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스크린]바람 불어 힘든 날: <고양이를 부탁해>(정재은, 2001) 월간 스크린⑦ - 한국영화 현장 기행

by.김형석(영화저널리스트, 전 스크린 편집장) 2018-12-05조회 10,497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

2001년 | 마술피리

감독, 시나리오: 정재은 | 제작: 오기민 | 촬영: 최영환 | 프로덕션 디자인: 김진철 | 음악: 조성우

CAST
태희: 배두나 | 혜주: 이요원 | 지영: 옥지영 | 비류: 이은실 | 온조: 이은주

2000년대 초 한국영화를 꼼꼼히 살펴보면, 의외의 작품들이 눈에 띕니다. 여기서 ‘의외’라는 건 산업적인 의미입니다. 요즘 같으면 독립영화나 저예산 영화 안에서 제작될 법한 아이템이 메인 스트림 안에서도 제작되곤 했다는 거죠. <고양이를 부탁해>가 그렇습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섯 명의 ‘스무 살 여성’들이 세상과 맞닥트리는 이야기. <여고괴담>(박기형, 1998)의 오기민 프로듀서가 설립한 ‘마술피리’의 창립작인 이 영화는 당시 충무로 규모 있는 투자사 중 한 곳인 아이픽쳐스의 자본으로 제작되었고, 메이저였던 시네마서비스가 배급을 맡았던 작품입니다.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

아직은 조금 쌀쌀한 2001년 3월의 어느 날, <고양이를 부탁해> 촬영 현장 공개가 있었습니다. 장소는 인천 월미도. 태희와 혜주와 지영과 쌍둥이 자매인 비류와 온조. 다섯 친구가 오랜만에 모이는 장면이죠. 버스를 타고 월미도에서 동대문 의류 상가로 이동하는 그들. 하지만 마침 불어오는 거센 바닷바람 앞에서 친구들은 옷깃을 꼭 여며야 했는데요, 그 바람은 마치 이 청춘들이 장차 겪게 될 현실이라는 거센 바람처럼 느껴집니다.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

물론 그 바람은 실제는 아니었습니다. 대형 강풍기가 만들어내는 바람 앞에서 배우들은 ‘바람 맞는 연기’를 했습니다.

정재은 감독

<고양이를 부탁해>는 정재은 감독의 첫 장편영화입니다. 영상원 출신인 그는 <도형일기>(1997) <둘의 밤>(1999) 등의 단편으로 각광 받았고,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김태용/민규동, 1999)의 스크립터로 충무로에 진입한 지 2년 만에 자신의 장편영화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제작자인 오기민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프로듀서이기도 했죠.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30대 초반의 여성 감독은 흔하지 않았죠. 그런 이유로 정재은 감독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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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부탁해> 현장의 고유한 분위기는, 모니터 확인 시간입니다. 감독과 주연배우 다섯 명이 모두 여성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모니터 앞에서 친구들이 옹기종기 친구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매우 정다웠습니다.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

<고양이를 부탁해>는 정재은 감독에게만 첫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최영환 촬영감독에게 <고양이를 부탁해>는 오롯이 혼자 촬영을 책임져야 하는 첫 영화였습니다. 역시 감독처럼 30대 초반의 나이였는데요, 이후 최영환 촬영감독은 <피도 눈물도 없이>(류승완, 2002) <범죄의 재구성>(최동훈, 2004) <타짜>(최동훈, 2006) <세븐 데이즈>(원신연, 2007) <전우치>(최동훈, 2009) <베를린>(류승완, 2012) <도둑들>(최동훈, 2012) <국제시장>(윤제균, 2014) <베테랑>(류승완, 2014) <살인자의 기억법>(원신연, 2016) 등의 카메라를 잡습니다.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

서울에서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인천 월미도까지 온 혜주(이요원)은 쌍둥이 자매인 비류(이은실)와 온조(이은주)를 발견합니다. 인형 뽑기에 빠져 있는 자매. 이미 적잖은 인형을 뽑았는데요, 이 장면을 위해 마련한 소품이 아니라 진짜로 뽑은 거라고 하네요. 이재용 감독의 <순애보>(2000)에서도 역시 쌍둥이 자매로 데뷔한 이은실, 이은주 자매는 이 영화에서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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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주는 오랜만에 만난 지영(옥지영)에게 염색이 촌스럽다며, 집에서 혼자 한 거 아니냐며, 타박을 합니다.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

배가 지나가면서 내는 소리 때문에 촬영은 잠깐씩 중단되곤 했습니다.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

드디어 약속 장소에 다섯 명의 친구가 다 모였습니다. 한편 <고양이를 부탁해> 현장이 조금 독특했던 건, 한국영화 최초로 전문 조감독제가 도입되었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도제 시스템에선 조감독은 감독으로 가기 위한 통로이고, 연출부에서도 퍼스트, 세컨드, 써드 등으로 위계가 형성되어 있죠. 하지만 전문 조감독은 감독에 종속된 직책이 아닙니다. 감독과 수평적 입장에서 자신의 업무를 수행합니다.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

지금은 ‘옥고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옥지영에게 <고양이를 부탁해>는 첫 영화였습니다. 패션 모델 출신인 그녀는, 자신의 실제 이름과 같은 ‘지영’이라는 캐릭터를 섬세하게 표현했죠. 이 영화로 배두나, 이요원과 함께 춘사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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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배두나는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한창 주목 받던 라이징 청춘 스타였습니다. 2000년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로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했던 그녀는, <고양이를 부탁해>를 통해 한 뼘 더 캐릭터의 영역을 넓혔죠. 특유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순수하고 꿈꾸는 듯한 이미지가 황금비율로 섞인 캐릭터가 바로 ‘태희’였습니다. 배두나는 이 캐릭터로 백상예술대상과 춘사영화제와 부산 영평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합니다.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

<고양이를 부탁해>는 이요원이 영화에 안착할 수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그녀가 받았던 네 개의 영화상, 즉 백상예술대상과 디렉터스컷 시상식과 청룡영화상의 신인여우상, 그리고 춘사영화상의 여우주연상은 모두 <고양이를 부탁해> 덕분이었습니다.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

호기심 많고 꿈 많은 태희(배두나), 현실적인 혜주, 약간은 어둡고 세상에 냉소적인 지영, 굳건한 자매애로 알콩달콩 살아가는 비류와 온조. <고양이를 부탁해>는 이 다섯 친구가 세상과 드디어 대면하는, 바로 그 시간에 대한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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