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리스>를 보는 동안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들 <브레스리스>(제임스 베닝, 2023)

by.김소희(영화평론가) 2024-12-19조회 75


제임스 베닝이라는 이름은 <브레스리스>(2023)를 관람하기로 결심한 이유인 동시에 관람을 망설인 이유였다. 장 뤽 고다르의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1959)의 영어 제목에서 따온 ‘브레스리스’라는 제목은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그저 영화의 한 부분을 뭉텅 던져 놓은 듯한 예고편은 불길한 예감이 들게 했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관람을 포기한 뒤, 그런 자신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날은 그래도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산을 가로지른 도로를 비추는 고정숏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화면 좌우로는 우거진 숲이 있고, 그 사이로 난 도로 오른편 갓길에는 ‘공사 중’이라 적힌 주황색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원경에는 인부들이 리프트가 설치된 차를 이용해 가지치기 작업을 하는 중이다.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소음을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당장 검색하면 볼 수 있는 스틸 이미지의 창백한 풍경이 끝을 알 수 없는 롱테이크로 지속된다. 처음 얼마간은 숏이 바뀌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숏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누군가가 극장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을 상상했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극장에 듬성듬성 자리한 사람들은 마치 이러리란 걸 예상했다는 듯 고요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수많은 잡념이 스쳤다. 왜 영화관에서 공사 소음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프로그래머는 무슨 생각으로 이 영화를 틀었을까, 나의 추천으로 함께 보게 된 옆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등등. 더러는 영화와 관련된 생각도 있었지만, 대부분 비평의 제재로 삼기에 곤란한, 사소하거나 엉뚱한 공상이었다. 과소한 시각적 정보는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리를 과장했기에, 공사 소음을 부러지는 나뭇가지가 내는 비명이라고 상상하며 견뎌보기도 했다. 인부들의 노동을 보며, 언젠가는 AI로 대체될 성질의 노동일까 하는 질문도 스쳤다. 

그러다가 눈앞에 있는 아무것도 아닌 풍경을 외우듯이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내가 똑같은 장면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고 해서 이 장면을 사진을 찍는 것처럼 기억할 수 있을까 자문했다. 그럴 순 없었다. 그렇다면 이보다 빠른 속도로 지나가게 마련인 대부분의 영화에서 놓치는 장면은 훨씬 많을 것이다. 누군가의 말과 글 속에서 나의 망각을 확인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그렇다면 영화를 본다는 건 기억하는 행위보다 망각하는 행위에 가깝다. 영화를 잘 본다는 건 무엇을 망각하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감각적으로 구분한다는 뜻일 거다. 영화는 내가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함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주지 않은 영화를 읽어내려는 욕망이 과도해진 나머지, 어느 순간 매직아이처럼 영화가 동영상이 아니라 스틸 이미지가 아닌지 의심이 피어올랐다. 재생된 소리가 움직임의 착각을 불러올 수 있는 상황에서 동영상임을 보증하는 것은 이미지 내부의 움직임뿐이다. 가깝거나 멀어진 그림자의 위치 변화, 이따금 움직이는 새의 존재, 이파리의 작은 흔들림 같은 세부를 확인하며 이미지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했다. 스틸 이미지라는 추정이 단순한 착각에 불과했다 해도, 영상이 스틸 이미지에 준하는 상태로 회귀 중이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정지되기를 희구하는 움직임은 고전적 사진 촬영 방식을 연상시킨다. 초기 사진 촬영술에서 사진에 포착될 수 있는 대상은 오랫동안 한자리에 정지한 것들뿐이다. 그처럼 영화도 최후의 풍경이 카메라 내부에 저장되길 기다리는 중이다. 
 
   
   
감독 제임스 베닝의 다른 작품 속 풍경
(상2) <미국>(2021) / (하2) <알렌스워스>(2022)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촬영이 곧 편집인 <브레스리스>는 실시간으로 촬영되는 순간에 배석한 느낌이 들게 한다. 시차는 있겠지만, 카메라 뒤의 존재는 나와 같은 풍경을 보고 있다. 그런데 과연 카메라 뒤에는 감독이 있을까. 인부들 외에는 인적이 드문 장소이기에 카메라를 세워놓고 자리를 이탈해도 무방하며, 오히려 그편이 효율적이다. 만약 카메라 뒤에 감독이 있다면 그는 대체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몇 가지 단서로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촬영 장소는 거의 차들만 지나다니는 곳이기 때문에 감독이 차를 가지고 지나가다가 출입을 통제하는 푯말을 보고 멈추어 서서 촬영을 시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 경우 푯말을 회수하고 통제가 해제되었을 즈음 영화는 끝난다. 하지만 도로 통제가 해제된 뒤에도 카메라는 계속 그 자리에 남아있다. 만약 카메라를 세워둔 채 감독이 사라진 것이라면, 카메라를 방치한 감독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누군가가 카메라를 강탈해 도망가거나 예기치 않게 종료되는 순간? 만약 그런 순간이 담겼다면 고다르의 <브레스리스>를 급진적으로 다시 쓰는 영화가 되었을지 모른다.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추정은 감독이 물리적인 제한에 의해 일시적으로 도래한 끝을, 진짜 끝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통제되었기에 갈 수 없었지만, 이제는 너무 오래 기다린 나머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잊어버린 상태로서의 정지된 카메라.  

시작되지 않았기에 끝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던 영화의 끝은 의외로 싱거웠다. 감독은 고다르의 테마를 연상시키는 짧은 멜로디와 함께 영화를 간단히 끝내버린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끝까지 기다림의 보상을 마련하지 않은 영화가 준 조용한 충격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거의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영화가 수많은 생각을 촉발하며, 영화를 보는 동안 내 머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투명하게 인식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영화는 기다림 없는 기다림을 보여주면서 영화를 찍는 행위와 감상하는 행위가 기다림의 본질로 서로 이어져 있음을 인식하게 했다.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 우연이 포착되는 순간. 감독의 의도가 드러나는 순간, 배우가 등장하는 순간. 눈물이 흐르는 순간,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마음이 일렁이는 순간, 화가 나는 순간. 놀라거나 감탄하는 순간, 어쩌면 이 순간을 기다려왔음을 영화가 노출하고 내가 감지하는 순간. 영화가 끝나는 순간, 혹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을 순간. 올해 내 마음에 들어온 영화는 대부분 무언가를 기다리거나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기다림 자체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당신은 올해 어떤 영화와 함께 무엇을 기다렸나. 영화와 그 너머의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게 되는 시간이다. 



김소희(영화평론가) l 영화 비평 쓰는 사람. 영화 글쓰기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실험 중.
2015년 씨네21 영화평론상 당선 이후 영화평론가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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