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무것도 몰라요 <가여운 것들>과 <별들의 고향>

by.김진아(UCLA 영화과 교수, 감독) 2024-12-18조회 398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 것도 몰라요 괜히 겁이 나네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난 정말 몰라요
들어보긴 했어요 가슴이 떨려 오네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난 지금 어려요 열아홉 살인걸요 화장도 할 줄 몰라요
사랑이랑 처음이어요 웬일인지 몰라요 가까이 오지 말아요 떨어져 얘기해요 얼굴이 뜨거워져요 엄마가 화낼 거에요
하지만 듣고 싶네요 사랑이란 그 말이 싫지만은 않네요 

 

- <나는 열아홉살이에요>: 윤시내 노래, 이장희 작곡: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의 주제가


한국영화의 여성상은 참으로 많은 부침을 겪었다. 감히 시대에 앞선 욕망을 추구하는 여자는 처참히 몰락해야 했으며*주1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7-80년대의 도시에서 순진무구하나 배운 것 없는 소녀는 기필코 사창가로 전락했다. 90년대 이후, 새로운 서사로 한국전쟁을 그려낸 수작들에는 발달장애가 있는 여성들이 단골로 등장한다. 머리에 꽃을 달고 마을을 내달리는 그녀들은 동화 같은 공동체에 폭력이 소개되는 순간, 가장 먼저 죽어야 하는 탄광의 카나리아들이다.*주2 이 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여성상은 단연코, 몰락하여 사창가로 들어가는 여성들이다. <영자의 전성시대>(김호선, 1975), <별들의 고향>을 필두로 가히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은 7-80년대의 “호스티스 멜로” 영화들. 한국만큼 순수한 여성의 추락 서사에 집착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비비안 리를 주인공으로 한 <애수>(Waterloo Bridge, 마빈 르로이, 1940)가 한국에서만 유독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한국에서 <애수>는 <벤허>(윌리엄 와일러, 1959)나 <아라비아의 로렌스>(데이빗 린, 1962)만큼이나 “주말의 명화”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그러나 정작 영어권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은 한국영화를 연구하는 사람들 외에는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파란 눈의 동료교수들은 유독 한국에서만 주목받은 이 영화가 도대체 어떤 내용이냐고 내게 묻는다. 
 
<별들의 고향> 중 거울 앞에서 기도하는 경아
 
20세기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죄목은 대개 둘 중 하나다. 너무 많이 알거나, 혹은 너무 모르거나. 아는 여성은 많이 아는 죄로 응징을 당하고, 모르는 여성은 배운 것 없는 무식의 죄로 몰락한다. <별들의 고향>에서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엄마가 화낼 거예요”라고 노래하는 천진난만한 경아(안인숙)의 죄는 아무것도 모름, 즉 순진함이다. 너무 순진해서 신마저도 그녀를 버린다. 여관으로 끌려가 반 강제적 성관계를 하기 전, 필요한 것은 콘돔과 녹음기, 변호사였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경아는 거울 앞에 서서 기도하는 것으로 이 모두를 대신한다. “저를 행복하게 해 주소서, (이 남자가) 저를 버리지 않게 해주소서”라고 화장실에서 기도한 그녀의 간절함은 어디에도 가 닿지 않았다. 당연하다.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 자신의 잘못이다. 세상은 그 사실을 경아에게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스스로에게 타락한 여자라는 굴레를 씌우고 죄의식과 수치심의 선악과를 베어 문 여자의 추락은 끝이 없고, 그런 그녀를 놓아두고 세상은 세상의 질서대로 묵묵히 발전해 나갈 뿐이다.

<가여운 것들>(요르고스 란티모스, 2023)을 보는 내내 윤시내가 청순하고 앳된 목소리로 데뷔 전 부른 <별들의 고향>의 주제가가 내 머릿속에 울려 퍼진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메리 셸리적인*주3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죽은 모체의 몸에 모체의 태내에 있던 태아의 두뇌를 장착한 벨라(엠마 스톤)는, 두뇌는 아기이나 몸은 성인 여성이다. 경아의 후예로 21세기의 한국에 등장한 베이글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얼굴은 해맑은 어린이이되 몸은 글래머인 성인 여성 -- 베이비와 글래머를 합성한, 어원부터 심상치 않은 포스트휴먼 냄새를 물씬 풍기는 여성상. 걷는 것조차 서툴던 벨라는 외부의 자극에 명민하게 반응하며 구강기-항문기-성기기를 꼭꼭 다지며 (두뇌만) 알차게 성장하여 끝없는 성욕을 가진,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름다운 여성이 된다. 여기까지는 이성애자 남성의 편의대로 주물(鑄物) 할 수 있는 완벽한 대상으로 보인다.
 
