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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백>(오시야마 키요타카, 2024)은 뒷모습에 관한 영화다. 올해의 영화 리스트에 넣긴 난망한, 60분도 채 되지 않는 애니메이션. 그래서 사사로운 리스트에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이 작품을 되새기며 2024년을 되돌아본다. 2024년 극장가의 침체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크고 작은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생존을 위한 절박함은 때론 예상 밖의 가능성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2024년 극장가의 뒷모습을 보면 세 가지 두드러진 변화가 눈에 띈다. 우선 암울한 소식부터 꼽자면 공연 실황 영화가 늘었다. 예전에는 단발성 이벤트에 가까웠던 공연 실황이 이제는 정기적인 하나의 장르처럼 자리 잡았다. 이걸 ‘영화’라고 지칭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지만 극장이 중심이 되는 상영 콘텐츠라는 점에서 논의를 피해 갈 수 없는 변화임에는 분명하다.
두 번째는 재개봉 영화들의 정기적인 개봉이다. 신작 위주의 시스템에서 이제 과거 영화들이 개봉 리스트에 걸려 있는 것이 당연한 풍경이 됐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어느덧 극장은 과거의 비디오 숍이나 초창기 OTT 플랫폼을 닮아가는 것 같다. 신작 경쟁에 열을 올리는 건 오히려 OTT 쪽이고 극장은 이제 제작 시기와는 상관없는 공간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아카이빙에 일정 부분 자리를 할애한 극장에 대한 인식 자체가 변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까지 내몰린 건 신작의 축소와 경쟁력 약화 때문임이 분명하지만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이 풍경 자체기 그리 부정적으로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세 가지 풍경은 각각 우려와 가능성 그리고 희망을 품고 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희망의 풍경은 작은 영화들의 개봉이다. 다양성의 포용이라 해도 좋겠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 본 기억은 20년을 훌쩍 거슬러 올라간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
4월 이야기>(이와이 슌지, 1998)를 보고 나왔을 때 주변 반응이 아직 기억에 선명하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 이전에 짧은 상영시간에 대한 당혹감이 넘쳐 났던 당시를 생각해보면 당시 극장이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에 얼마나 폐쇄적이었는지 넉넉히 짐작 가능하다. 오시야마 키요타카 감독의 애니메이션 <룩백>은 그동안 한국의 극장 환경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증명하는 좋은 척도라 할만하다. 60분 남짓의 소품 같은 애니메이션이 이렇게 빠르게 정식 개봉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이제는 <룩백>과 같은 형태의 개봉이 이상한 일이 아닌 상황이 됐다. 지금 극장에는 수요만 있다면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가 허용되는 중이고 <룩백>의 30만 관객 동원은 이렇게 마이너한 작품에 공감하고 호응할 준비가 된 관객층이 이 정도로 두텁다는 걸 증명했다.
“등 뒤를 봐”
작품 외적인 부분을 길게 언급할 수밖에 없는 건 <룩백>이 한국에 당도한 시기와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룩백>은 작은 이야기다. 소품이라 불러도 좋겠다. 만화가를 꿈꾸는 두 사람이 만나 이인삼각으로 꿈을 향해 매진하는 이야기. 한 줄의 로그라인으로 정리한다면 전형적인 성장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같은 설정. 하지만 그 빤하디 빤한 서사가 스며들어 마침내 공감을 자아내는 건 이 작품이 이들의 꿈을 지켜보는 방식 때문이다. 최고의 라이벌이자 동료가 바라보는 꿈의 풍경은 다름 아닌 서로의 등이다. 고개를 처박고 만화를 그리는 자의 뒷모습. 4컷 만화처럼 짧고 간결한 구성의 이 애니메이션은 꿈꾸는 자의 주변 풍경을 되새기며 과정의 무게와 의미를 전달한다. 소품이라 했지만 그 무게와 밀도는 결코 가볍지 않은 당신의 뒷모습이 거울처럼 이 작품에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쿄모토(좌)와 후지노(우)
시작은 뭐든 적당하다. 학교신문에 실릴 4컷 만화를 그리는 후지노도 마찬가지다. 곧잘 그리는 그림이 주변의 칭찬을 받고 기대에 부응하듯 4컷 만화를 그린다. 꼭 만화여야 할 이유는 없다. 운동신경도 나쁘지 않은 후지노는 그쪽도 가능하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런 후지노의 적당한 욕구에 불을 부치는 건 또 다른 재능이다. 학교에 나오지 않는 학생 쿄모토가 자신을 대신해 그린 그림이 자신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에 후지노는 충격을 받는다. 아마추어라고 무시했지만 오히려 자기가 아마추어로 느껴지는 쿄모토의 그림을 보며 ‘이 녀석을 이기고 싶다’라는 열망에 휩싸이는 것이다. 어쩌면 이거야말로 평범한 이들이 그리는 꿈의 정확한 형태일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꿈과 대의라고 하는 아름다운 이상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다. 큰 방향은 ‘만화’라는 길을 향해 있을 수 있지만 현실로 만드는 한 걸음 한 걸음에는 그때마다 새로운 연료를 필요로 한다. 너를 이기고 싶다는 동기.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다는 동력. 욕망이 쌓인 시간은 곧 꿈이 된다.
