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에 출연한 김동원, 오른쪽은 배우 신성일
구경꾼들 폭소 자아낸 <밤의 태양>의 야외 촬영
1948년 밀수 근절을 위한 수도청 후원의 정책 홍보영화 <밤의 태양>(박기채 감독)에 출연한 김동원(金東園)은 신극배우로서 은막에 진출한 첫 사례가 된다. 그동안 극단 황금좌를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영화에 출연한 황철, 심영 등 해방 전 신파배우들과는 달리 그는 신극을 지향한 극예술협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역은 최은희, 조연으로 전택이, 한은진 등이 합류했다. 그는 영화가 연극과 장르는 달라도 연기의 이치는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막상 카메라 앞에 서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관된 흐름 속에서 전개되는 무대 연기와는 달리 감독의 콘티에 따라 진행되는 토막 촬영이어서 감정을 잡지가 쉽지 않았다. 거리에서 교통사고로 쓰러진 애인(최은희)을 안아 일으키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긴장한 나머지 여자를 안고일어서다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구경꾼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음은 물론이다. 그의 첫 출연은 이렇게 ‘실망스럽게’(김동원, 『미수의 커튼콜: 나의 예술과 삶』, 태학사, 2003, 144~145쪽) 끝났다.
<밤의 태양>에 출연한 후 다시는 외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김동원이 문화영화 <코리아>(신상옥, 1954)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로부터 6년 만이었다. 명승지와 그곳에 담긴 일화를 소개하는 이 영화에서 그는 남원을 무대로 전개되는 <춘향전>의 이몽룡 역할을 맡아. 춘향 역인 최은희와 다시 호흡을 맞추게 된다.
그사이 그는 악몽 같은 ‘6,25 동란’을 겪었다. 극단 신협이 앙코르 공연으로 마련한 번역극 <뇌우(雷雨)>(부민관)가 끝난 지 이틀 만이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종로구 필운동 처가에서 숨어 있다가 붙들려 한밤중에 연극인 일행과 함께 북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임박한 때였다. 그러나 다행히 평양을 지나 대동강 중류 연안의 순천지역에 이르렀을 때 유엔군과 함께 진격해온 국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다.(김동원, 앞의 책, 173~180)
<자유부인> 이후 형성된 신사풍의 캐릭터
김동원이 관객들의 시선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1956)부터였다. 1954년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정비석의 서울신문 연재소설(215회) 『자유부인』을 영화화한 이 작품에 양품점 주인 안태석 역이 주어졌다. 검열 당시 그가 유부녀 오선영을 끌어안은 포옹 장면과 그녀가 이웃청년 신춘호(이민)와 가진 키스 장면이 한국의 도덕 기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상영이 보류될 위기(“키스 장면이 말썽, <자유부인>도 상영 불허”, 『동아일보』, 1956.6.9)를 맞기도 했으나 수도극장에 개봉되면서 15일간 15만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안태석 역할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영화평론가 이봉래는 ‘완전한 미스캐스트’라고 전제하고 “그 신파조의 대사와 움직임이 없는 생경한 연기는 이분이 어떻게 연기를 한 분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근래의 쾌작, 영화 ‘자유부인’”, 『한국일보』, 1956.6.7)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동원은 이 영화의 성공과 함께 대중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그런 후광 덕인지 그는 잇따라 같은 해에 김소동, 김한일 형제 감독에 의해 각기 만들어진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1956)와 <여성의 적>(1956)에 출연하게 된다.
[사진]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 출연한 김동원, 상대역은 여주인공 오선영을 맡은 배우 김정림
이후 그는 홍성기 감독의 <실낙원의 별>(1957)을 비롯한 <장미는 슬프다>(박상호, 1958),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1958), <한말 풍운과 민충정공>(남홍일, 윤봉춘, 1959)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신상옥, 1959), <연산군>(신상옥, 1961), <유정>(김수용, 1966), <엘레지의 여왕>(한형모, 1967),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 <엄마 결혼식>(조문진, 1973) 등 160여 편에 캐스팅 된다. 이 가운데 주연급이 ‘영화연기로서의 이행을 확실히 실증’(유한철, “57년 영화계 총평”, 『조선일보』, 1957.12.26)한 <실낙원의 별>(소설가 역) 등 60편에 이른다.
1950년대 중후반 김동원은 그동안 연극배우로서 누려온 정상의 위상에 버금하는 인기를 누렸다. 이 사실은 당시 월간 대중지 《희망》이 독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현역 남녀배우 인기투표’ 결과(“제2회 배우 인기투표, 제1위에 남 김동원, 여 조미령”, 『조선일보』, 1957.8.3)가 말해 준다. 그는 2위의 전택이, 3위의 최무룡을 제치고 대중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로 선택받았다. 그동안 그는 왕(<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연산군>)이거나, 회사 사장(<장미는 슬프다>), 독립운동가(<별아 내 가슴에>), 충신(<한말풍운과 민충정공>,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대학교수(<낭만열차>(박상호, 1959), <일월>(이성구, 1967)) 소설가(<실낙원의 별>, <장군의 수염>), 초등학교 교장(<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1965)) 등 악역과는 거리가 먼 점잖은 신사풍의 인물들을 만들어 내었다.
[사진] <장미는 슬프다>(박상호, 1958)에 출연한 김동원, 상대역은 여배우 김지미(사진제공: 김종원)
일본 유학 시절의 단역 출연
김동원은 1916년 11월 14일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 양화점을 경영하는 김경순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혁(東爀)이 본명이었으나 해방이 되는 해 11월 <검찰관> 공연 때부터 획이 많고 딱딱한 본명 대신 대중들이 알기 쉽게 평소 좋아한 작가 이광수의 아호 ‘춘원’에서 원(園)자를 따서 새로 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개성제일공립보통학교 4학년이 되자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보통학교 과정을 마치자 배제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 후 처음 유진 오닐의 〈고래〉로 연극무대에 섰다. 부풀어 오른 그의 ‘대배우로의 야망’은 결국 일본대학 예술과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유학시절 그는 조선유학생들끼리 동경학생예술좌라는 연극 서클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일생에 연극의 동반자가 된 이해랑을 만나게 된다.
[사진] <실낙원의 별>(홍성기, 1957)의 한 장면, 왼쪽이 여배우 주증녀, 오른쪽이 노경희(사진제공: 김종원)
이 무렵 그는 쇼치쿠(松竹) 영화사의 연기자 모집에 응모하여 8개월 동안 연수를 받고 ‘얼굴도 보이지 않는 단역’ 몇 편에 출연하기도 했다.(김동원, 앞의 책, 70쪽) 그러나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결국 1939년 5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에 오른다. 이후 그는 신협 등에서 활약하며 국내 최초의 <햄릿>(1951)에 출연, ‘한국의 로렌스 올리비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정확한 발성과 화술로 중후한 연기를 보여줬던 김동원은 2006년 5월 13일 아흔 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