길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배용균 감독, 1989년

by.정한석(영화평론가) 2008-11-13조회 2,311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은 비교적 덜 고전이다. 이점이 신경 쓰이지 않은 건 아니다. 가까운 시대의 작품으로 아직 친화성을 갖고 관객의 뇌리에 남아 있다면 구태여 다시 힘주어 여기서 거론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차례 생각해봐도 결국 그렇지 않다는 확신이 커서 이 작품에 관해 말하게 됐다. 한국영화사상 가장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데뷔작 중 하나로 기록될 <달마..>은 2006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선정한 한국영화 100편의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걸작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불운한 일이다.

배용균은 <달마..>과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1995) 두 편을 만든 뒤 홀연히 영화계를 떠났고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글쎄요 미국에서 명상 수련을 하고 계시다는 얘기까지는 들었는데..지금은 저도..제가 근황을 모르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지요”. 언젠가 배용균 감독에 관해 물었을 때 그의 절친한 제자이자 지난 시절 조감독이었던 김동현 감독이 들려준 소식이다. 오랜 작업 기간을 요하는 완벽주의(<달마..>을 완성하는 데는 4년이 걸렸다). 제작, 감독, 촬영, 각본, 미술, 편집 등을 혼자 다 하는 괴력의 1인 제작 방식. 그리고 귀족적 풍모와 은둔적 기질. 배용균에 관한 이런 전설적인 일화가 여전히 뜨거운 기억 속에서 종종 회자되고 있지만 그의 영화적 지평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은 어딘지 화석화된 것 같다. 

영화에 대한 오해와 진실

 나 역시 이 영화를 너무 오랫동안 다시 보지 않고 있었으며, 이번에 보니 그동안 내가 몇 가지 잘못된 인상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그게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 같다. <달마..>은 사실 소름끼칠 만큼 정교한 영화는 아니다. 배용균의 완벽주의에 대한 풍문이 영화에 관한 그런 인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보다 이 영화는 거칠다. 그런데 거친 것이 흠이기 보다 어떤 강인한 정신성의 반영처럼 보이는 이유는 웰 메이드 강박증에 빠지지 않고 자기가 선택한 테마를 감싸 안으려는 필사적인 태도로 영화를 찍어 냈기 때문이다. 한편 배용균의 영화는 곧 롱테이크의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의 기억력이 얼마나 잘못된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지를 알고 당신은 또 당황하게 될 것이다. <달마..>은 곧 예술영화, 예술영화는 곧 롱테이크, 라는 관습적인 추론은 이 영화에 맞지 않다. 오히려 이 영화는 예상외로 빠르고 느린 호흡의 이중무를 춘다.

<달마..>이 담백한 수묵화 내지는 자연주의적 필치만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이 영화에서 강력한 매력으로 새삼 눈에 들어오는 건 주인공이 번뇌할 때 그를 둘러싼 자연이 위협과 보호라는 이중의 자태를 보인다는 점이다. 사바세계의 낡은 기억과 갈등이 용맹정진하려는 불자를 괴롭힐 때, 여기에 어떤 번뇌의 음산함이 스며든다. 그걸 배용균은 구도자의 안간힘과 그들의 주변에 출몰하는 초현실적 환영과의 마주침으로 그려낸다. 그러니 산천은 풍요로운 정물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귀기가 흐르는 정령의 산신들로 순식간에 바뀌어 보이곤 한다. 정확히 배용균은 다음 작품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에서 후자의 이미지를 더 밀고 나간 것이다.

배용균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는 어린 동자승 해진, 속세를 등지고 출가한 젊은 스님 기봉, 해탈의 경지에 이른 노스님 혜곡을 오가며 비춘다. 무슨 곡절이야 있을 리 없다. 동자승은 외로워 친구로 삼으려다 실수로 새 한 마리를 살생한 뒤 괴로워하고, 기봉은 속세에 두고 온 앞 못 보는 어머니와 가난한 누이 생각에 번뇌한다. 노스님 혜곡은 그들에게 늘 강직하고 지혜로운 깨달음과 화두를 던져주지만 기봉이 화두를 풀기 전에 입적하여 산천에 뿌려진다. 이 세 사람의 이야기, 라기 보다는 이 세 사람의 수행의 일지라고 이 영화는 불려야 할 것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대변하는 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유독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기봉이 노동을 잠시 멈추고 속세를 생각할 때 뒤따르는 몇 개의 풍경 인서트와 아버지의 초상화 클로즈업은 기이할 뿐 아니라 역사적인 느낌까지 준다. 동자승 해진이 살생에 괴로워하다 문득 소를 만나 뒤따라가게 되는 장면은 분명 잘 알려진 <십우도>의 이야기지만 그걸 보여주는 리듬이 괴이하다. 혹은 산에서 인물들을 보여줄 때와 도시에서의 인물들을 보여줄 때 배용균은 다른 방법을 쓴다. 배용균의 네오리얼리즘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장면인데, 시장터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 틈에 법복을 입은 배우 기봉을 던져 놓고 카메라는 어딘가 숨은 채 본다. 그 화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진짜이며 그들 사이에서 기봉 역할의 배우만 연기한다. 엑스트라를 모으기 힘들어 이런 방식이 구상됐을 수 있지만 실재와 영화의 한 장면이 섞이는 당시로는 비범하고 낯선 경험이다.  

단단한 상징과 비유의 영화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상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많은 장면들이 있다. 그걸 영화적으로 고민했고 인정받아 마땅한 성과를 올렸다. 또는 서사적으로 전혀 설명될 수도 없고 진전될 수도 없는 인물들의 마음 속 번뇌를 다룰 때 더 이 영화의 가치가 빛난다. 어떻게 영화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저 중생의 안간힘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고심하고 또 한다. 그 때문에 카메라는 종종 인물이 하는 말이나 행동에 상관없이 마치 마음이 부유하는 것처럼 스스로 정신의 반영이 되어 움직이고 또 편집되어 간다. 그걸 영화적 순간으로 끌어내려는 이토록 강렬한 추구가 한국영화사에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만약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이후로 배용균의 영화작업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더라면, 우리는 단단한 상징과 비유의 영화 그리고 기묘한 멘탈 시네마(정신의 영화)라는 희귀한 한국영화의 길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걸 못 봐 안타깝다. 그는, 왜, 떠났을까?

사람들은 배용균이 어쩌면 돌아올지 모른다고 자주 말하는데 개인적으로도 그의 귀환을 소망한다. 그리고 <달마..>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그걸 소망해도 된다는 강력한 믿음의 징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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