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년 전 외국인이 기록한 한국의 인상들 (계속)

2023-05-03 ~ 계속
100여 년 전 외국인이 기록한 한국의 인상들 (계속)

기록영상을 보는 것은 프레임 밖의 촬영자를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촬영자의 행적과 성격은 어땠는지, 무슨 사연으로 카메라를 들었는지, 어떤 생각으로 그 장면을 담았는지 등등을 헤아릴수록 더 진한 사실이 배어난다. 기록영상을 보는 것은 한 프레임 속에 숨겨진 사연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연출된 극영화와 달리, 기록영화는 한순간에도 거대한 이야기 타래가 제멋대로 압축되어 있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추리와 상상을 통해 나와 인연이 끊어졌지만 실재했던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과 나를 다시 잇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시간의 횡포로 갈라져 낯선 사이가 되어 있는 화면 속 사람들에게, 이 순간만큼은 혈연과 학연과 지연을 마음껏 이어도 좋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지난 1월에 공개한 "1950년 이전 조선,한국 기록영상 컬렉션" 중에서 외국인이 촬영했던 영상 몇 편을 고르고 영상마다 몇 가지의 단서와 안내를 덧붙였다. 모두 무성영화이고 주관적 판단에 따라 적정한 속도로 조정한 버전이다. 편집본도 있고 여러 장면을 단순히 엮은 모음집도 있다. 감상이 버겁다면 조금씩 자주 봐도 된다. 초기 기록영상에서 컨티뉴어티는 큰 의미가 없다. 한 번에 모든 정보를 눈치채고 이해하는 사람도 소수일 것이다. 탐정, 공상가, 호기심쟁이라면 컬렉션 해제, 각 영상의 KMDb 영화정보, 웹 검색, 그 외 가능한 모든 방법을 병행한다면 더욱 즐거울 것이다.
 


상영작품
  • 01. Archives Korea 1930-1940 제임스 헨리 모리스(J.H. Morris), 1930
    ¶ 인생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낸 외국인의 1930년대 영상일기

    한성에 최초의 전차를 부설하기 위해 조선에 처음 발을 내딛었던 20대 후반의 청년 제임스 모리스(James H. Morris, 1871~1942). 당대의 각종 신문보도, 회의록, 증언에 'J. H. Morris'라는 이름과 함께 등장하는 다양한 이력들 — 캐나다 출생 / 미국 시민권자 / 수입판매상 / 자동차 정비업자 / 광산업자 / 타칭 '시네마토그래퍼' / 유니버설 픽처스 필름 배급업자 / 한국 내 외교관 커뮤니티와 교류, 각종 선교활동 지원 등등 — 은 모두 동명이인이 아닌 한 인물의 족적들이다. 이런 사람이 일기장 대신 카메라를 들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의 1930년대 기록영상은 ‘부유하고 사교적인 기술자’가 마음먹고 기록을 남기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공식적인 행사나 사건뿐 아니라 가족, 지인들의 내밀한 모습도 꼼꼼히 기록했다. 충분한 길이의 필름에 다양한 앵글을 담았고 어떤 장면들은 카메라 여러 대를 사용해 동시에 흑백과 초기 컬러 필름으로 촬영했다. 가장 상세한 금강산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전주와 함흥의 장로교 선교 활동이 궁금하다면, 또는 이화학당 창립 50주년 행사, 문묘 추계 석전대제, 일본 신사 제례 행렬, 영국 공사관, 활쏘기, 남사당패 풍물놀이, 근대 공원과 동물원, 놀이터, 정동과 궁의 모습처럼 다른 영상에서 볼 수 없거나 희귀한 장면들을 보고 싶다면, 먼저 이 영상에 있는지부터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영상이 길고 편집이 혼재되어 있으므로 다음 정보들을 두루 함께 참고할 것을 권한다.
    "1950년 이전 조선,한국 기록영상 컬렉션"해제 문서 중 관련 내용

    KMDb의 작품정보  > 줄거리 > 장면정보

    ✔ VOD 영상의 '안내자막(한국어)' 옵션을 선택 (모바일 환경에서는 작동하지 않음)


    ⚠ 영상 중에는 뜻밖에도 버튼 홈즈의 여행기록 필름 <특이한 한국 문화>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영상이 여기에 수록된 연유는 밝혀져 있지 않다. <특이한 한국 문화>에 대해서는 아래에 별도로 소개했다.
  • 02. 유일무이한 도시 서울 엘리아스 버튼 홈즈, 1900
    ¶ 외국인 여행가의 눈에 비친 1910년대 초 경성의 짧은 인상 (1)