<가여운 것들> 포스터

하지만, 그녀에게는 기억과 트라우마가 없다는 반전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맞지만, 그런 무지로 인해 일어나는 각종 사고와 사건들은 그저 재미있는 삶의 경험일 뿐, 벨라에게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주입하지 않는다. 수치심과 죄의식에 태생적 면역을 가지고 있는 벨라의 모습은 유아성욕의 묘사에서 첨예하게 드러난다. 마치 곤충의 다리를 하나씩 절단하며 관찰하는 어린아이의 천진한 호기심처럼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벨라의 성욕은, 최은미의 단편소설 「라라네」(2015, 『목련정전』, 문학과 지성사)에 등장하는 긴머리의 소녀 라라를 닮았다. 최은미의 소설 속 라라는 애정결핍으로 끊임없이 자위행위를 하고, 그의 엄마는 저주에 가까운 말로 겨우 유치원생에 불과한 라라에게 수치심과 죄의식을 주입한다. 그러나 벨라에게는 그렇게 할 엄마도 없다. 그녀를 저지하는 것은 “벨라 백스터”라는 의학적 프로젝트의 성장을 기록하기 위해 고용되었지만 후에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약혼자가 되는 맥스(라미 유세프) 뿐이다. 그는 단호하고 진지하게, 남들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것은 예의바르지 못한(not polite) 행동이라고 훈육한다. 벨라에게 사회 속에서의 예의라는 개념은 이렇게 처음 뿌리를 내린다. 자신이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억압이 아닌 타인에 대한 배려, 예의라는 개념으로 배운 셈이다. 

이후 벨라의 삶은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단죄하지 않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여성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의 극한을 보여준다. 집과 실험실 밖의 세상을 보여주겠다는 뻔한 거짓말로 자신을 유혹하는 던컨(마크 러팔로)의 속마음을 알면서도 벨라는 그의 리스본 여행 제안을 받아들인다. 지능발달로만 보면 엄연히 어린 아이인 그녀와 “성난 점핑(furious jumping)”이라고 명명되는 섹스를 질펀하게 즐기는 이 관계는 그러나 착취로 귀결되지 않는다. 한계치를 벗어나는 그녀의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것은 던컨 쪽이며, 무료해진 벨라는 휴식을 취하는 그를 혼자 놓아두고 표표히 외출을 감행한다. 식음료의 냄새와 맛, 도시의 강렬한 비주얼과 소음 등, 오감을 자극하는 세계를 하나씩 맛보며 벨라의 두뇌는 유아기와 소년기의 모든 징후를 짧은 시간 안에 축약적으로 드러내며 성장한다. 바야흐로 청년기를 맞은 그녀의 두뇌는 어느 순간, 성욕을 지식에 대한 욕구로 환원시킨다. 책 읽는 것을 “성난 점핑”보다 좋아하게 된 그녀에게 던컨은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녀의 지식에 대한 갈망은 이미 발사된 로케트처럼 궤도를 착실히 따르며 더 큰 우주로 나갈 뿐이다. 유람선에서 만나 벨라의 짧은 생에 처음으로 친구가 되어 주는 정갈한 매너의 청년 해리(제러드 카마이클)는 그런 그녀의 호기심에 촉매제 역할을 한다. 해리의 손에 이끌려 배에서 내려 난생처음으로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을 본 그녀는 연민이라는 감정에 휩싸여 역시 난생처음으로 번민을 맛본다. 유람선의 카지노에서 번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그녀의 행위는 세상을 근원적으로 바꿀 수 없는 낭만적이고 어리석은 행위일지언정, 그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벨라의 철없는 자선행위는 던컨과 그녀를 파산으로 내몰고 둘은 호화 유람선에서 내쫓기고 만다. 어찌어찌 파리에 도달한 두 사람은 자산도 생산수단도 없이 살아남아야 한다. 자본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해야 하는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벨라의 “선택”은 유일한 생산수단인 자신의 몸을 이용하는 것이다. 선택이란 참으로 희한한 단어이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발돋움하는 젊은 여성에게 선택이란 단어는 대학에 진학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유학을 가거나, 가업을 잇거나, 직장을 갖거나 하는, 동등한 비중의 장단점을 가진 옵션들 중 개인이 자신의 가치관에 맞추어 고르는 것이다. 거리에서 굶어 죽는 것과 매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선택이 아니다. 어떤 자살은 타살이듯, 이미 더러워진 몸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춘밖에 없다는 가스라이팅을 당한 젊은 여성이 스스로의 삶을 놓아버리는 결과인 매춘 행위를 “선택”이라고 명명할 수는 없다. 이렇게 사용된 선택이란 단어는 고장 난 시스템에 면죄부를 주고 개인에게는 가장 큰 폭력이 된다. 인권이 부재한 경제개발이라는 한국사회의 고장 난 시스템 안에서, 경아에게도 영자에게도 매춘은 결코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으며 암묵적 합의에 의해 일어나고 방관되는 사회적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벨라는 이 사회적 폭력마저도 스스로 선택한 삶의 실험으로 만들어버린다. 자발적 성매매라는 위험천만하고 논쟁적인 설정은 관객들의 반감을 사기도 하고, 그녀의 실험적 태도를 입증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정사씬이 필요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의 중심에는 삶의 권태와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발적 성매매자가 되는 벨드쥬르, 세브린느*주4처럼 자신의 삶에 대한 멈출 수 없는 벨라의 실존적 갈증이 있다. 이처럼 벨라의 실험은 극한으로 치달으며, 삶은 또 다른 국면을 맞는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성노동자 뚜와넷(수지 벰바)의 이끌림으로 사회주의를 접하며 자신의 고민들을 단순한 낭만적 연민 이상의 의식(意識)으로 쌓아나가는 것이다. 휴일을 이용해 사회주의 전당대회에 나가는 그녀들 앞에 런던으로 돌아간 줄 믿었던 던컨이 다시 나타난다. 벨라에게 청혼을 거부당한 던컨이 창녀라고 소리 지르자 뚜와넷은 자신들은 “자립적인 생산수단을 가진 자”라고 친절히 정정해준다.
 

