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너머의 삶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벤자민 리, 2024)

by.김영글(미술작가) 2025-02-11조회 674


나는 게임을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어떤 게임에는 마음이 많이 붙들린다. 십여 년 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를 할 때도 그랬다. 피시방에서 나는 고민과 불만이 많은 청년 예술가이기를 잠시 멈추고 무쇠 갑옷을 입은 늑대인간으로 변신했다. 로그인을 하고 가상의 세상으로 진입하면 잠깐이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물론 그 안에도 현실 세상과 비슷한 생존의 법칙이 존재했다. 미션을 수행하고, 전략을 짜고, 경쟁이나 싸움에서 이겨야만 능력치가 올라가고 돈도 많아졌다.

하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게임 속 마을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그래픽 풍경을 구경하곤 했다. 그리핀 등에 올라타고 날아다니는 게 가장 좋았다. 던모로에서 엘윈 숲까지, 엘윈 숲에서 모단 호수까지, 쓸데없이 이동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니면 스크롤을 상하좌우로 돌리면서 호젓한 호숫가를 마냥 거닐었다. 사람들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려고 게임에 몰입한다는데, 나는 화면 속에서 게임으로부터도 도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름의 위안을 얻었다.

레벨업도 제대로 못(안) 하고 그만둔 게임이지만, 나에게도 한 시절의 추억이 남은 터였다. 와우를 다룬 다큐멘터리라고 하니 안 볼 도리가 없었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벤자민 리, 2024)을 홍보하며 넷플릭스는 여러 개의 공식 포스터를 띄웠는데, 그중 한 포스터가 영화의 핵심을 절묘하게 함축하는 듯해 눈길을 끌었다. 포스터를 가득 채운 것은 영화의 주인공인 노르웨이 청년 마츠의 얼굴인데, 절반은 현실의 얼굴이고, 나머지 절반은 픽셀이 깨어지듯 애니메이션으로 변환된 게임 속 캐릭터의 얼굴이다. 
 

마츠는 희귀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다. 뒤셴 근이영양증이라는 퇴행성 질환으로, 근육이 서서히 줄면서 신체 기능을 잃어가는 병이었다. 또래보다 발달 속도가 느리고 자주 넘어지는 아이였던 마츠는 하나씩 보조 장치가 늘어가다 열 살이 되기도 전에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누릴 수 있는 것이 얼마 없던 어린 시절, 마츠의 부모님은 게임을 마음껏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준 게임이 바로 와우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어려워진 스물다섯 살의 어느 날, 마츠는 조용히 숨을 거둔다. 마츠의 가족은 그가 운영하던 블로그에 짧은 부고를 올린다. 그러자 놀랍게도 수많은 친구로부터 애도의 메시지가 쏟아진다. 그들은 마츠를 ‘이벨린’이라는 캐릭터 이름으로 불렀다. 스크린 너머에는 마츠의 가족이 전혀 모르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와우와 같은 롤플레잉 게임은 길드라고 불리는 커뮤니티에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게임을 하는데, 마츠는 자신의 길드에서 늘 사람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문제가 있으면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해결사라 불렸고, 로맨티스트라고도 불렸다. 마츠 스테인, 아니 이벨린 레드무어의 활약담을 들으며, 마츠의 부모는 놀라워한다. 육체의 한계 속에 고립된 아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을 늘 안타깝게 여겨왔는데, 스크린 너머에서는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달리고, 우정을 쌓고, 연애하고, 다투기도 하며 살았던 것이다.
 

영화는 게임을 해로운 것으로 손쉽게 규정하는 세상의 편견에 정면으로 응답한다. 중증 장애인은 물론이고 사회와의 대면에서 다양한 종류의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게임은 분명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출입문이 될 수 있다. 경쟁이나 현실 도피가 아닌 주체적 개입과 나눔으로서의 게임, 몸의 확장으로 기능하는 가상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게임의 사회적 가치나 치유의 능력을 그저 입증하는 것, 그보다는 훨씬 복잡다단한 질문들 속에 마츠(혹은 이벨린)의 세계는 놓여있었다.

이 영화에는 여러 종류의 스크린이 등장한다. 먼저, 마츠의 죽음 이후 촬영된 가족과 지인의 인터뷰 영상이 있다. 현재 시점의 이 영상들은 창가의 액자 속 사진으로 남은 마츠의 얼굴, 정지된 마츠의 삶을 과거형으로 서술하는 회고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마츠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1989년 어느 날로부터 시작하는, 과거 영상의 인용이 있다.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는 아기 마츠의 모습, 조랑말 인형을 선물 받는 모습, 종종걸음으로 걷다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 조금 느려진 걸음으로 등교하던 모습, 수영장에서 아버지의 등에 업힌 모습, 가족여행이 있던 날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 이 화면들은 대부분 가족이 촬영한 홈비디오로, 마츠의 짧은 인생을 찬찬히 훑는다. 애정과 근심이 묻어나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거칠게 요약되는 것은 점차 움직임이 없어지고 무기력해지는 퇴행성 근육 질환 장애인의 생애이다.

