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대한 첫 기억을 떠올리면 대개는 어떤 영화가 생각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제목도, 장면도 기억나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거대한 스크린에 뭔가가 비치고 있었다. 저 멀리 뒤편 벽에서부터 빛줄기가 흘러나와 어둠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정면을 바라보면서 웃고, 울고 있었다. 여전히 몽롱한 상태에서, 나는 스크린이 아니라 관객들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동네 극장의 포근하고 다정한, 조금은 쓸쓸한 분위기를 만끽하면서.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극장이란 곳에 뻔질나게 드나들게 된 것은.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부모님은 온 가족을 데리고 동네 극장에 가셨다. 종암동에 있던 종암극장이었다. 그 시절의 동네 극장은 개봉관과 크기가 비슷했다. 표를 내고 들어가면 커다란 로비가 있고, 가운데 위치한 분수에서는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왔고, 할리우드 영화의 대저택에서 봤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양쪽으로 있었다. 거대하고, 화려했다. 영화를 보다가 로맨스나 드라마가 지루해지면 로비에 나와 한참을 뛰어다녔다. 지루해지면 다시 들어가 영화를 보고, 다시 나오고. <월하의 공동묘지> <목 없는 미녀> 같은 공포영화를 보다가는 무서워서 뛰쳐나오기도 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다가는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당시 동네 극장 이름은 대부분이 동네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중학교 때는 봉천동의 봉천극장을, 고등학교 때는 대흥동의 대흥극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동네 극장에서 <취권>이나 <007> 시리즈를 보기도 했지만, 역시 짜릿한 경험은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볼 때였다. 고등학교 때는 어른인 것처럼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지만, 중학교 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애니까.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늘 할리우드, 홍콩 영화만 보다가 정윤희와 신성일이 나오는 <가을비 우산 속에>(석래명, 1979)의 포스터를 봤다. 정윤희의 도톰한 입술이 부각된 포스터를 보는 순간, 우리는 침을 꿀떡 삼키고 있었다. 보러 갈까? 그래. 집에 들러 사복을 입고는 극장 앞에 모였다. 표를 사고 들어갔다. 동네 극장, 단속이 심하지 않을 때는 쉽게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도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들어가 보니 마침 키스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지금도 그 순간, 그들의 대사가 기억난다. 사춘기 시절의 기억은, 한번 박히면 평생을 간다.
동네 극장의 추억이 진한 이유는 공간의 추억이라는 점도 있지만 유년과 사춘기의 짜릿한 문화적 경험이었다는 점에 기인할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종암, 봉천, 대흥 극장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때 보았던 영화들의 제목이 죽 떠오른다. 그 영화들을 기억하는 한, 동네 극장의 그 포근함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