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지리학 재클린 밀스, 2022

by.김영글(미술작가) 2023-02-16조회 6,177

1.
이 영화는 단 한 명의 인물만 등장하는 영화다.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해역에 위치한 세이블 섬에서 40여 년간 살아온 환경보호 활동가 조이 루커스가 그 주인공이다. 미술을 전공하던 대학원생 시절 이 작은 모래섬의 흑백 사진을 보고 매료된 루커스는 1974년 세이블 섬의 바다표범을 연구하는 팀에 자원해 현장 보조원 겸 요리사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후 유실되어가는 사구를 복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섬과 육지를 오가다, 1982년부터는 아예 거처를 옮겨 대부분의 시간을 섬에서 보내게 된다. 루커스는 섬의 생활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동료들이 모두 철수한 뒤에도 혼자 남아 세이블 섬의 거주자로 오랫동안 살아왔다.

루커스의 일상은 여러가지 반복적인 일들로 채워져 있다. 파도에 쓸려온 해양쓰레기를 수집해 분류하고, 동물의 똥에 든 이물질의 성분을 분석하고, 죽은 말의 발굽이나 곤충의 표본을 채집해 박물관에 보내기도 한다. 섬에는 500여 마리의 야생마가 서식하고 있는데, 루커스는 야생마들을 구분하려고 공책에다 말의 얼굴을 하나하나 그려 넣었다. 그려 넣고 보니 얼굴이 모두 달랐다. 이름 없는 야생마들이지만, 이들은 루커스의 공책 속에서 하나하나 고유한 개체로 호명된다. 공들여 관찰하고 기록한 덕분에, 섬의 말이 없어지면 대번에 알아차릴 수가 있다. 어느 구역으로 이동했는지, 왜 이동했는지도.

성큼성큼 거닐며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는 루커스의 행동은 마치 손바닥 속을 헤아리듯 섬을 낱낱이 알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이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자연, 무모한 도전들로 이루어진 낮, 낮이 물러간 뒤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외로운 밤, 고립을 자처하기 위해 포기해야 했을 삶의 또 다른 부분들. 그러나 영화는 그 모든 과정에 대한 회고 또한 생략한다. 조이 루커스는 그저 과거의 어느 날 섬에 당도했고, 섬에 적응하며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존재한다. 내가 첫 문단에 쓴 내용들도 대부분 나중에 구글링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다. 사실 카메라가 호기심을 가지고 비추는 것은 인물의 생애나 환경보전의 당위적 서사보다는 섬의 현재를 이루고 있는 순간들, 루커스의 손이 빚어내는 일상의 이미지들이다. 이를테면 햇살 좋은 날 창문에 걸어 놓은, 쓰레기 조각들로 만든 예쁜 모빌 같은 것.
 

2.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영화는 쓰레기에 관한 영화다. 세이블 섬의 해안으로는 매일 수많은 쓰레기가 파도에 실려온다. 루커스는 해변에 나가 수거해온 쓰레기를 깨끗이 씻고 햇볕에 말려 종류별, 소재별, 브랜드별, 색깔별로 분류한다. 루커스가 수행하는 연구는 북대서양에 떠 있는 이 외딴 섬의 느리고 미세한 변화를 체험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먼 곳에서부터 해안가로 밀려오는 자본주의적 삶의 파편들을 관찰하고 집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고무풍선에 인쇄된 이름과 문구, 깡통과 플라스틱 뚜껑 따위에 달린 라벨, 각종 파티 및 행사의 흔적과 평범한 가정의 소비 품목들은 어느 지역에서 어떤 색깔과 소재가 유행하고 있고, 어떤 단어가 지갑을 열게 만들며, 무엇이 사람들을 즐겁게 또는 슬프게 만드는지 시시콜콜 이야기해줄 것이다.