한편, 이 다큐멘터리는 남겨진 ‘데이터’를 통해 카메라가 찍을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을 마츠의 시선으로 재구성한다. 마츠가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온라인에서 보낸 시간은 약 2만 시간에 달한다. 그는 블로그에 많은 일기를 남겼고, 그가 속한 길드 ‘스타라이트’는 4만 2천여 쪽에 달하는 게임 내 채팅과 유저 로그 기록을 보관하고 있었다.

영화는 주인공 사후에 제작되는 인물 다큐멘터리가 지닌 한계와 가능성의 새로운 국면을 실험한다. 온라인상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게임 그래픽 애니메이션으로 고스란히 ‘재연(再演)’될 때, 그 가상의 ‘재현(再現)’이 가져오는 구체성과 생동감은 실로 감동적이다. 그렇게, 마츠는 자신의 이야기를 새로이 쓸 수 있었다.

더불어 그 다시-쓰기는 영화가 제시하는 다른 화면들을 다시-읽게끔 만든다. 마츠가 남긴 일기로 재구성된 내레이션은 홈비디오 화면 속 말 없는 마츠의 속마음을 훑는다(그는 얼마나 위트 넘치는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마츠가 얼마나 다정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는가를 들려주는 온라인 친구들의 이메일 내용만큼이나, 그 컴퓨터 스크린에 비친 마츠 부모님의 얼굴에 집중하게 된다. 스크린들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 사이, 인물과 인물 사이로 틈입하며, 서로 간섭을 일으킨다. 겹겹의 진실이 우리 삶의 무대를 구성하고 있음을 드러내며, 영화는 ‘진짜 삶’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마츠는 근육이 퇴화하는 와중에도 특별히 주문 제작한 장비 덕분에 게임을 할 수 있었다. 낙관적인 사람이라면 이 다큐가 기술에 대한 경외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의 제공과 기술에의 의지가 누구나의 삶에서 양립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며, 접근 가능한 기술 위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획득한 것은 마츠 스스로의 노력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고작 0과 1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데이터의 더미 속에서 누군가는 범죄를 도모하지만, 또 누군가는 어떻게든 삶이라는 것을 구성해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것은 분명 자신의 생애가 어떤 기록으로 쓰일 것인가를 마츠가 미리 고민한 결과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 시점에, 마츠는 블로그 비밀번호를 남기고, 비밀리에 방안에다 카메라를 설치하도록 요청했던 것 같다. 덕분에 죽음에 가까워지는 몸으로 마츠가 살아낸 컴퓨터 앞에서의 마지막 생애 또한 기록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스크린 너머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에 부치는 경배이면서, 동시에 ‘마츠의 비범한 인생’에 관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비범함과 평범함이라는 관념의 줄다리기 속에서 주인공을 영웅화하지도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지도 않는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그럼에도, 마츠가 게임에 접속한 다음 늘 30분가량 정해진 코스를 달렸다는 대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먹먹해진다. 그건 그냥 산책길이 아니다. 꽃사슴과 회색늑대와 익룡이 함께 노니는, 영원히 닳지 않는 길이다. 마츠는 영원히 늙지 않는 몸으로, 지치지 않는 다리로 그 길을 달렸다. 하지만 그 길에 진입하기 위해 화면을 켜고, 정성 들여 만든 이벨린의 삶으로 로그인하는 매일의 루틴을, 어떻게 가상이라는 한 마디 단어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마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건 “단순한 스크린”이 아니었다.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영혼이 향하는 “하나의 관문”이었다.

와우 개발팀은 마츠를 기리기 위해 ‘레벤 꾸러미’라는 아이템에서 생기는 수익 전액을 근이영양증 환자 지원 단체인 큐어뒤셴에 기부하고 있으며, 게임 안에 이벨린의 묘비를 설치했다. 이벨린은 그가 자주 가던 엘윈 숲에 위치한 수정 호수에 묻혀 있다. 와우 유저라면 누구나 참배할 수 있다. 좌표는 49, 65, 7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속 아이템 레벤과 마츠(이벨린) 추모비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A Life Rich with Community and Connection through World of Warcraft”, Cure Duchenne



김영글(미술작가) l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과 출판을 아우르며 활동한다. 허구와 사실의 관계,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에 집중하며,
주로 이야기를 새롭게 직조하면서 역사적ㆍ사적 자료의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를 시도하는 작업을 해왔다.
『사로잡힌 돌』(2024),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2021), 『모나미 153 연대기』(2019) 등의 책을 썼고, 
주요 영상 작업으로 <파란 나라>(2019), <해마 찾기>(2016)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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