사실 이 모든 모험의 연대기와 별도로, 벨라는 이미 맥스와 약혼한 사이며 그 사실에 나름 놀랍도록 충실하다. 이미 알고 있는 던컨과의 관계는 물론, 매춘 경험에 대해 담담하고 정직하게 약혼자에게 이야기 하는 벨라를 맥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세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관용을 가진 벨라가 동등한 관용으로 보답 받는 셈이다. 두 사람의 결혼식 장면은 영화의 다른 장면들에 비해 덜 선정적이지만, 주체적 선택권을 가진 여성이라는 벨라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름다운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아버지 갓윈(윌렘 데포)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간 벨라는, 던컨이 데리고 온 처음 보는 남자에게 결혼을 저지당한다. 자신의 육체에 다른 사람(어머니)의 두뇌가 들어있을 때 함께 살던, 일종의 전남편, 알피(크리스토퍼 애봇)다. 솟구치는 호기심 반, 모호한 책임감 반으로, 벨라는 아버지와 약혼자의 만류를 무릅쓰고 알피를 따라간다. <별들의 고향>에서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잃고 상품성을 잃어버린 경아의 존재는 두 남자 사이에서 물건처럼 떠넘겨 지지만(버거우니 당신이 대신 좀 맡아주시오), 벨라는 자신을 추종하는 남성들 사이를 스스로 선택하며 자유롭게 횡단하는 것이다. 더 이상 매춘조차 할 수 없는 경아가 수면제를 먹고 눈밭에서 동사한다는 설정으로, 한 인간의 영혼과 육신의 완전한 파괴로 마감되는 근현대 여성잔혹사 <별들의 고향>과 달리, <가여운 것들>에서 파괴되는 것은 벨라를 착취하려 했던 남성들뿐이다. 희대의 카사노바 던컨은 그녀를 성적으로 착취하려 했지만 그녀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 파괴되고, 할례수술을 통해 벨라를 자신의 자손을 생산하는 자궁으로 축소하려 했던 알피는 염소의 두뇌를 갖게 된다. 인류의 역사 속 너무나 오랫동안 여성상의 두 축을 이루었던 창녀와 어머니라는 전형성은 이렇게 산산조각 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의 잘못”이라는 가스라이팅에서 살아남은 벨라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즐기고, 도전하고, 성취한다. 세상의 부조리와 자신을 착취하려는 주변인물들을 가뿐히 넘어서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그녀의 비밀은 무엇일까? 죄의식과 수치심이 없는 그녀에게는 맥스에게 교육받은 “예의”와, 해리를 통해 깨닫게 된 세상의 불행에 대한 “연민”이 있다. 맥스는 예의 바른 사람이지만 경계를 넘어선 세상을 꿈꾸는 상상력이 부족하고, 해리는 세계의 모순을 설명하는 일관되고 세련된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세상을 두려워하는 소년”일 뿐이다. 반면 벨라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무모하고 무조건적인 관용을 지닌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과학실험의 대상으로 자신을 탄생시킨 아버지를 용서하게 만들고,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에 저항하는 사람으로 그녀를 성장시킨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이지만, 자아와 타자를 아우르는 자유에 이르는 길은 어쩌면 벨라처럼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연민이라는 두 대의 등대를 따라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느긋한 오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칵테일을 마시며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해부학 공부를 하는 벨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의 노래를 다시 부른다면 이런 가사가 나올 것이다.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 것도 몰라요 괜히 신이 나네요 그런 말 더 해 주세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더 배우고 싶어요 심장이 세게 뛰네요 그런 말 더 해 주세요
난 지금 어려요 열아홉 살인걸요 화장은 필요 없어요 이 모든 게 처음이예요 웬일인지 몰라요
가까이 와 주세요 더 만지며 얘기해요 온몸이 뜨거워져요 엄마는 죽고 없어요
뭐든지 알고 싶어요 사랑이란 그 말도 가끔은 재미지네요 

