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토피아 apart-opia(계속)

2020-12-22 ~ 계속
아파-토피아 apart-opia(계속)
2020년 '제11회 도전! 나도 프로그래머' 대상 수상작

아파트는 한국인의 욕망의 수직적 구현인 동시에 그 욕망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사실상 한국이 전후의 폐허를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개별적 차원에서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국인에게 아파트는 그처럼 각별한 공간일 수밖에 없다. 한국 영화 속에서 원경遠景으로만 존재했던 아파트라는 공간을 잠시나마 근경近景으로 가까이 끌어당기는 일은 우리가 영화를 통해 한국인의 삶의 생태를 들여다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영화들 속에서 아파트의 공간은 이야기와 인물 뒤로 물러서 있지만, 무의식의 차원에서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아파트라는 새로이 도입된 주거 양식은 예컨대 휴대전화가 발명되기 이전과 이후의 영화 작법이 판이하게 바뀌었듯이, 지난 백 년 동안의 한국 영화에서도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다. 아파트에 얽혀 있는 담론의 온도와 한국인의 욕망이 건재하는 한, 그 변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공산이 크다. 앞으로 아파트는 또 동시대 한국인들의 어떤 이야기와 만나게 될까? 요컨대, 2020년 현재 아파트에 살고 아파트를 꿈꾸며 살아가는 당신과 나의 이야기 말이다. 

by 강순철(대상 수상자)


상영작품
  • 01. 오발탄 유현목, 1961
    “내 방은 저 옥상 꼭대기예요.”
    “여, 높직한 데서 사는군.”

    <오발탄>(1961)과 <로맨스그레이>(1963)에서 그려지는 초창기 아파트의 풍경은 삭막하고 단절된 느낌을 주는데, 극중에서 아파트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성애의 장소이다. 특히 <오발탄>에서 보여지는 초창기 아파트의 을씨년스러움은, 벽지도 바르지 않은채 그대로 노출된 벽체에서 두드러진다. 그곳은 생동하는 삶의 공간이나 전망의 공간이 아니라 안팎으로 닫힌 공간이다. 
  • 02. 로맨스그레이 신상옥, 1963
    “경남아파트의 26호실이다. 대영산업 사장 김상주씨께서 마누라가 알을세라, 극비밀리에 신접살림을 차려놓고 꿀같은 재미를 보는 애첩 장보영의 방인 것이다.” 

    <로맨스 그레이>의 애첩 장보영의 방, 경남아파트 26호실도 마찬가지다. 입식으로 꾸며져 화사한 현대식 내부는 아파트가 <오발탄>의 바로 그 아파트에서 어느 정도 진보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이한 것은 김사장의 본처와 그 가족이 사는 곳은 전통적인 좌식 문화가 건재한 단독주택이라는 점이다. 이 대비는, 아파트와 단독주택이라는 거주 형태에 대한 당대의 우열과 편견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웃과 ‘골목’을 공유하지 않는 아파트의 단절성을 강조함으로써, 아파트가 뭔가 께름칙한 일이 일어나는 부정적 장소임을 은근히 내비친다. 아파트는 아직 한국인의 삶을 겉돌고 있다. 
  • 03. 야행 김수용, 1977
    “한강이요.”
    “예, 타십시오.”

    70년대 강남 개발의 신호탄이었던 반포 한강아파트 단지의 초기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야행>에서도 아파트는 여전히 삭막하고 단절된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노동과 일상의 공간인 구도심과 거주의 공간인 신도시의 공간적 분리가 일어난 시기이다. 신도시의아파트에서 부부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은 구도심의 회사에서는 사람들 눈을 속이며 서로 남처럼 지낸다. ‘사생활’이라는 근대적 개념이 아파트와 함께 한국인에게 도래했다. 그러나 이 도래는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분리에 익숙하지 못한 한국인들에게 정서적인 파열음을 일으킨다. 주인공에게 아파트는 좌절된 욕망이 유폐된 공간이자, 끝내 그 욕망을 자기파괴적인 방식으로 구도심의 거리로 내몰게 하는 압력의 공간이다.
  • 04. 애마부인 정인엽, 1982
    “혼자 아파트로 나가더니, 결국 이럴려고 그랬군요?”

