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일선
Sin Il-seon / 申一仙 / 1912  ~  1990
본명
신삼순 (Sin Sam-sun)
대표분야
배우
활동년대
1920, 1930, 1950, 1960
DB 수정요청

필모그래피 (10)

더보기
배우 :
상처받은 두 여인 (이규환, 1963)
아리랑 (김소동, 1957)
은하에 흐르는 정열(비상) (안종화, 1935)
청춘의 십자로 (안종화, 1934) 영옥
괴인의 정체 (김수로, 1927)
들쥐 (나운규, 1927)
금붕어 (나운규, 1927)
먼동이 틀 때 (심훈, 1927)
봉황의 면류관 (이경손, 1926)
아리랑 (나운규, 1926) 최영희

주요경력

1925년 반도가극단 단원으로 연기 생활 시작
1926년 함흥 공연 중 복혜숙의 제의로 <아리랑>으로 데뷔
1927년 <먼동이 틀 때>를 끝으로 혼인, 연예 활동 중단
1934년 이혼 후 포리돌레코드에서 음반을 취입하여 가수로 연예계 복귀
1936년 <아리랑(3편)>을 끝으로 재혼과 함께 은퇴
1957년 나운규 20주기 기념 <아리랑>에 단역으로 출연 후 완전히 은퇴

기타정보

기타이름
申紅蓮, 신홍련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신일선은 동덕여고를 다니던 14살 때 오빠의 권유로 가극단에 가입하면서 연예계에 발을 디뎠다. 가극단을 옮겨다니던 신일선은 1926년 조선키네마사가 제작하고 나운규가 감독한 <아리랑>에서 주인공 영진의 누이동생 영희 역을 맡아 출연하였다. 이 영화의 엄청난 성공과 더불어 신일선도 명실상부 스타가 되었다. 이런 여세를 몰아서 신일선은 <봉황의 면류관>과 <괴인의 정체>에서 주인공을 맡아 연기하였다(동아일보a; 동아일보 1927년b; 경향신문b; 대중예술인 사전). 1927년에는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조선키네마의 후속 작품인 <들쥐(야서)>와 <금붕어>에 연달아 출연하였다. <금붕어>를 촬영하는 중에는 커다란 사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한강 변에서 촬영을 하던 중에 신일선의 발이 미끄러지면서 물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다행히 목숨을 구했지만, 식민지 시기 영화 촬영 중에 발생한 커다란 사고 중에 하나였다(조선일보a; 조선일보b). 바쁘게 영화에 출연하던 신일선은 심훈이 감독한 <먼동이 틀 때>를 마지막으로 한동안 영화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전남 부호의 아들과 결혼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심훈) 신일선이 다시 연예계로 돌아온 것은 폴리돌 축음기회사의 전속가수가 된 1933년 무렵이었다. 복귀한 신일선은 1934년 <청춘의 십자로>를 통해 영화에도 출연하였다(동아일보c; 조선일보c). 1935년도에는 OK레코드와 전속계약을 맺고, 안종화가 감독한 <은하에 흐르는 정열>에도 참여하며 활발히 활동하였지만, 1936년 <아리랑 제3편>을 마지막으로 다시 영화계에서 떠나버렸다(동아일보d; 동아일보e; 대중예술인 사전). 1957년 나운규 20주년을 기념한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에 특별출연을 하긴 했지만, 영화계와는 거리를 두고 생활을 했다(경향신문a). 말년에 지병과 경제적 문제로 암자 생활을 하는 등 힘든 생활을 하다가 1990년 6월 3일 사망하였다(경향신문c면).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6년 9월 19일 5면.
동아일보b 1927년 2월 23일 5면.
동아일보c 1933년 10월 8일 6면.
동아일보d 1935년 2월 22일 5면.
동아일보e 1935년 9월 8일 2면.
조선일보a 1927년 4월 20일 3면.
조선일보b 1927년 5월 27일 조간 2면.
조선일보c 1934년 10월 3일 석간 3면.
경향신문a 1957년 1월 24일 4면.
경향신문b 1983년 1월 22일 2면.
경향신문c 1990년 6월 6일 12면.
심훈,「朝鮮映畵人 언파레드」,『동광』제23호, 1931년 7월호.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