   
<별들의 고향> 중 경아와 <가여운 것들> 중 벨라

다시 경아의 세상으로 돌아가보자. 벨라가 경아처럼 대한민국의 70년대를 살아갔다면 어떨까? 일찌감치 데이트 살해를 당해 세상에서 사라지는 위험만 넘어설 수 있다면 경계가 없는 꿈을 꾸는 큰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 아니다. 정신병동에 감금되거나 감옥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경우의 수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는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너의 잘못이라고 끝없이 세뇌했을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벨라를 산산이 부수어 뜨리는 것으로 응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벨라의 존재는 그레이의 소설과 란티모스의 영화 속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터무니없는 꿈이고 동화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이미지는, 언어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현상(現象 phenomonon)일 뿐이다. 벨라의 말처럼,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입증하기 전까지 지구는 평평했고, 전기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상은 어두웠다. “그것이 다다르기 전까지 세상은 그 이전의 상태가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그녀의 언어는 도발이 아닌 혁명이다. 


주1.
<하녀>(김기영, 1960), <자유부인>(한형모, 1956)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주2.
<그 섬에 가고싶다>(박광수, 1993), <웰컴 투 동막골>(박광현, 2005)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주3.
최초의 SF작가로 인정받는 영국의 여성 작가. <가여운 것들>은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여성주의적 해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프랑켄슈타인』의 설정과 제재는 물론, 작가인 메리 셸리의 삶의 궤적까지도 <가여운 것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메리 셸리의 결혼 전 성(姓)은 메리 갓윈 Godwin이다. 갓윈은 영화 속에서 벨라 아버지의 이름(first name)으로 차용 되고, 벨라는 그를 갓(God)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실제로 당대의 진보적 정치사상가였던 메리의 아버지 윌리암 갓윈은 일찌감치 어머니를 여읜 딸에게 당시 여성으로 받기 힘든 양질의 교육을 선사했다. 교육을 위해 딸을 급진주의 사상가 친구 집에 보내기도 하는데, 그 친구의 성(姓)이 영화 속 벨라의 성(姓)인 백스터(Baxter)이다. 메리는 백스터의 집에서 그의 네 딸들과 자매처럼 지내며 작가로서의 감수성을 발전시킨다. 메리 갓윈은 이후 아버지의 사상을 추종하는 유부남 퍼시 셸리와 사랑에 빠진다. 벨라처럼 도주하여 퍼시와의 유럽여행을 감행하는 메리 갓윈은 퍼시의 아내가 죽은 후 그와 결혼하여 마침내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메리 셸리가 된다.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던 메리 셸리의 삶을 영화 속에서 찾아내는 것도 <가여운 것들>을 보는 큰 재미다. 

주4.
<벨드쥬르(세브린느)>(Belle de Jour, 루이스 부뉴엘, 1967). 사랑하는 의사남편과 유복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세브린느는 완벽해 보이는 삶에도 불구하고 공허감을 이기지 못한다.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고급 요정에서 남편의 근무시간인 낮에만 성매매를 하는 세브린느에게 마담은 벨드쥬르라는 애칭을 부여한다. 조세프 케셀의 동명 소설(Belle de Jour)을 원작으로 한, 논쟁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여성 주인공의 시선으로 이어지는 몽환적 서사와 부뉴엘 감독 특유의 아이러니와 검은 유머가 가득한 역작이다. 



김진아 (UCLA 영화과 교수, 감독) l <두번째 사랑>(2007), <파이널 레시피>(2013) 등 다섯 편의 장편영화와,
미군위안부3부작 <동두천>(2017), <소요산>(2021), <아메리칸 타운>(2023) 등을 연출. 
미국 UCLA대학 교수로 시각예술의 재현 윤리, 초국가적 영화론을 가르치고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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