그렇게 연습에 매진한 후지노의 실력은 향상되지만 라이벌로 여기는 쿄모토의 실력은 더 빠른 속도로 늘어간다. 재능의 벽을 느끼고 만화의 길을 포기하려던 찰나 후지노가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등을 밀어주는 새로운 동력이 제공된다. 졸업을 앞두고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쿄모토의 집을 방문한 후지노는 자신보다 훨씬 많은 쿄모코의 연습용 스케치북을 보며 놀란다. 우리는 타인의 과정을 대체로 알지 못한다. 우리가 목격하는 건 대체로 타인의 결과들이다. 마침내 코모토의 과정을 목격한 후지노는 그와 자신이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게다가 자신의 팬이라는 쿄모토의 고백을 듣고 다시금 만화를 그릴 동력을 얻는다. 그리하여 배경을 잘 그리는 쿄모토와 인물을 잘 그리는 후지노는 함께 만화를 향한 이인삼각의 달리기를 시작한다. <룩백>은 꿈의 과정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행보를 함께 지켜본다. 그리하여 이들이, 아니 관객이 목격하는 건 만화를 그리고 있는 이들의 등이다. 후지노는 자신의 등 뒤에서 같은 과정을 공유하는 쿄모토의 등을 보며 의지를 불태운다. 쿄모토 역시 후지노에게 등을 맡기고 기댄다. 상투적인 의미에서의 ‘과정’은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보낸 시간을 통해 구체화 된다.
과정의 아름다움. 나아가는 힘.
4컷 만화를 닮은 <룩백>은 코모토에게 일어나는 비극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전반과 후반이 접혀있다. 불행한 죽음을 애도하고 먼저 떠나간 이들의 빈자리를 생각하며 제작된 이 작품은 남겨진 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되묻는다. 미대에 입학한 쿄모토는 친구들과 함께 있다가 괴한에게 살해당한다. 후지노는 쿄모토의 죽음이 그를 만화로 이끈 자신의 탓이라 자책하며, 자신과 쿄모토가 만나지 않았을 만약의 세계를 상상한다. 서글픈 아이러니는 자책의 순간에도 후지노가 만화적 상상력으로 IF의 세계를 구현하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시작은 적당했을지 몰라도 꿈을 향해 걸어왔던 긴 시간은 이미 삶의 방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꿈을 향해 매진한다는 건 그토록 잔혹하고 그래서 아름답다. 좌절하고 잠시 멈출 수는 있어도 방식을 바꿀 수 없을 때 그것은 곧 삶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삶은 언제나 통제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연속이다. 이야기 속 사건은 명확한 인과 관계로 연결되어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따지고 집착해봤자 길을 잃을 뿐이다. 후지노는 가상의 상상으로 과거를 수정하고 싶어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것도 이미 잘 안다. 후지노의 상상은 자책하여 과거를 바꾸고 싶은 것이 아니라 빈자리를 확인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이유에 매달리다 보면 어느새 신기루 같은 과거의 감옥에 갇힌다. 이미 정해진 일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후지노의 IF는 그것을 위한 예방주사이며 이야기의 효능이 본래 그러하다. 누구도 미래를 바꿀 수 없다. 오히려 바꿀 수 있는 건 이미 일어난 과거 쪽이다. 과거를 바꾸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다르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영화, 이야기, 상상을 통해 의미를 선택할 수 있다. 꿈의 의미. 남겨진 자들의 의미. 지금의 의미.
정정해야겠다. <룩백>은 뒷모습이 아니라 ‘뒤를 보는 모습’에 대한 영화다.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건 만화를 그리는 후지노의 등이다. 후지노는 내일을 향해 걸음을 떼기로 결정했다. 그 과정이 괴롭고 지난할지라도 다시 한발 한발 걷는다. 이 소박하고 짧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꿈을 향해 매진하는 자의 주변 풍경을, 잊고 있던 과정들을 새삼 다시 마주하며 감사함을 느낀다. 오늘을 이어가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생각에 잠긴다. 문득 극장을 나서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이 공간도 바뀌고 있다. 과거로 멈추지 않고 내일로 이어지기 위해 뭐든 하고 있다. 어떤 영화는 사라지고, 어떤 길은 끊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 길이 어디까지,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어 두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건 영화는 멈추지 않고, 극장은 계속 새로운 의미를 모색하며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길을 잇고 있는 보이지 않는 이들의 열정에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이 차오른다. 영화산업의 더 추운 겨울이 닥칠 거라는 2025년에는 꿈에 매진하는 과정을 잊지 않도록 영화의 등, 극장의 풍경도 종종 고개 들어 눈에 담아두어야겠다.
송경원(씨네21 편집장) l 영화 논문, 비평, 기자 글쓰기까지,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리액션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한지 15년.
이제야 영화 글쓰기가 나의 직업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2023년 《씨네21》 편집장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듯 영화를 보고, 읽고, 쓴다.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2011년부터 부일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등 역임.
『프로듀서』(2019), 『만화 웹툰 작가 평론선―이충호』(2021),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물고』(2021, 공저),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2024) 등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