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 현장 공개는 2002년 10월에 있었습니다. 해남 땅끝 마을이었는데요, 영화에선 30초 조금 넘게 나오는 단 두 컷을 위해 수십 명의 제작진이 그 먼 곳까지 간 거였죠. 취재진이 아침 일찍 광화문에서 모여서 현장까지 가는 데 5시간 가까이 걸렸던 걸로 기억 납니다. <살인의 추억>은 촬영을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뒤졌는데요, 그 중 ‘끝판왕’이 바로 땅끝 마을 촬영이었던 것 같습니다. 현장 취재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한 후에 서울에 도착했을 땐 자정이 넘었던걸로 기억납니다.
먼 길을 가긴 했지만, 공개된 장면은 간단합니다. 서태윤(김상경)은 갈대밭에 사체가 있을 거로 예측합니다. 서류는 거짓말을 안 하니까요. 그래서 대규모 수색을 벌이지만, 박두만(송강호)과 조용구(김뢰하)는 길 한 켠에 차를 세우고 실뜨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서태윤과 박두만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장면이죠.
간단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슈퍼크레인을 사용한 이 장면의 촬영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컷을 끊지 않고 하나의 테이크 안에 그 모든 상황을 담아야 했기 때문이죠. 감독들에게 여러 스타일이 있지만, 현장에서 봉준호 감독은 마치 친절한 선생님 같았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조목조목 설명합니다. 범죄영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아마도 데뷔작인 <
플란다스의 개>(2000)부터 시작됐을 텐데요, <살인의 추억>에 대해선 “1980년대를 재현하되 기억에 의존한 묘사가 되기를, 그래서 현재와의 거리감은 더 증폭되기를 원한다.”고 밝혔습니다.
현장의 든든한 베테랑, 김형구 촬영감독과
이강산 조명기사입니다. 두 분의 파트너십은
김성수 감독의 영화에서 빛을 발했는데요. 단편 <
비명도시>(1993)부터 시작해 <
비트>(1997) <
태양은 없다>(2000) <
무사>(2001) <
영어완전정복>(2003)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
괴물>도 두 장인의 콜라보였고요. <
아름다운 시절>(
이광모, 1998) <
박하사탕>(
이창동, 2000) <
봄날은 간다>(
허진호, 2001) <
역도산>(
송해성, 2004) 등도 김형구-이강산의 작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강산 조명기사는 2006년 52세의 젊은 나이에, <괴물>을 유작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인의 추억> 현장엔 외국인 스태프가 있었습니다. 조명부의 무라치 히데키 씨는 <
8월의 크리스마스>(1998. 허진호)를 보고 한국영화에 매료되었고, 30대 중반의 나이에 <살인의 추억> 현장까지 이르렀습니다.
실뜨기는 원래 시나리오엔 없었던 부분인데, 촬영 당일 아침 봉준호 감독이 설정했습니다. 그래서 배우들은 틈나는 대로 실뜨기를 연습했는데요, 여기엔 김상경도 가세해 선배 김뢰하에게 실뜨기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날 김형구 촬영감독은 거의 온종일 크레인 위에 있어야 했습니다. 유려한 카메라로 갈대밭을 훑어 내려가는 컨셉트 때문이었죠. 한편 키 큰 갈대밭 때문에 슬레이트 치는 게 쉽지 않았는데요, 갈대밭 높이 때문에 전경으로 등장하는 엑스트라도 175cm가 넘는 사람들로만 동원해야 했습니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살인의 추억>엔 당시의 물건들이 꼼꼼하게 등장합니다. 경찰차는 대우 맵시 차종입니다. 그리고 전경 버스 내부의 모습입니다.
새삼 놀라운 건, <살인의 추억>은 김상경의 ‘겨우’ 두 번째 영화라는 점이죠. 첫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
생활의 발견>(2002)이었는데요, <살인의 추억>을 추천해준 사람이 바로 홍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김상경에게 봉준호 감독 한번 만나 보라며 “<살인의 추억>이 네 두 번째 영화로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네요.
영화에선 송강호가 선배 형사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김뢰하가 선배입니다. 한편 이날 촬영 때 김뢰하는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는데요, 실뜨기 장면을 잘 보시면 조용구 형사가 사탕을 먹고 있는 걸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당시 계속 당을 섭취해야 했던 김뢰하의 몸 상태 때문에 만들어낸 영화적 설정이었다고 하네요.
늦가을은 꽤 일찍 해가 떨어지는 계절입니다. 아직 촬영 분량이 남았는데, 서서히 석양이 지고 있습니다.
갈대밭 쪽에서 뭔가 찾았다는 고함 소리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립니다. 실뜨기를 하던 두 사람은 일어서서 그쪽을 바라봅니다. 또 한 명의 희생자, 독고현순의 발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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