얼마 전 나는 김지혜 환경과학연구자의 논문 「해양쓰레기와 함께 세계 짓기」를 읽으면서 다시금 <고독의 지리학>이 내게 남긴 파문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최근의 해양쓰레기 연구는 해양쓰레기에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없애야 할 문제적 사물 혹은 단순한 골칫거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세계를 구성해 나가는 삶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인류세 이후의 이 ‘얽혀 있는 삶’ 속에서, 인간은 인간 이외의 것들과 작든 크든 혼종의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세계가 바다로 연결되어 있기에 해양쓰레기가 특정 지역의 문제일 수 없듯이,  세이블이라는 작은 영토 위에서도 생명체들은 잎맥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동식물 모두가 플라스틱 쓰레기, 유출된 석유, 침식작용과 같은 지형의 변화와 함께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조이 루커스도 이제 그 일부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섬에 흘러 들어왔다가 섬과 함께 나이가 들어 어느새 할머니가 된 그의 머리칼은 바람에 나부끼는 섬의 억새와 똑같은 은빛이다. 어떤 장면들은 아무 대사도 없이 그저 이 은빛의 일렁임과 반짝임만을 담고 있다. 바람과 태양은 섬 안의 모든 것에 공평한 손길을 준다.

화면이 한 컷 한 컷 넘어갈 때마다 섬이 살아 숨쉬는 하나의 생태계라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 보인다.  죽은 말의 몸 위로 바람이 분다. 루커스가 그 사체를 해변에 묻어준다. 그러면 토양으로부터 양분을 얻어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그 풀을 또 다른 말이 뜯어먹는다. 영화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드러내고 들리지 않던 것들을 들리게 하는 데에 공을 들인다. 딱정벌레가 걸어가는 소리. 달팽이가 기어가는 소리. 평소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사실은 계속 존재하고 있었던 그 소리들이 ‘영화음악’의 지위를 부여받고 무대에 오른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소리를 작곡한 것은 달팽이라는, 그 귀엽고도 엄연한 사실.

카메라는 섬 위에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소중하게 담는다. 그러니 이 영화에 한 사람만 등장한다는 말은 고쳐 쓸 필요가 있다. 해초, 달팽이, 회색 바다표범, 수달, 박쥐, 야생마, 야생마의 똥, 잔디, 언덕, 해안의 모래알, 어둠이 내리면 검은 모래 장판 위로 쏟아질 듯 빛나는 별들, 그리고 삶과 죽음, 모든 것의 순환을 품고 있는, 언젠가는 그 자신도 흔적으로 돌아갈 모래섬. 이들 모두가 이 섬의 주인이고, 따라서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3.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는 오물을 “자리에서 이탈한 존재”라 불렀다고 한다. 쓰레기란 그 형태와 성질이 그대로이더라도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거나 함께여야 할 존재들과 함께 있지 않는 순간부터 쓰레기로 규정되는, 이질적인 상태의 사물인 것이다. 그런데 세속의 관점에서 보자면 조이 루커스 역시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한 존재다. 멀쩡한 대학 시간 강사 일까지 그만두고 혈혈단신 섬으로 들어가 평생을 모래 위의 동식물들과 함께 보낸다는 게 평범한 삶의 경로는 아닐 테니 말이다.

이상하게도 지난해 본 영화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에 관한 영화가 유독 마음에 남았던 것 같다. 사로잡힌 사람. 무언가에 천착하다 못해 그 대상에 자신의 삶이 거의 겹쳐지다시피 한 사람. 이를테면 얼어붙은 설산으로 돌진하다 실종된 사람(알피니스트: 마크-앙드레 르클렉), 또는 폭발하는 용암을 쫓아다니다 화산재에 뒤덮여 죽은 사람(불 속의 연인: 카티아와 모리스 크래프트를 위한 진혼곡). 빙벽, 설산, 파도, 용암, 번개에 대한 제어할 수 없는 매혹은 사실 같은 게 아닐까?

그런데 위험이 도사리고 있거나 대단히 위용 넘치는 경관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세이블 섬에서도 나는 비슷한 종류의 이끌림을 느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건 죽음이라고 하는, 언어로 내뱉고 나면 너무나 간단해지고 마는, 우리 삶에 내재한 비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존재도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침식작용 같은 것을, 짐작건대 루커스는 섬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홀리듯이, 혹은 저항하듯이, 그 세계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을 것이다.

