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봉
Yoon Il-bong / 尹一峰 / 1934  ~ 
대표분야
배우, 제작/기획
데뷔작품
구원의 애정 1955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80, 1990, 200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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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경력

한국 영화인 협회 부 이사장 역임
한국 배우협회 25대 회장 역임
제11대 영화진흥공사 사장 역임
1950~65년 KBS, MBC, TBC 연속드라마 <산넘어 바다건너>, <떠날때는 말없이>, <아낌없이 주련다> 등 200여 편 방송활동

기타정보

기타이름
윤명섭(尹明燮)
영화계 입문배경
1948년 당시 미군정보공보부와 OCI는 우리나라 철도 역사를 다룬 문화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주인공이 될 중학교생을 찾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안철영 감독과 이용민 감독 등이 우리학교를 찾아와 나에게 캐스팅 제의를 해온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50여 년을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시작한 일이었으나, 차차 영상미학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고 평생 장인 정신을 가지고 최선을 다 한 연기 인생이었다고 자부한다.
주요 영화작품
푸른 언덕(1948,유동일감독)
구원의 애정(1955,민경식감독)
이국정원(1958,전창근감독)
사랑하는 까닭에(1958,한형모감독)
아름다운 수의(1962,이형표감독)
하숙생(1966,정진우감독)
애하(1967,이형표감독)
산(1967,신상옥감독)
석화촌(1972,정진우감독)
별들의 고향(1974,이장호감독)
나는 고백한다(1976,정소영감독)
돌아온 팔도강산(1976,정소영감독)
초분(1977,이두용감독)
당신만을 사랑해(1978,문여송감독)
내가 버린 여자(1977,정소영감독)
사랑의 뿌리(1978,강대진감독)
과부(1978,조문진감독)
마지막 찻잔(1979,정소영감독)
돛대오 아니달고(1979,이원세감독)
미워도 다시 한번'80(1980,변장호감독)
질투(1983,김인수감독)
바다로 간 목마(1980,정진우감독)
가고파(1984,곽정환감독)
먼 여행 긴 터널(1986,이형표감독)
환희(1996,엄종선감독) 외 270여편
애착작품 및 사유
연기자라면 누구나 관객에게 사랑 받는 연기를 하고 싶을 것이다. 그 인기와 사랑의 잣대는 딱히 뭐라 정의할 수는 없지만 대외적으로 공인 받은 상(償)을 수상한 연기자라면 어느 정도 그 연기를 인정받았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나에게 있어서는 처음으로 1967년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안겨준 <애하(愛河)>라는 작품이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이밖에 1978년 <초분>이나 1984년 <가고파>라는 작품들도 나에게 큰 영광을 안겨 준 작품들이다. 상(償)과는 관계없이 관객들의 호응이 좋았던 작품 중에는 방황하는 젊은이와 중년 신사의 사랑을 그린 <내가 버린 여자>,<내가 버린 남자>, 그리고<여자의 함정>등이 있다.
하고싶은 말
최초의 한,중 합작 영화인 <이국정원>(1958)에 출연.
배우라는 이름에 대해-배우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지 50여 년이 지났지만 한번도 영화배우인 나 자신에 대해서 특별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배우란 특권계층이 아니라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사회구성원의 일원일 뿐이니까.오히려 관객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사람들로서 스스로 자중자애(自重自愛)하고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인기에 영합하는 배우보다는 인간적으로 인정받는 배우가 되기 위해 내면적으로 자신을 갈고 닦는 배우만이 진정한 영화배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속 명소
<당신만을 사랑해>- 제주도 일대. 당시 인기 가수 혜은이와 열연한 작품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주로 주인공을 많이 한 나이지만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구적 마스크를 가진 나로서는 5,60년 당시에는 캐스팅 등에서 손해를 많이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배역이건 아니건 간에 모든 맡은 바 배역에 나 자신을 투영시키려고 애썼고 외형적이고 단편적인 연기에서 벗어나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연기를 하기 위해 고심했다. 한 때 나를 멜로물의 단골 배우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인생이란 사랑으로 풍부해질 수 있다는 내 생각과 부드러운 이미지가 작품과 잘 맞아 떨어져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비춰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풍부한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황혼을 잔잔히 연기하고 싶다.
자기소개 및 취미
저는 50여 년 동안 연기 생활을 해 오면서 영화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종교이자 정치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간 갖은 어려움과 시련도 많았지만 우리 영화를 사랑하시는 여러분의 성원으로 우리 영화도 이제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한국 영화가 되기까지 앞으로도 많은 사랑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평소 운동을 즐겨하는 저였지만 그 동안 영화진흥공사 사장이라는 중책을 수행하느라 저의 건강관리에는 소홀했었습니다. 앞으로도 건강관리도 충실히 하여 배우 윤일봉으로서 여러분 곁에 영원히 함께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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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34년 충청북도 괴산에서 출생했으며,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을 나왔다. 1947년 용산중학교 재학시절에 미국공보원의 문화영화 <철도이야기>에 아역으로 출연한 경험이 있으며, 정식 데뷔는 1955년 민경식 감독의 <구원의 애정>의 주연을 맡으면서 이루어졌다. 이후 이강천 감독의 <격퇴>(1956), 김소동의 <아리랑>(1957) 등을 통해 1950년대 중후반 인기배우로 부상했으며, 최초의 한?홍합작 영화인 <이국정원>(1957)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20대 말부터 30대 중반에 이르는 6여 년의 시기 동안 홍콩, 대만, 할리우드 등에서 합작으로 제작한 영화들에 출연했다(경향신문). 1967년 이형표 감독의 <애화>로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1972년 정진우 감독의 <석화촌>으로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1977년 이두용 감독의 <초분>에서 대종상 남우조연상, 그리고 1984년엔 <가고파>로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다수의 영화에서 주조연을 넘나들며 관록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한국영화인협회 부이사장, 한국배우협회 회장, 영화진흥공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동아일보, 매일경제, 한겨레신문).

* 참고문헌
경향신문 1982년 2월 24일자 12면
동아일보 1990년 12월 7일자 19면
매일경제 1981년 2월 25일자 12면
한겨레신문 1998년 5월 14일자 23면

[작성: 김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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