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스크린]사랑이… 변한다: <봄날은 간다>(허진호, 2001) 월간스크린 ㉕ 한국영화 현장 기행

by.김형석(영화저널리스트, 전 스크린 편집장) 2019-03-18조회 7,030
봄날은 간다 스틸

2001년 | 싸이더스

감독: 허진호 | 각본: 류장하 이숙연 신준호 허진호 | 제작: 차승재 진가신 히데시 미야지마 | 촬영: 김형구 | 미술: 박일현 | 음악: 조성우

CAST 상우: 유지태 | 은수: 이영애 | 할머니: 백성희 | 아버지: 박인환 | 고모: 신신애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2001)는 그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1998)과 함께 한국의 멜로, 로맨스 장르를 이야기할 때 영원히 언급될 작품입니다. “사랑이 변하니…” “라면 먹고 갈래요?” 같은 대사들의 일상적 울림과 함께, 이 영화는 ‘연애’라는 관계에 깃들어 있는 씁쓸한 감정들을 리얼하게 드러냅니다. 
 
 
현장 공개는 2001년 여름에 있었습니다. 상우(유지태)가 은수(이영애)에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말하는 바로 그 장면이었죠. 묵호시 삼본아파트 앞, 해안도로와 바다가 함께 하는 그곳. 버스에서 내린 은수는 상우에게 다가가 이별의 말을 전합니다. 현장은 너무나 조용했는데요, 가끔 새 소리나 동네 아낙들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습니다.
 
 “우리 헤어지자.” “내가 잘할게.” “헤어져.” “너 나 사랑하니? (침묵) 사랑이 변하니… (침묵) 헤어지자…” 연인이 이별하는 일반적인 장면이지만, 그 감정을 영화에서 제대로 표현하는 건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허진호 감독은 ‘숏-리버스 숏’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나누지 않고 하나의 테이크를 사용합니다. “두 사람의 시간이 실시간으로 한 번에 진행될 때와, 시간을 잘라서 붙여 놓았을 때는 굉장히 다른 느낌이에요. 난 전자의 느낌이 더 좋았어요.”
 
 
이 영화의 카메라는 김형구 촬영감독(맨 오른쪽)이 잡았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작인데요, 김형구 촬영감독은 유 감독님의 촬영부 출신이었죠. 허진호 감독은 현장에서 스스로를 “헤매는 스타일”이라고 말하는데요, “설명도 안 하고, OK 사인도 잘 안 주고 그러는데, 스태프들이 많이 이해해주었다”고 고마움을 전합니다.
 
 
은수는 사랑에 대해 다소 냉소적인, 어쩌면 사랑을 믿지 않는 인물입니다. 이영애는 이렇게 말합니다. “감독님은 물론 배우와 스태프를 통틀어서 아무도 은수에 대해 똑 부러지게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뭐라고 한마디로 말하기가 참 어려운 인물이에요. 하지만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인물이기도 하고요.”
 
 
버스 안 현장 모습입니다. 모자를 쓴 허진호 감독 뒤로 류장하 조감독이 보입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는데요, <8월의 크리스마스> 조감독이기도 했죠. 2004년엔 <꽃피는 봄이 오면>으로 감독 데뷔했고 <순정만화>(2008) <더 펜션>(2018) 등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9년 2월 3일에 5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시 한번 감독님의 명복을 빕니다.
 
 
두 배우의 연기를 허진호 감독이 미소 지으며 보고 있네요. 이영애는 자신과 유지태와 허진호 감독의 성격이 비슷했고, 그래서 현장에서 잘 맞았다고 하네요. 한편 허진호 감독은 “과연 사랑은 변할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게 다 변하는 것 같아요. 그게 나쁜 것도 아닌 것 같고. 사람 자체가 변하는 것 같아요. 자신의 모습을 지키려는 것도 좋지만, 변해가는 것에 대해 집착하고 붙잡으려 한다면 행복해지는 데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허진호 감독은 은수라는 캐릭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은수도 혼자 있을 때는 힘들어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겠죠. 하지만 누군가가 곁에 있을 때는 활발하고 자기중심적이 되는 여자예요. 그래서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상우는 사랑을 처음 해보는 거니까 사랑이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은수는 사랑이 없어지면 사랑했다는 사실조차 부정해버릴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에요.” 
 

