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된 육체와 무력감으로 충만한 마음을 위하여 <레퀴엠>(요나스 메카스, 2019)

by.무진형제(미디어 작가 그룹) 2025-01-02조회 629
사진: “Jonas Mekas. Requiem”, Francesco Urbano Ragazzi (© estate of Jonas Mekas)


돌아보니 2023년 한 해에만 상복을 네 번 입고, 네 점의 작품을 제작해 전시했다. 남아서 살아가야 하는 자들의 증상은 모든 의식이 끝난 뒤 발현된다. 2024년이 시작되자마자 몸은 소진되었고, 마음은 무력감으로 충만해졌다. 1년간 참 많은 영화와 콘텐츠들을 접했지만 소진된 육체와 무력감으로 충만한 마음으로는 잘 소화시킬 수 없었다. 사사로운 리스트에 올린 영화들은 그런 무감각 속에서 간신히 발견한 것들이다. 특히 요나스 메카스의 <레퀴엠>(2019)은 쓸데없이 흘려보낸 시청행위의 흐름을 끊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요나스 메카스의 유작 <레퀴엠>을 오랫동안 소문으로만 전해들었다. 특히 영상의 주된 사운드인 베르디의 ‘레퀴엠’은 이 영화의 전시 오프닝 때 현장에서 라이브로 연주되었다기에 기대가 컸다. 전시장에서 상영된 필름 영상과 실연된 사운드가 어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고 관객들에게 전달되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감독은 고인이 되었고, 우리가 기대했던 전시 상영은 이뤄지지 않았다. 만약 감독이 이 영화의 전시 방식에 따른 메뉴얼을 남겨두었다면, 훗날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뉴욕 복합문화예술공간 “The Shed”에서 <레퀴엠> 영상과 함께 작곡가 테오도르 쿠렌치스의 지휘로 연주되는 베르디의 ‘레퀴엠’
(사진: Kate Glicksberg, “REQUIEM CONCERT PERFORMANCES”, The Shed)

영화는 필름이란 긴 흐름 위에 감독이 여러 요소들을 자유롭게 띄워놓은 것 같다. 거리에 핀 꽃, 성경 구절과 뒤섞인 작가의 말, 매체로 공유되는 세계의 참상, 그리고 베르디의 ‘레퀴엠’이란 조각들이 영화에 흐름에 따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이어져 독특한 수평의 흐름을 형성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글자를 읽고, 감독이 촬영한 자연물을 보다, 인쇄되고 방영되는 세계의 참상을 받아들여야 하며, 동시에 약 170여 년 전의 음악도 들어야 한다. 어쩐지 이러한 구성 자체가 베르디의 레퀴엠과 비슷하다.

베르디의 레퀴엠에선 소프라노와 테너를 비롯한 모든 파트가 독립적으로 각자의 아리아를 부른다. 꽤 매끄럽지 않지만 강렬한 조화를 이룬다. 요나스 메카스의 레퀴엠을 이루는 영상과 사운드 조각들이 수평을 이루며 동일한 층위에서 다소 거칠게 연결된 것도 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이 거칠고 다소 성글게 엮인 조각들을 전시장에서 상영하고 연주했다면 그 효과가 더 뛰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는다. 물론 블랙박스에서의 사운드는 오픈된 공간에서의 라이브 연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감각하게 한다. 감독과 함께 LP판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마치 기계적 결함이나 일시 정지 버튼에 의해 발생했을 법한 단절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한 사운드의 빈틈은 감독의 신체와 카메라에 의해 포착된 사운드로 채워진다. 잠깐의 침묵, 노인의 숨소리, 무언가를 지칭하는 목소리, 나직한 웃음소리, 자연을 향한 감탄의 언어와 같은 것들이 음소거 된 사운드를 대신한다. 

이러한 음악적 구성 외에 요나스 메카스가 수많은 진혼곡 중 베르디의 ‘레퀴엠’을 선택했던 이유를 반교권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요나스 메카스가 반교권주의자라는 얘기가 아니다. 영화 레퀴엠에서 요나스 메카스는 성경 구절을 인용함과 동시에 신에게 말을 건다. 그 말들은 교회가 아닌 DV-Cam 이미 위에서 펼쳐지며, 오직 신과 감독의 말만 존재한다. 신이 인간에게 전한 말씀과 인간이 신을 향해 내뱉는 말 사이엔 어떠한 중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 관객들은 백지에 기록된 신과 동일선상에서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인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 인간이란 90대의 노인이 되어도 카메라를 놓지 않은 감독 자신일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양 끝에 스프로킷뿐인 길고 거친 필름 위에서 감독이 남긴 손짓과 그림자, 그리고 쉰 목소리에 의지해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장황한 사변이나 일기 형식이 아니더라도 잠깐의 감탄사와 읊조림, 그리고 숨소리와 짧은 문장 하나만으로 감독의 존재감이 영화 전체에 걸쳐 드러난다. 필름의 물질성과 감독의 정체성이 고화질의 투명함으로 인해 가려진 동시대의 영화 환경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기에 가능하다. 때문에 요나스 메카스의 ‘레퀴엠’을 보는 내내 우리는 추구하고 감춰야만 완성할 수 있는 동시대 영화로부터 떨어져 잠시나마 큰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사진: “Jonas Mekas REQUIEM”, CURA. / "Jonas Mekas's "Requiem", e-flux Criticism (© estate of Jonas Mekas)

