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스크린]위험한 상견례: <가문의 영광>(정흥순, 2002) 월간스크린 ㉚ 한국영화 현장 기행

by.김형석(영화저널리스트, 전 스크린 편집장) 2019-05-07조회 6,673
가문의 영광 스틸

2002년 | 태원엔터테인먼트

감독: 정흥순 | 각본: 정흥순 최해철 | 각색: 김영찬 | 제작: 정태원 | 기획: 권영락 유정호 | 촬영: 김윤수 | 미술: 오상만 | 음악: 박정현

CAST 박대서: 정준호 | 장진경: 김정은 | 장인태: 유동근 | 장석태: 성지루 | 장경태: 박상욱 | 장 회장: 박근형 

2001년 <조폭 마누라>(조진규)에서 시작된 2000년대 충무로의 ‘조폭 코미디’ 바람은 <가문의 영광>(정흥순. 2002)에서 정점을 맞이합니다. 로맨틱 코미디와 조폭 영화를 결합한 <가문의 영광>은 2012년까지 10년 동안 다섯 편의 시리즈로 이어졌죠. 그 중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건 물론 1편이고, 김정은은 ‘나 항상 그대를’ 장면과 함께 영화계에서도 톱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현장 공개는 촬영이 75퍼센트 정도 진행되었던 7월의 더운 여름날, 양수리의 한 레스토랑에서 이뤄졌습니다. 대서(정준호)와 진경(김정은), 양가의 상견례 장면이었죠. 대서의 아버지(심양홍)와 어머니(김해숙), 그리고 진경의 세 오빠와 아버지(박근형)가 처음으로 만나는 신입니다.
 

깡패 집안이랑 사돈을 맺을 수 없다고 버티던 대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릅니다. 반면 장씨 집안 남자들은, 마치 조직 이권을 둘러싼 협상 테이블에 참석한 건달들처럼, 거친 행동과 말투로 사돈들을 제압하죠. 
 
 

“아버지, 제 칼을 쓰시죠.” 식탁에 놓인 스테이크를 자르려는 쓰리제이 회장이 나이프가 영 시원치 않다고 하자, 세 아들이 재빠르게 각자의 연장을 꺼내 놓습니다. 더구나 샛째 경태(박상욱)는 다리 쪽에 비수처럼 감춰놓은 칼을 꺼내 대서 가족을 충격으로 몰아 넣습니다. 그러자 장 회장은 건네 받은 칼로 웃음을 머금은 채 스테이크를 난도질합니다.
 
 

상견례라고 하지만 진경은 마치 결혼식이라도 하는 듯, 웨딩 드레스라고 해도 손색 없을 하얀 드레스를 입고 부케까지 든 채 등장했습니다. 장면 내내 거친 오빠들 사이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은 내숭일 뿐, 맨손으로 뱀을 잡는 ‘강한’ 여성입니다.
 

정흥순 감독과 김정은이 연기 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애드립이 많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영화에서 김정은은 거의 애드립을 하지 않았습니다. “불필요한 애드립은 아예 안 하니만 못해요. 욕심을 부리다간 낭패를 보게 되죠. 영화의 흐름을 해치는 것은 물론, 편집 과정에서 잘려나가기라도 한다면 연기를 하다 만 것 같은 느낌만 남으니까요. 전 단지 제가 가진 말투로 편안하게 연기했어요. 가끔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해야 할 때가 있었는데, 철저하게 연습하거나 구사하지 않았어요. 캐릭터를 재밌게 살리는 게 관건이었으니까요.”
 
 

이 시기 김정은은 TV 연기와 CF 이미지에서 조금씩 영화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영화는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에 제가 잘 하면서 또한 사람들도 좋아할 수 있는 장르를 선택하고 싶었죠. 물론 코미디 장르가 만만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어필 할 수 있는 저의 매력은 코미디 연기였어요. 전 연기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아요. 그래서 캐릭터의 색깔을 갑작스럽게 혹은 억지로 바꾸는 건 위험하고 또 싫어요. 전 욕심도 있고 열정도 있어요. 조심조심, 차근차근 저에게 맞게 바꿔가고 싶을 뿐이에요.”
 
 

1990년대 TV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정준호는 <아나키스트>(유영식, 2000)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쪽에 진출했고 <두사부일체>(2001, 윤제균)과 <가문의 영광>은 그를 흥행 배우로 만듭니다. 
 
 
<가문의 영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배우는 다름 아닌 첫째 장인태 역의 유동근이었습니다. ‘왕' 이미지가 강했던 그는 이 영화에서 대변신을 하죠. 코믹하면서도 느물느물한 바람둥이 인태가 바로 그 역할인데요, 1980년대 이후 충무로를 떠났던 그는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왔습니다. 현장에선 어떤 배우들보다도 열심히 시나리오를 분석해서, 말없이 면학 분위기를 조성했죠.
 
 

정흥순 감독은 액션, 코미디, 로맨스가 버무려진 맛깔스런 영화를 만들겠다는 게 목표였습니다. 현장에선 부드러운 모습으로 배우들의 자연스럽고 편안한 연기를 이끌었는데요, 틈틈이 배우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애드립과 색다른 아이디어를 현장에서 만들어냈습니다.
 
 

쓰리제이 가문의 위풍당당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진경은 무엇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네요. 
 
 

장 회장이 반갑게 악수를 청하자 대서의 아버지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손을 잡습니다. 하지만 인륜지대사인 결혼을 천천히 생각해보자는 대서 아버지의 제안에 성질 급한 장 회장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집니다. “혹시 시방, 우리 딸내미가 맘에 안 드신다. 이런 말씀입니까?” 깡패 서너 명쯤은 문제없다고 큰소리쳤던 대서 아버지, 무안한 헛기침만 할 뿐입니다.
 
 

음식에서 머리카락이 발견되자 석태(성지루)는 웨이터를 부릅니다. “아야, 너 이것이 머시냐.” 죄송하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쌍한 웨이터는 석태에게 붙잡혀 어딘가로 끌려갑니다. 이때 막내 경태가 한 마디 거듭니다. “아버지, 오늘 여기 서비스가 영 거시기 헌디 확 엎어버릴까요?” 두 동생을 보며 큰형 인태는 흐뭇한 웃음만 짓습니다. 
 
 

제작자인 정태원 대표가 현장을 찾았습니다. 김정은은 <가문의 영광>에 이어 <나비>(김현성, 2003)에서도 태원엔터테인먼트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정준호는 <흑수선>(배창호, 2001)에 이어 <가문의 영광> 그리고 드라마 <아이리스>(2009)까지 정 대표와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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