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스크린]사랑하는 외할머니께: <집으로…>(이정향, 2002) 월간스크린 ㉛ 한국영화 현장 기행

by.김형석(영화저널리스트, 전 스크린 편집장) 2019-05-13조회 4,037
집으로 스틸

2002년 | 튜브픽쳐스

감독, 각본: 이정향 | 제작: 황우현 황재우 | 촬영: 윤홍식 | 미술: 신점희 | 음악: 김대흥 김양희

CAST 할머니: 김을분 | 상우: 유승호

이 영화가 흥행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실 이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종종 무시되곤 했죠. <미술관 옆 동물원>(1998)을 만든 이정향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가긴 했지만, 장르 영화도 아니고 스타도 등장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공간이 산 속인 ‘자연주의 영화’는 2002년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너무나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개봉 전 대규모 시사회가 열리면서, 그 반응들이 퍼져나가면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400만 명이 넘는 흥행을 기록한 거죠. 하지만 더욱 소중한 건,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분명 우리 마음속에 있지만 긴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바로 ‘외할머니’라는 존재를 다시 불러온 것이었죠. 
 
 

현장 공개는 2001년 10월에 이뤄졌습니다. 충북 영동군 산촌면의 어느 작은 산골 마을. 여덟 가구가 전부인 곳입니다. 5개월 째 그곳에서 촬영 중이었는데요, 이 날은 할머니(김을분)가 상우(유승호)의 머리카락을 잘라 주는 장면 촬영이 있었습니다.
 
   

상우는 할머니에게 두 손가락으로 조금만 잘라달라고 손짓을 합니다. 할머니도 그 손짓을 따라하고요. 하지만 정말 그만큼만 자를까요?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그 결과를 아시겠죠. 한편 이 장면에서 이정향 감독은 할머니에게 원하는 손 모양을 이야기했는데요, 안타깝게도 할머니의 손가락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할머니가 손자의 머리카락을 잘라줍니다. 간단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굽은 허리의 김을분 할머니가 반복해서 다양한 앵글로 연기를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다음 신은 쥐가 파 먹은 것처럼 잘린 머리카락을 보고 상우가 화를 내며 징징대는 장면인데요, 산 마을이라 그런지 해가 일찍 떨어지고 결국 내일로 촬영을 미뤄야 했습니다. 
 
 

<집으로…>는 유승호와 엄마 역을 맡은 동효희를 빼곤 모두 현지에서 캐스팅한 비직업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입니다. 77세의 김을분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원래는 틀니를 하시지만 영화를 위해 빼시고, 처음 해보시는 연기지만 꿋꿋하게 카메라 앞에 서셨습니다. 1926년생이시니 올해로 93세시네요. 지금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살고 계십니다.
 
 

<미술관 옆 동물원>으로 데뷔 했지만, 이정향 감독이 먼저 완성한 시나리오는 <집으로…>였습니다. 자신이 외할머니에게서 받았던 사랑을 기억하며 쓴 시나리오였죠. 그런 점에서 <집으로…>는, 자신에게 커다란 사랑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에게 바치는, 이젠 어른이 된 손녀의 편지 같은 작품입니다.
 
 

이정향 감독과 유승호입니다. 2000년 7살의 나이에 드라마 <가시고기>로 데뷔하며 재능을 인정받았던 유승호는 <집으로…>를 통해서 확고히 자리를 굳혔죠. 
 

현장에서의 유승호입니다. 산 속의 가을 날씨가 아이에겐 꽤 추웠나 봅니다.
 
 

<집으로…>엔 상우가 롤러 블레이드 타는 장면이 종종 등장합니다. 여기엔 하나의 트릭이 있는데요, 마루에서 롤러 블레이드 타는 장면은 실제로 마루에서 촬영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군요. 배경에 자연 풍경이 걸리는 것이 더 좋겠다는 아이디어에 따라. 동네 이장님 댁에서 선반 하나를 빌려와 그 위에서 롤러 블레이드를 탔습니다.
 
   

이정향 감독은 <집으로…>의 컨셉트를 ‘자연’이라는 단어로 요약합니다. 자연의 힘과 그 자연과 함께 살아온 우리의 할머니들의 삶이 영화의 핵심인 거죠. 그래서 영화 작업 자체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이뤄졌습니다. 캐스팅도 되도록 현지에서 진행하고, 촬영도 시간 순서를 따랐습니다. “쌀을 너무 깨끗하게 씻으면 먹기는 좋지만 실제로는 영양분이 다 빠져나가듯, 너무 깨끗하진 않더라도 영양분이 가득한 쌀과 같은 그런 영화”가 바로 이정향 감독이 의도하는 영화였습니다.
 
 

윤홍식 기사는 <집으로…>를 통해 촬영감독으로 데뷔했습니다. 편안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윤 감독의 섬세한 작업이 있었기에 <집으로…>의 아름다운 영상은 가능했죠.
 
 

이정향 감독은 외할머니가 “모든 것을 품어 안는 자연과 같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상처 받는 우리들이 치유 받을 수 있는, 우리를 위로하는 존재인 셈이죠. 무조건적이며 무제한적인 내리사랑의 외할머니에 대한 영화. 바로 <집으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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