    20세기 초 대표적인 여행기 저술가, 강연가였던 버튼 홈즈(Elias Burton Holmes, 1870~1958)가 당초 동아시아 지역에서 주목하고 가장 자주 방문했던 나라는 일본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이 드러나는 그의 시각에서 일본은 그의 조국 미국이 근대화의 길로 인도한, 그의 표현대로라면 ‘깨어난’ 나라로서, 미국과 가장 편리한 항로로 연결된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었으리라. 그러나 그가 1901년 처음 한국에 들렀을 때는 유럽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동아시아에 도달하는 여정이었으므로 여느 때처럼 일본 나가사키를 경유하는 일 없이 중국에서 황해를 가로질러 한반도에 상륙했다.  이때 경성에서 그는 ‘매순간 신기하고 흥미로운 광경과 마주쳤고’ 이를 필름에 담았다. 1913년에는 필리핀 촬영을 마치고 다시 한번 한국에 방문한 것으로 보이는데, ‘깨어난 나라’ 미국과 일본이 ‘아직 잠들어 있던’ 필리핀과 한국을 근대화로 이끈다는 테마에 초점을 두고 변화하는 경성의 모습에 비중을 좀 더 실었다.

    이후 버튼 홈즈는 이 1901년과 1913년의 촬영 푸티지를 재편집하여 <유일무이한 도시 서울>을 비롯한 3편의 영상을 공개하는데, 이때 편집은 촬영시기와 무관하게 동선이나 강연 논리에 맞췄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이전 조선,한국 기록영상 컬렉션"해제 문서에 상세한 분석 내용이 있으니 함께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 03. 특이한 한국 문화 엘리아스 버튼 홈즈, 1900
    ¶ 외국인 여행가의 눈에 비친 1910년대 초 경성의 짧은 인상 (2)

    버튼 홈즈가 재편집, 공개했던 한국 관련 영상 3편 중 하나로서, <유일무이한 도시 서울>과 마찬가지로 1901년, 1913년 촬영본으로부터 시간 순서 관계없이 선택, 편집했고, 그의 눈에 특이하거나 신기하게 비춰진 한국인의 모습들을 담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재래 기구와 밧줄, 여러 명의 협동만으로 굴착기, 거중기 등 근대적 장비를 대체하여 일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좀더 많이 수록했다는 것 정도이다. 이런 광경들을 그저 진귀한 볼거리 정도로 묘사하는 그의 시각이 피상적이라고 느껴지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쓴 여행기 내용을 보면 나름대로 꼼꼼한 인터뷰와 조사를 수반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이 영상은 뜬금없이 제임스 모리스의 <Archives Korea 1930-1940> 푸티지에 포함된 상태로 처음 발견됐다. 어떤 경위로 제임스 모리스가 버튼 홈즈의 필름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단서는 없다. 다만, 이 두 인물은 1살 차이이고 둘 다 할리우드 영화사와 일한 적이 있으니 한국과 미국에서 지역적, 시간적으로 교류의 기회가 있었으리라 추정될 뿐이다. 참고로 버튼 홈즈의 여행기(1901년 자료만 수록)에서는 모리스가 속했던 '한성전기회사'에 대해 상세히 다루는 한편, 이 회사의 총괄 기술자의 자택에 방문했다는 기록과 함께 전경 사진까지 남기고 있는데, 이는 제임스 모리스에 대해 알려진 정보와 유사하다. 또한 이 책에 삽입된 다른 몇 장의 사진들은 "photograph by J. H. Morris"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이쯤 되면 둘의 만남과 교류가 있었으리라 상상해 봄 직하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진취적이고 카메라와 필름 기술에 밝은 편이었던 두 사람이 한국에 대해 서로 어떤 인상을 나눴을지 무척 궁금해진다.
  • 04. 제명미상(평양풍물) , 1930
    ¶ 1930년 즈음, 한 장로교 내한 선교사의 한반도 종단 기록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되어 의료선교를 했던 선교사 재커리어 버코위츠(Zacharia Berkowitz, 1892~1984)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푸티지 모음집이다. 이국적인 모습을 상품화하거나 관광 홍보 목적으로 제작된 다른 많은 기록영상들에 비해 빛나는 점은 근대화의 문턱에서 사라져 가던 한국의 유산과 한국인의 모습을 담백하게 담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당시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지역이 경북에서 평안도까지 한반도를 비스듬히 관통하는 영역이었기 때문에 다른 영상에서 자주 보기 힘들었던 경주의 각종 고적들과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의 모습, 황해도 정방산성 일대의 모습 등 귀한 장면들을 볼 수 있다. 물론 선교사답게 평양에서 전개된 다양한 선교활동도 담고 있는데, 평양연합기독병원과 숭실학교의 정경들과 함께 새뮤얼 모펫 선교사, 길선주 목사 등의 역사적 인물들도 깜짝 등장한다. 기독교인이라면 잠깐 나오는 심방과 통성기도 모습에 만감이 교차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영상은 필름 전체 두 권 중 1권 후반부에 이질적인 내용이 삽입되어 있는데, 바로 다음에 소개할 <한국의 농사-동양의 서사시>의 앞부분, 간자막 기준으로 "PART 1"으로 시작되는 부분과 거의 동일하다. 정확히 어떤 부분인지는 KMDb 영화정보 또는 기록영상 컬렉션 해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교사와 아마추어 다큐멘터리 감독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를 당장 추측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당대에 영화필름이 기독교 선교의 한 방편으로 인식됐던 흐름 속에서 선교지의 전통적인 관습과 생활상을 종교적 색채로 다룬 기록영상이 나름의 쓰임새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두 영상의 촬영 시기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정도의 단서만 가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 05. 한국의 농사 - 동양의 서사시 프레드 C. 엘스,루스 엘스, 1932
    ¶ 어느 미국인 회사원의 고상한 일탈 - 1931년 판 한국 벼농사 백서를 만들다

