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임권택, 1984
이해윤의 철학 중 하나는 '의상하는 사람은 영화의 성격이 어떤지, 어느 배역에게 옷을 입히는지, 시대적 배경이 어딘지 감독 못지않게 잘 알아야 한다' 였다. 임권택 감독의 과소평가된 이 걸작에서 그 철학이 잘 드러낸다. 역병이 퍼져 백성들이 죽어가는 조선을 배경으로 두 남녀가 왕의 원한을 사는 바람에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왕의 원한과 집착이야말로 그들에게 큰 역병이지만 이는 극복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의상에도 니힐리즘이 깃들어 있다. 남자주인공이 입은 보랏빛 두루마기는 질병과 죽음, 우울을 상징하는 심리학적 측면에서 선택된 색채처럼 보이고, 두 주인공이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입고 있는 흰색 한복은 상복 그 자체다. 닥쳐올 수밖에 없는 죽음을 어찌 막겠느냐는 심리를 의상이 대신하고 있어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