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시코쿠. 그곳은 예로부터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흘러들어가는 곳. 세상 어디보다도 죽음과 가까운 섬. 오핸로는, 시코쿠 1,400km에 걸쳐 88개소의 사찰을 순례하는 여행자를 말한다. 장장 20여키로의 완전군장에 가까운 짐을 지고 하루 30km를 걷는 오핸로들은 말그대로 인생이라는 짐을 짊어진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다. 길위에 쓰러져도 괜찮다. 입고 있는 백의가 수의요, 들고 있는 지팡이가 묘비다.
연출의도. 처음에 이 작품을 만들려고 했던 것은 단순한 의도에서였다. 시코쿠의 오핸로 여행이라니, 나 자신 듣도 보도 못한 이 여행을, 물론 나보다도 듣도 보도 못했을 동포 한국 사람들에게 알리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시코쿠로 향한 것이다. 카메라를 들며, 나는 길 위에서 정말로 다양한 오핸로들과 조우했다. 나도 한사람의 오핸로였다. 그냥, 카메라를 든 오핸로였다. 나는, 사찰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하지만 길 위에는 그 외에 배울 것이 더 많았다.
나에게 이 작품은 의미가 깊다. 촬영에서부터 편집까지, 모두 혼자였다. 다른 모든 오핸로들과 같이. 이 작품을 나는, 각자 삶의 어딘가에서 그 어깨에 올려진 짐과 싸우고 있는 동년배의 여인들과 함께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