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가을에 공개된 현장은 봉수(설경구)와 원주(전도연)이 민방위 훈련으로 텅 빈 거리를 뛰는 장면입니다. 은행원인 봉수는 빨리 직장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 은행 건너편 보습학원 선생님인 원주를 우연히 만난 봉수는, 갑자기 원주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합니다. 촬영은 수원시 정자동의 어느 도로에서 이뤄졌는데요, 촬영을 통해 교통 통제가 이뤄졌습니다.
평소에 안면은 있지만 결정적 모멘트는 없었던 두 사람에게, 어쩌면 갑작스러운 ‘손 잡고 달리기’는 어떤 사건일 수도 있었겠죠. 혹은 제대로 된 연애는 한 번도 못 해본 봉수가, 나름의 스타일로 프러포즈를 한 것일 수도 있고요. 촬영을 위한 교통 통제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두 배우는 100미터 정도 되는 동선을 끊임없이 뛰고 또 뛰어야 했습니다. 대여섯 번은 뛰었던 것 같은데요, 전도연은 굽 있는 신발을 신고도 온 힘을 다해 도로를 질주했습니다. 그리고 건너편에선 박흥식 감독이 사인을 줍니다. “둘에 뛰면 돼. 하나, 둘!”
박흥식 감독과 전도연의 인연은 이 영화에서 시작되어 <
인어공주>(2004) <
협녀, 칼의 기억>(2015)로 이어집니다.
영화아카데미 출신이며
박광수 감독의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허진호 감독의 <
8월의 크리스마스>(1998) 연출부를 거친 박흥식 감독은 이 영화를 위해 100여 명의 결혼 적령기 남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결혼에 관해 한때 굉장히 깊이 생각했었다. 주변에서 연애나 결혼한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사실 한결같이 재미가 없다. 그래도 누구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가지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괜히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게 된다. 그런 감정의 달라짐을 포착하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로맨틱 코미디의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느낌의 디테일’에 대한 영화입니다.
평범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트랙이나 크레인 같은 장비가 동원되었습니다. 지난 번 <
품행제로>(조근식, 2002)
포스팅 때 언급했던 조용규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잡았습니다.
이창동 감독에게 시나리오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상황에서, 박흥식 감독을 직접 만난 설경구는 감독에게 느꼈던 좋은 느낌만으로 시나리오도 안 읽고 출연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나이가 서른여섯 살인가 되는 감독이 꼭 미소년 같았죠. 영화가 그대로 나올 것 같았어요.” 그리고 현장에선 최소한의 정보만 듣고 찍었다고 하네요. “그냥 그대로 찍었어요. 시나리오에 없는 설정이라도 웃음이 나오면 웃고, 얼굴이 가려우면 긁어가면서.”
강렬했던 <
해피엔드>(
정지우, 1999) 이후 9개월 정도 쉬면서 전도연은 우울증을 겪었다고 하네요. 이때 만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시나리오는 너무나 재미있게 술술 읽혔고, 큰 고민 없이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원주는 실제로 제 모습과 많이 비슷해요. 전 영화 밖에서는 정말 평범하거든요. 그래서 최대한 전도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려 했고 힘들진 않았어요.” 그리고 상대역인 설경구에 대해선 “<
박하사탕>(이창동. 2000) 보면서 솔직히 무섭고 소름이 끼쳤는데, 알고 보니 소박하고 털털하고 배려가 많은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 영화 이후 17년 만에 개봉 예정작인 <
생일>(
이종언, 2018)에서 재회하게 됩니다.
취재진과 감독 배우 사이의 간담회는, 도로 한 구석에서 이뤄졌습니다.
“액션!” 소리에 뛰기 시작하고 “컷!” 사인에 멈추기를 반복하는 두 배우. 그들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겉으로는 밝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지만 혼자 있을 땐 외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 재미있지만 씁쓸하기도 한 영화. 그리고 ‘자연인 설경구’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영화.”(설경구)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람에게도 이중적인 면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 외향적인 면도 있고, 내성적인 면도 있고, 그런 입체적인 면을 지닌 사람들이 만나 만드는 따뜻한 이야기.” 그리고 박흥식 감독은 두 배우에 대한 믿음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캐스팅 할 때 다른 배우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전도연과 설경구는 스타이긴 하지만 배우라는 레테르만 빼면 보통 사람 같은 면이 가장 많은 배우들이다. 이 영화에선 무엇보다 배우들의 힘이 컸다. 난 디테일에만 신경 썼고. 슛 들어가기 전에 두 사람의 자연스런 말투와 행동들을 관찰하면서 캐릭터에 반영해나갔다.”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