물론 해방감은 곧 ‘지금 우리는 카메라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담을 수 있을까’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영화 레퀴엠에서 동시대 전쟁과 재난의 장면들은 출판물과 TV화면으로만 제시되고, 거리에 핀 꽃과 자연물들만이 직접 촬영한 것들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습관적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세계의 참상은 리얼하고 스펙터클하게 재현될 것이고 거리에 핀 꽃과 자연물들은 짧게 등장하는 배경으로 치부되거나 편집 과정에서 지워져도 무방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매체를 통해 접한 세계와 몸으로 체험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병치시켜 위계 없는 세계를 보여준다. 스펙터클하게 재현될 참상을 그가 접한 매체의 특성 그대로 담아 그 사건의 본질에 집중하게 만든다. 감독의 카메라에 포착된 거리의 흔한 꽃무더기와 자연물을 보다 보면 우리의 몸이 실제 세계에서 어떤 경험과 체감을 놓치고 살아가는지 질문하게 만든다. 

이러한 방식이 무엇에 더 집중하거나 공감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길가에 핀 꽃과 해골이 쌓여있는 지구 반대편 어딘가의 불행을 등치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몸으로 보고 듣고 감각하는 실제의 현장과 물리적으로 먼 곳으로부터의 소식과 정보가 전해지고 교환되는 방식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공감 혹은 무감각은 그러한 현장과 방식에 의해 생성되는데, 문제는 이 두 세계의 균형이 깨질 때다. 이 영화는 두 세계를 담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스펙터클에 대한 숭배와 재현 의지, 그리고 작은 것들에 대한 무시 혹은 지나친 감성을 비껴간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을 피사체 삼아도 영화의 정서는 값싼 감성에 치우치지 않는다. 끔찍한 살육과 재난을 목격했을 때 감독은 그 참상이 담긴 매체를 촬영하며 스펙터클과 재현의 의지를 상쇄시킴으로써 오히려 본질적인 공감과 애도에 주목하게 만든다. 결국 그의 영화는 끊임없이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감각하고 경험하고 있는지 되묻게 하는 것이다.
 
   
사진: “Jonas Mekas. Requiem”, Francesco Urbano Ragazzi (© estate of Jonas Mekas)

물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조각들은 철저히 감독이 자신의 세계로부터 이끌어낸 것이다. 그의 몸이 경험한 현장과 그가 접한 매체 속 세계로부터 포착한 것이다. 그렇기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들은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For You”란 문장을 덥썩 물어선 안 된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레퀴엠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어쩐지 90대의 노인이 마지막으로 자신이 습관적으로 바라보고 가치를 부여했던 것들과의 작별로 이해했다. 가령 세속의 가치에 따라 이미지의 층위를 형성하고, 세계를 말끔하고 선명한 화면에 담아내며, 권위에 기댄 말에 복종하는 예술 행위와 같은 것들에 대한 저항 의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이 영화는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결국 감독 자신을 향한 것으로 읽힌다. 필름에 담긴 의식의 조각들 또한 철저히 그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그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요나스 메카스의 레퀴엠은 결국 그가 자신의 죽음을 위해 미리 마련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평생 열망해 왔고 앞으로도 유일하게 안식할 수 있는 곳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 오랜 삶만큼이나 죽음 또한 결국 자기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죽음에 대한 애도와 위로 또한 자기 의지로 받고 싶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쩐지 요나스 메카스라면 가족과 친구들이 일반적인 장례식장에 몰려와 관습적 의식에 참여해 본인을 애도하는 방식은 원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오히려 직접 마련한 재단에 손수 만든 도구를 정렬한 뒤 자신의 영혼을 그곳에 뉘여 누구든 언제나 영화를 보고 만드는 행위로 위로하길 바라지 않았을까. 결국 관객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다 보면 그가 배치한 조각들을 맞춰보고 그 사이에서 육신이 새긴 흔적을 찾게 되니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보는 순간 그가 마련한 레퀴엠에 참여하게 되었다.



무진형제(미디어 작가 그룹) l 무진형제는 3명으로 구성된 작가 그룹이다.
세간의 지배적인 가치와 믿음체계로 굳어져버린 것들을(眞) 의심하고 해체시켜(無) 동시대의 ‘인간-환경 시스템’을 재구성한다.
<삼속(三俗)의 담(談)>, <궤적(櫃迹)-기술된 선인(善人)들> 등을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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