유지태는 <봄날은 간다>가 자신에게 “일종의 실험”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스럽게’ 채워나가는 느낌의 연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도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자연스러움’을 경계해야 했고요.
 
유지태는 <봄날은 간다>의 감정 연기가 조금은 달랐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진짜 감정을 다루니까요.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졌다고 정말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하고 슬퍼하진 않잖아요. 실제로는 직장에 나가 일도 하고 그러죠. 영화 속에서 상우가 은수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는 신이 있는데, 속으로는 슬프고 힘들지만 둘 다 겉으로는 슬퍼하지 않아요. 그런 내재된 슬픔이 보는 사람에게 전이될 수 있는 영화가 <봄날은 간다>라고 생각해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이영애는 “슬펐다”며, 그래도 좋았던 건 ‘소리’였다고 합니다. “평소 자연의 소리에 민감한 편이었고 관심도 많았기에 소리를 채집하는 사람들이라는 설정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죠.” 한편 유지태는 “멜로 영화 같지 않다”는 게 첫인상이었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슬픔을 다룬 영화거든요. 누구나 슬픔이 있잖아요. 사랑하고, 헤어지고, 잊혀지는 슬픔.”
 
 
“이 신에선 상우가 화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거 아냐? 은수가 나가니까 좀 이상한데.”(허진호) “그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가 아닐까요?”(이영애) “그럼 이번엔 제가 나가는 걸로 한 번 해볼게요.”(유지태) 세 사람은 하나의 테이크가 끝나면 마치 오누이들처럼 소곤소곤 모니터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다음 테이크를 준비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이별 장면은 쉴 새 없이 변했는데요, 은수가 상우에게 악수를 청하기도 하고, 상우가 그 손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대사를 빼기도 하고, 은수와 상우가 번갈아 가며 화면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그렇게 10번이 넘는 테이크가 이어졌습니다. 허진호 감독은 <봄날은 간다>에서 되도록이면 설정하지 않고, 콘티도 만들지 않고, 상황만 던져준 채 배우들과 함께 만들어나가는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습니다.
 
   
각자 포커스를 달리한 두 배우의 투 숏입니다. 허진호 감독은 유지태의 첫인상을 ‘맑다’라는 형용사로 표현하는데요, 촬영 전에 상우는 어떤 사람일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영애는 첫 만남부터 조금 남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하네요. <선물>(오기환, 2001) 현장에서 바로 올라왔는데, 공항인가 역 화장실에서 막 세수를 한 맨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허진호 감독은 유지태에서 “물이 안 채워진 유리잔처럼 배우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빈 잔에 물이 조금씩 채워져서 찰랑찰랑 넘칠 때쯤 영화가 개봉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백지상태에서 함께 조금씩 그림을 그려나가길 바라셨던 거죠.”
 
 
<봄날은 간다>는 한국의 싸이더스의 홍콩의 어플라우즈 픽쳐스와 일본의 쇼치쿠가 공동 제작한 영화입니다. 제작 발표회에서 각국 제작진과 배우, 감독이 함께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맨 오른쪽에 홍콩의 제작자인 진가신 감독이 보이네요.
 
 
<봄날은 간다>는 “소리를 채집하는 사운드 엔지니어의 이야기”라는 설정에서 발전한 영화입니다. 그러면서 작가들과 영화사 기획실 사람들의 연애담들이 하나둘씩 보태졌고, 그렇게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8월의 크리스마스>에 비하면 <봄날은 간다>는 훨씬 더 거칠고 현실적이며 기복이 큰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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