영화에서 두 개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대비 또한 인상적이다. 해안 가까이에서 비교적 빠른 속도로 일어나는 순환 속에 계속해서 새롭게 나타나는 인공물질과 분해 불가능한 플라스틱들이 있다면, 섬 안쪽에는 시간의 비질을 고스란히 받으며 천천히 소멸해가는 사물이 있다. 루커스가 정착 초기에 나무를 잘라 짓고 그 안에서 살았던 옛집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낡고 거의 무너져내려 지금은 뼈대만 남은 쇠락한 풍경이 되었다. 폐허를 훑는 카메라의 시선에 몇 줄기의 바람이 걸린다. 텅 빈 집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바람은 말없는 증언자, ‘문명’이라는 세계 또한 유한하다는 사실을 이따금 상기시켜주는 존재 같다.
세이블 섬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영화란 그런 것 아닐까? 언젠가는 소멸할 무언가를 붙잡아 기록하겠다는 환상. 그 진심.
 

4.
그래서 다시 쓰자면, 이 영화는 시선에 관한 영화다. <고독의 지리학>을 한평생 환경 보존에 헌신한 여성의 이야기로 읽으면 영화는 아주 건전한 두 시간짜리 자연(혹은 인물) 다큐멘터리가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매혹당한 두 인간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 편이 더 좋다. 그러면 이 고요한 산책과도 같은 시간 속에 소리없이 들끓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 또한 보인다.

러닝타임 내내 화면에는 루커스의 앞모습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최대한 조용히 뒤를 따를 뿐 앞지르거나 섣불리 말을 걸어 돌려세우지 않는다. 그러다 딱 한 번 정면으로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순간이 있다. 루커스가 아직 20대였던 시절, 누군가의 캠코더로 촬영된 과거의 한 순간이다. 모래가 유실되어가는 섬을 지켜야 한다며 열정적으로 발언을 하던 젊은 루커스는 인터뷰어로부터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 잠시 카메라를 응시하다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 섬을 사랑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장면이 있다. <고독의 지리학>이 전주영화제에서 국내 첫 상영되었을 때, 영화가 시작하기 전 젊은 여성의 얼굴이 스크린에 떴다. 재클린 밀스 감독이 보내온 인사 영상이었다. 감독은 말했다. “이 영화는 정말 애정으로 만든 작업입니다.”

두 개의 하릴없는 고백을 지구 반대편에서 수십 명이 컴컴한 동굴에 모여 앉아 지켜보고 있는 광경. 그건 확실히 조금 이상한 감동이었다. 재클린 밀스 감독은 네 살 때 뉴스를 보고 루커스와 섬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그들을 담은 영화를 일평생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영화들을 볼 때마다 매혹 그 자체만이 아니라, 매혹당한 사람에게 매혹당한, 기록자의 생에 대해서도 곱씹어보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삶을 부지런히 쫓고 수집하고 잘라서 정성스레 이어붙이는 작업에 대해서. 직접 돌진하는 대신에, 몇 겹의 렌즈와 필터와 녹음기를 경유해 이 불가해한 세상을 대면하고 이해하려 하는 삶의 한 방식과 태도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앞에 선 한 무리의 ‘우리’에 대해서.

여기에 이르면 <고독의 지리학>이라는 난해한 제목도 모종의 설득력을 얻는다. 고독은 외따로 떨어진 홀로의 감각이고 전혀 지리적인 것이 아니지만, 그 감각과 조우한 영화는 필연적으로 어딘가로 향한다. 섬을 구석구석 훑고, 섬을 한 바퀴 돌고, 이윽고 섬을 떠나, 스크린의 표면을 뚫고, 영화의 바깥으로 기나긴 별자리를 만든다. 그 허구의 지표 위에 잠시라도 머물렀던 사람은 별자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점이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때의 점들은 이상하게도 전혀 고독하지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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