    와튼스쿨 출신의 엘리트로서 스탠더드 오일 뉴욕(Standard Oil Company of New York) 소속 회계사로 일본에서 근무하던 프레드 엘스(Fred C. Ells). 그에게 카메라 촬영은 '반복되는 업무로부터 벗어나 마음 가는대로 할 수 있는' 취미 같은 것이었다. 첫 작품은 1931년에 아내 루스 엘스(Ruth Ells)와 함께 한국에 방문하여 일년 농사 과정을 촬영한 16mm 필름 다큐멘터리였다. 이 작품은 이듬해 《아메리칸 시네마토그래퍼(American Cinematographer)》가 주최한 아마추어 영화 콘테스트에서 금상을 받고, 몇 년 후에는 종교영화재단(Religious Motion Picture Foundation)의 필름 대여 라이브러리에 포함되기에 이른다. 원래 제목은 <쌀(Rice)>이었고 후에 <농사-동양의 서사시(Korean Farming, An Oriental Epic)>로 개명된 타이틀 자막이 붙었다. '선교사들이 여전히 활용한다'는 1941년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선교사 재커리어 버코위츠의 <평양풍물>에 이 필름이 삽입되어 있었던 내막을 알 듯도 하다.

    프레드 엘스는 이 작품의 제작 과정을 '조립 작업(assemble job)'이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어느 정도의 연출과 편집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예컨대 이 영상은 한 마을의 이야기처럼 묘사됐지만 실은 최소한 세 군데에서 촬영했음을 알 수 있다. 농악놀이 장면의 깃발에는 '포천군 서면'이라고 적혀 있고, 벼농사 광경을 내려다보는 초월적 존재로서 등장하는 불상들도 각각 '충남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으로 식별된다. '농부 김씨 가정의 한 해 농사 과정'이라는 설정도 연출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거대한 자연과 생명이 공존하는 숭고한 행위로서 벼농사를 잘 그려냈고, 그 덕에 우리는 1931년 당시 한국 벼농사의 상세한 내용을 집대성한 영상을 참고할 수 있게 됐다.

    *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 근현대 영상자료 수집 및 DB구축 사업'으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와 한국영상자료원이 공동 수집한 자료임.
  • 06. 제명미상(중국과 조선 방문) Tor H. Wistrand, 1938
    ¶ 1938년 즈음, 스웨덴 외교관을 사로잡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38년. 국제연맹의 영향력이 약화된 가운데 독일과 일본의 영토 확장이 가시화되자, 중립국을 지향하던 스웨덴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일본 주재 스웨덴 외교관인 토르 비스틀란트(Tor H. Wistrand)는 하필이면 이런 시국에 일본 세력권 내의 중국, 한국 등을 방문하여 무려 16mm 컬러 필름으로 기록을 남겼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영상이 개인 관광 기록인가 정보수집 활동의 일환이었나 하는 의문이 일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카메라의 시선은 대부분 일반 사람들의 다채로운 모습에 고정되어 있다. 그들은 경복궁이나 창경궁 부근, 또는 번화가에서 떨어진 한국인들의 거주지역 부근에서 외국인의 카메라에 포착된다. 궁 뜰 어딘가에서 한껏 편한 자세로 머리를 괴고 누워있는 학생, 벽에 소변을 누다 걸린 할아버지, 수레를 따라가며 재밌어하는 아이들, 포대기를 두른 여인들, 누나들의 놀이를 방해하는 심술궂은 꼬마, 덤불과 물지게를 나르는 행인들, 카메라를 보고 신기해하는 어린이들의 미소. 어떤 정황적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너무나 사소하고 예쁜 순간들이 꽤 좋은 화질과 컬러 색감으로 남았다. 그러니, 엄혹한 일제강점기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살아갔던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주는 뜻밖의 위로를 사양치 말자.

    참, 이 영상은 한동안 한국을 컬러필름으로 찍은 가장 이른 영상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었지만, 이제 <Archives Korea 1930-1940>의 몇 장면(해제문 pp.391 참고)에 그 자리를 물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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