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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랑
Lee Hae-rang / 李海浪 / 1916 ~ 1989
본명
이해량 (Lee Hae-ryang)
대표분야
배우, 감독
활동년대
1940, 1950, 1960
DB 수정요청
소장자료
기본정보
영상자료
(3)
VOD(3)
이미지
(6)
스틸(6)
문헌자료
(1)
도서(1)
이미지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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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택이
이해랑
마인
필모그래피 (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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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육체는 슬프다
(이해랑, 1961)
배우
:
붉은 두목
(이영, 1961)
조만식 선생
군도
(유심평, 1961)
칙사
카츄샤
(유두연, 1960)
검사
흙
(권영순, 1960)
임변호사
딸
(김화랑, 1960)
송두철(기영의 부)
그 이름을 잊으리
(노필, 1960)
전상무
버림받은 천사
(김수용, 1960)
백교수
사랑의 함정
(강찬우, 1960)
판사
청춘화원
(이강천, 1960)
대명토건중역
주요경력
1945년 극단 전선 창단
1946년 극예술회 창립
1950년 국립극장 전속극단 신협 창립인 및 대표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
1957년 국립극장 극장장
1959년 중앙국립극단 단장, ITI한국본부 위원장, 동국대 연극과 부교수
1965년 이해랑 아동극단 창설
1966~88년 이해랑 이동극장 대표
1967~73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1971~77년 제8대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 제9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1983년 국립극단 종신단원
1984~8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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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정보
주요기타작품
■ 연극
<자유부인>, <느릅나무 그늘 밑의 욕망>, <다이알 M을 돌려라>, <인생차압>, <한강은 흐른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원술랑>, <햄릿> 등
수상내역(기타)
1954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63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69년 3·1연극상 개인상/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
1985년 동랑연극상/
1990년 “이해랑 연극상” 제정/
한국영화사료관
더보기
[영화잡지] 코리아시네마 1972년 9월호(제7호)
발행일
1972-09-01
[영화잡지] 코리아시네마 1972년 3월호(창간호)
발행일
1972-03-01
[해제 콘텐츠] 은막에 등용된 첫 신극배우 김동원
by.
김종원(영화사연구자)
2019-12-24
[사진]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에 출연한 김동원, 오른쪽은 배우 신성일 구경꾼들 폭소 자아낸 <밤의 태양>의 야외 촬영 1948년 밀수 근절을 위한 수도청 후원의 정책 홍보영화 <밤의 태양>(박기채 감독)에 출연한 김동원(金...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대학 재학 중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를 조직해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귀국 후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의 후신인 극연좌(劇硏座)에 입단했다. 하지만 극연좌가 일제에 의해 해산 당한 뒤, 대중적 성격이 강한 극단 고협(高協)에 입단해서 연기생활을 이어갔다. 해방 후 좌익 연극에 대항하여 극단 전선(全線)을 창립했으며,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 조직에 앞장서기도 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스크린에는 다소 뒤늦게 데뷔했는데, 그의 출연작들로는 신상옥의 <코리아>(1954), 김소동의 <왕자호동과 낙랑공주>(1956), 홍성기의 <여성전선>(1957), 김강윤의 <이름없는 별들>(1959), 권영순의 <흙>(1960) 등이 있으며 필모그래피는 1950년대 중후반에 한정된다. 1962년에는 극단 신협(新劇協議會)에서 제작한 <육체는 슬프다>를 연출했다. 이 작품은 황순원의 소설 『산』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김동원, 박암, 황정순, 문정숙 등이 출연했다(경향신문a). 1950년 국립극장 전속극단 신협 창립인 및 대표를 맡았고, 이후 1957년 국립극장 극장장, 1959년 중앙국립극단 단장, 동국대 연극과 부교수 등을 지냈다. 1965년에는 이해랑 이동극단을 창설해 전국을 돌며 공연을 하기도 했다(경향신문b). 이후 1981년 예술원 부회장, 1984~1987년 예술원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제8·9대 전국구 국회의원에 선출되어 연극계를 잠시 떠나기도 했던 그는, 이후 연극계로 돌아와 <밤으로의 긴 여로>(1986), <황금연못>(1987), <뇌우>(1988) 등을 연출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맥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끝을 맺을 정도로 유명한 맥주애호가였던 연출자 이해랑은, 1989년 자신이 6번째 연출을 맡은 <햄릿> 공연을 앞두고 연습장으로 나가던 중 과로로 사망했다(경향신문c).
* 참고문헌
경향신문a 1961년 10월 20일자 4면
경향신문b 1986년 4월 12일자 5면
경향신문c 1989년 4월 10일자 5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6470
[작성: 김한상]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16년 서울 태생으로 1940년 일본대학 예술과를 졸업했다. 대학 동기생으로 연출가 이진순, 한국배우전문학원 원장을 지낸 <교차로>(1955)의 제작자 김인걸이 있다. 1959년 김홍 감독의 <언덕의 종은 울려도>에서 테너 가수인 임만섭, <자유부인>의 김정림과 함께 출연했고 1962년엔 <육체는 슬프다>의 감독으로 진출했다. 이 작품은 살인자가 되어 쫓기는 간첩과 그를 추적하는 경찰 수사대원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린 반공계몽물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계 활동은 뚜렷한 업적을 남긴 연극의 경우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는 1959년 중앙국립극단 단장, ITI한국본부 위원장, 동국대 연극과 부교수직을 맡는 것을 계기로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쳤다. 1965년엔 이해랑 아동극단을 만들어 연극의 활성화에 앞장섰고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예총 회장을 연임했다. 1954년 예술원 회원이 된 후 부회장(1981)을 거쳐 회장(1984)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예총 회장 재임 중에는 직능 대표로서 여당인 민주공화당 전국구 의원에 뽑혀 의정 단상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1989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예술원 원로 회원으로서 말년을 보내며 순탄한 예술의 질과 사회적 명성을 누렸다. 대표적인 연극 연출작으로 <햄릿>(1951),<여성전선>(1952),<자매>(1954),<학 외다리로 서다>(1964)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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