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 싸이더스
감독:
이현승 | 각본:
여지나 | 제작:
차승재 | 촬영:
홍경표 | 미술:
김기철 | 음악:
김현철 | 무술감독:
정두홍
CAST
성현:
이정재 | 은주:
전지현 | 한 교수:
김무생 | 재혁:
조승연
2000년대 초, ‘시간’은 한국영화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습니다. 1990년대 말부터 강세를 띠기 시작했던 멜로와 로맨스 장르의 흐름 속에서, ‘시간 판타지’의 상상력이 발휘된 영화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한 거죠. 여기에 환생이나 소울메이트 같은 모티브가 결합되면서, 잠깐이었지만 한국영화는 낯선 사랑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현승 감독의 <시월애>는 이런 트렌드를 대표하는 영화입니다. 1997년의 남자 성현(이정재)과 1999년의 여자 은주(전지현). 그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편지로 사랑을 나눕니다.
2000년 5월 말 공개된 <시월애>의 현장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 석모도. 그곳 해변에 지어진 집 한 채. 영화 속에서 두 주인공이 2년의 시간차를 두고 사는 집인 ‘일 마레’(Il Mare). 이탈리아어로 ‘바다’라는 뜻이죠.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이 세트는 디자인도 중요했지만, 갯벌을 다지는 지반 공사를 해야 했기에 2억 원이라는 제작비가 든 ‘작품’입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날 촬영에서 가장 공들인 부분은 원형 트래킹 신이었습니다. 우편함을 가운데 놓고 성현과 은주가 시간을 뛰어넘어 만난다는 설정인데요, 마치 두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가 회전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원형 트래킹 카메라 워크를 썼습니다. 덕분에 촬영 스태프들은 카메라에 걸리지 않으려 몸을 최대한 낮춰야 했죠. 우편함 앞에 선 성현과 은주를 각각 촬영한 후 두 사람을 함께 촬영해 합성합니다. 설명이 조금 복잡한데요, 영화로 보시면 어떤 비주얼인지 쉽게 아실 수 있습니다.
햇살이 제법 따가운 초여름이었지만, 영화의 배경 탓에 배우들은 겨울 옷을 입고 구슬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현장의 이정재와 이현승 감독입니다. 연기 지도라기보다는, 촬영 중간중간에 ‘일 마레’ 앞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촬영을 맡은 홍경표 촬영감독입니다. 당시 그는 충무로에서 가장 ‘핫’한 촬영감독이었죠. <
유령>(
민병천, 1999)의 특수촬영, <
반칙왕>(
김지운, 2000)의 역동적 카메라워크 등으로 주목 받았는데요, <시월애>에선 사뭇 다른 장르에 도전에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매력적인 배우들과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었지만, 영화 <시월애>에서 관객들이 느낀 가장 큰 매력은 공간과 풍경이 만들어낸 비주얼의 감성적 느낌이었겠죠. “컷!” 사인이 떨어지면, 감독과 스태프와 배우가 모니터 앞에 모여 ‘그림’을 확인합니다.
원래 시나리오엔 전원 주택 스타일이었지만, 이현승 감독은 쓸쓸하고 고독한 느낌을 원했고 그 결과 ‘일 마레’가 탄생했습니다. 갯벌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에 반대도 많았지만, 감독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죠. 집의 구조도 독특한데요, ‘현실’이라는 땅으로 나오기 위해선 긴 다리를 거쳐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아무튼 ‘일 마레’는 단순한 집이 아니라 영화를 풍부하게 만들어준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공간도 연기를 하는 셈이었죠.
여름의 촬영을 마치고 9월 9일 개봉을 앞둔 가을의 어느 날 <시월애>의 시사가 있었습니다. 사진은 시사 후 기자 간담회 때 이현승 감독의 모습인데요, 그 장소는 인사동의 이탈리아 레스토랑 ‘일 마레’였습니다. <시월애>는 <
그대 안의 블루>(1992) <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1995)에 이은 세 번째 영화이며, 처음으로 자신이 쓰지 않은 시나리오로 찍은 작품이었습니다. 감독이 시나리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외로운 사람들’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는 점이었다고 합니다.
전지현과 이정재입니다. 당시 이정재는 <
이재수의 난>(
박광수. 1999)를 마치고 2000년에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며 한 해에만 세 편의 멜로를 내놓습니다. <
인터뷰>(
변혁, 2000) <시월애> 그리고 <
순애보>(
이재용, 2000)죠. 한편 <시월애>는 전지현의 두 번째 영화였는데요, 스무 살 시절의 모습이 반갑네요.
“저 같으면 은주처럼 과거의 사랑으로 괴로워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롭게 다가오는 사랑을 택했을 거예요.”(전지현) “성현과 은주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고, 그냥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연결되는 관계예요. 그런 상황에서 사랑의 감정을 어떻게 잡아낼까, 이 부분이 참 어려웠어요.”(이정재)
이현승 감독은 언제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대 안의 블루>와 <네온 속으로 노을 지다>에 이어 <시월애>도 마찬가지였죠.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일과 사랑’이나 ‘결혼’ 같은 페미니즘적 테마에서 조금 거리를 두었다는 점인데요, 은주는 아직은 세상과 많은 갈등을 겪지 않은, 대신 사랑의 감정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감정의 흔들림을 겪는 캐릭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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