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철민과 만나는 수연. 이미 자살재활 치료센터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두 사람은 모두 한번씩 자살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건조한 섹스. 수연은 계속해서 자살을 꿈꾸고 환상 속에서 깨어난 그녀는 무관심과 익명성 그리고 현대화된 문명 속에 갇힌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이 막혀있는 공간 속에서 말이다.
식물원에서 일하는 수연은 항상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 답답한 아파트와 언제나 꽉 막혀있는 도로, 무관심한 사람들은 그녀를 둘러싼 감옥과도 같다. 영화의 영문 제목 ‘Glasshouse’는 온실과 감옥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살과 타살, 행복과 불행은 발음은 다르지만 같은 의미의 한 단어인지도 모른다.
연출의도. 현대사회와 문명들 속에서 과연 인간들은 행복한가에 대한 물음을 자살이라는 코드와 함께 설명하고자 한다. 철저하게 객관적인 앵글로서 스토리를 담아가고자 주력했으며 무엇보다도 ‘자살은 또 하나의 타살’ 이라는 명제 하에 영화를 연출했다. 문명 속에 살고는 있지만 자연에 가까워지고 싶은 수연의 욕망을 표현함과 동시에 그녀의 ‘텍스트 속 욕망’이 결코 충족될 수 없음을 ‘Glasshouse(slang:prison)’가 갖고 있는 의미와 함께 알레고리 시키고자 한다.
연출의도 2. 영화에서 내러티브보다 강조되는 것은 수연과 철민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이다. 인공적으로 자연을 가둬놓은 온실과 아파트는 박제된 삶, 즉 죽음을 향해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자살이란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순수한 자살’과 ‘사회적 타살’. 영화의 영문제목인 ‘Glasshouse’는 온실과 감옥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리뷰 1. <온실>의 주제를 단순하게 말하는 것은 쉽다. 이제는 피상적인 단어로 전락한 듯한 현대인들의 소외 내지는 의사소통의 부재 등의 제목을 갖다 붙이면 된다. 수연은 영문을 알 수 없는 남편의 자살을 계기로 계속되는 자살충동을 느끼던 중 재활치료센터에서 철민을 만난다. 그는 아내의 불륜현장 목격으로 인해 충격을 받게 된 인물이다. 이쯤 되면 두 사람 사이에 화해가 일어날 것 같지만 단자화 된(monad) 개인들은 어디에서도 교감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 시도에 그쳐버리는 두 사람 사이의 섹스처럼 허무한 열망이 피어날 따름이다. 단편영화로서 이 영화의 매력은 단자화 된 개인을 대사나 드라마틱한 설정이 아니라 현대적 풍경 위에 설계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미로와 같은 느낌을 주는 주거환경과 수연이 머무는 온실의 풍경은 질식할 것만 같은 평온함으로 가득하다. <온실>은 현대적 풍경의 의미와 그 속에서 소외된 개인의 표정을 포착했다는 것만으로도 엇비슷한 주제의 단편들과 구별되는 묵직함을 지닌다. 소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소외를 침묵함으로써, 현대사회를 냉정히 묘사한다. (제7회 전주국제영화제 이상용 평론가)
리뷰 2. 꽉 막힌 도시공간에서 온실을 찾고 가꾸는 수연의 행위는 생존을 향한 몸부림에 가깝지만 숨막힐 듯한 현대문명 속에 인공적으로 자연을 가둬놓은 온실은 박제된 삶, 즉 죽음을 향해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는 온실에서 화초를 가꾸면서 자신의 손목을 긋는다. 현대문명 사회에서 인간 삶의 조건을 반추하는 이 영화에서 자살은 특정한 사람의 몫이 아니다. 수연에게도, 그녀와 건조한 하룻밤을 보낸 철민에게도 죽음은 삶의 바로 옆에서 그들을 따라오고 있는 그림자이다. 때문에 철민의 갑작스런 자살과 그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수연의 삶 사이에는 그다지 큰 거리가 놓여있지 않다. 수연의 죽음은 그녀의 환상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실제로 일어날 것일 수도 있다. 행동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죽음의 냄새를 감지하고, 그러한 분위기가 영화전체를 관장하는 참으로 기이한 느낌의 영화다. (제31회 서울독립영화제 맹수진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