    일자리와 교육의 기회를 찾기 위해 찾아 각지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서울은 늘 만원이었고, 애초 아파트의 건립 목적은 좁은 대지에 용적률을 높여 더 많은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파트는 나고 자란 땅에 붙박혀 일생을 보내야 했던 종래의 한국인들의 삶의 양식의 전면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애마부인>은 억눌린 욕구에 지친 애마가 진정한 삶의 자리를 찾는 여정이다. 그 여정에서 젊은 여성이 ‘혼자 사는’ 아파트는 그러나 애마의 구원이 되어주지 못한다. 옛 애인이 자신의 베란다에 밧줄 사다리를 걸어(!) 애마의 집 베란다로 침입하는 장면은, 아파트가 보장하는 사생활의 견고함이 실은 앞뒤양옆이 모두 막힌 밀실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 05.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
    “그나저나 요즘 기름 안 사먹어 걱정이다. 안 팔려. 무슨 수퍼마켓인지 뭔지 그게 오는 바람에, 뭐 상표 있는 거, 그런 것들만 사 먹어.”

     아파트의 역사에서, 대량 공급과 규격화된 품질이라는 두 가지 목표는 사실상 아파트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이는 지난 시대 한국의 산업화-근대화가 한국인의 삶 전 영역에 걸쳐 목표로했던 바와 동일하다. <기쁜 우리 젊은 날> 곳곳에서 이제는 삶의 당연한 배경이 된 아파트의 모습이 보인다.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주인공이 처음 사랑을 고백하는 곳도, 부자간의 뜨거운 정을 확인하는 곳도, 결혼을 통해 가정을 꾸리는 일도, 삶과 죽음이 당연한 수순으로 들고 나는 곳도 모두 아파트다. 다시 말해 이제 아파트는 다수 한국인의 생애 전체에 걸쳐 있는 원경遠景이 되었다. 
  • 06.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이원세, 1981
    “모두들 입주권을 팔고 있나요?”
    “그냥 포기하는 것보다야 나으니까. 장사꾼들이 바로 그걸 노리는 거예요. 아파트로 갈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글쎄.”

    아파트를 통해 실현된 중산층의 꿈은 그러나 모든 한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꿈은, 누군가를 변두리로 계속해서 몰아냄으로서만 가능한 그런 꿈에 가까웠다. 폭압적인 개발독재의 원심력에 의해 밀려난 변두리 삶의 풍경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배경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가 보여주는 재개발과 거기에 얽힌 이권, 원주민들의 이주 문제와 투기 문제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시의성을 갖는다. 한국인이 기획하고 실행했던 아파트 유토피아의 실상은 장기 경체 침체와 실물 자산 가치의 급등에 힘입어 2020년 현재 더욱 가공할 악몽이 되어가고 있다.
  • 07. 삼공일 삼공이(301,302) 박철수, 1995
    “물론 친하게 지냈어요. 이웃이니까요.”

    삶과 공간의 질을 상향 평준화했다는 점에서 아파트는 제 역할을 다했지만, 갈수록 분화되어가는 개인과 개인의 욕망은 아파트라는 규격화된 공간과 불화하기 시작했다. <301, 302>에서 “새희망 바이오 아파트”라는 세기말적 이름을 가진 아파트는 두 여성에게 가해지고 있는 갖은 사회적인 압력의 시각화이자, 개별적인 욕망을 무화하는 소각로이며, 관계 맺기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독방이다. 두 여성의 억눌린 욕망이 서로 만나 기이하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분출될 때, 아이러니하게도 301호 여자와 302호 여자는 마침내 자신을 가두고 있던 벽들을 벗어나 자신의 욕망에 따라 타인과의 온전한 관계 맺기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아파트 유토피아가 도달한 파국일까, 아니면 새로운 시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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