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정이삭, 2020

by.장영엽(씨네21 편집장) 2021-01-22조회 10,809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 부부는 미국 남부 아칸소의 외딴 공장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한다. 그들은 하루 종일 병아리의 항문을 확인한 뒤 성별을 구분해 색이 다른 통에 넣는 일을 한다. 성별이 수컷이거나 다친 병아리는 별다른 고려 없이 소각장으로 보내진다. 끊임없이 잿빛 연기를 뿜어내는 병아리 소각장 앞에서 제이콥은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도 꼭 쓸모가 있어야 하는 거야.” 

제이콥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건, 이들 부부의 일상에 비상 경고등이 켜진 지 오래기 때문이다. <미나리>는 서서히 코너에 내몰려 결국 인적 없는 미국 남부 시골 마을까지 오게 된 한국인 이민자 가족의 생존을 위한 분투기를 다룬다. 제이콥과 모니카 부부, 그리고 부부의 딸 앤과 아들 데이빗은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까 싶은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남겨진 한 트레일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그동안 우리가 접할 수 있었던 수많은 한국계 미국인 디아스포라 영화들은 LA처럼 한인 커뮤니티가 잘 형성된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한 고요하고 황량한 벌판, 이제까지 한국계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서 거의 탐험해본 적이 없는, 오히려 개척을 테마로 하는 서부영화에 더 잘 어울릴 법한 풍경 속에서 디아스포라 가정의 서사는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지가 <미나리>에 대한 첫 번째 궁금증이었다. 

제이콥이 “미국에서 가장 기름진 땅”이라고 말하는 아칸소의 초원은 미국행을 택한 뒤 10여 년간 실패만 거듭해온 한국계 미국인 가족이 마지막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꿔보고자 하는 장소다. 촬영감독 라클란 밀네가 포착한 아칸소의 따스한 햇빛과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대지 위를 바쁘게 오가는 한국계 미국 배우 스티븐 연의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도 <미나리>는 묘한 울림을 준다. 품었던 희망들이 하나씩 좌절되며 구석까지 내몰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이방인으로서의 의지(그것은 제이콥이 굳이 미국 채소가 아닌 한국 채소를 미국 땅에 재배하려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와 애환이 아칸소의 정적이고 서정적인 풍경과 어우러져 강렬한 정서적 감흥을 선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틀림없이 절제된 프로덕션 속에서 감정의 진폭을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그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실제로 완성된 영화의 스케일보다 훨씬 더 거대한 것을 다루는 영화처럼 느끼게 만드는 리 아이삭 정 감독의 연출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미나리, 나란히 서서 바라보는 스티븐연과 앨런김

<미나리>는 가족이라는 우주를 통해 그들이 속한 세계를 조망한다. 식탁에서, 일터에서, 가족이 발 딛고 서 있는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이고 소소한 사건들은 문화와 세대의 차이, 이민자 가정의 좌절과 희망, 사랑과 관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다. 가족 구성원에 따라 같은 사안을 대하는 시각이 달라지고 어떤 구성원이 누구와 마주하느냐에 따라 대변하는 문화적, 사회적 층위가 달라지는데, <미나리>는 그런 점에서 영화의 시선이 누구에게로 향하고 있는지 살피는 재미가 있는 영화다. 일례로 제이콥의 아메리칸 드림은 모니카에겐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 남편이 “아빠가 한번쯤 해내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프라 없는 시골 마을로의 이사를 결심할 때, 현관문이 없는 새 집의 상태를 근심하는 것, 심장이 좋지 않은 아들을 위한 병원이 한 시간 이상 운전해야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음을 우려하는 건 전부 아내 모니카의 몫으로 남겨진다. 같은 꿈을 꾸며 택한 미국행이었으나 새로운 정착지에서도 여전히 작동 중인 한국식 가부장제가 어떻게 부부의 마음을 갈라놓는지, 영화는 관찰자의 위치에서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배우 한예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현실적인 감각을 잃지 않는 이민자 여성의 초상을 사실적이고도 디테일한 필치로 연기한다. 

마음 둘 곳 없는 딸을 위해 한국에서 이민 온 모니카의 어머니 순자(윤여정)와 손자 데이빗은 <미나리>를 본 이들이 가장 오랫동안 사랑할 만한 조합이다. 집에서건 밖에서건 한국말을 쓰며 외부인과의 소통이 단절된 모니카와 달리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영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데이빗은 외양은 한국인이나 이미 자신도 모르는 새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소년이다. 그런 그에게 (미국 할머니들처럼) 요리도 안 하고, 욕설을 입에 달고 살며 ‘한국 냄새’가 나는 외할머니는 납득할 수 없는 존재다. 영화는 순자와 데이빗의 에피소드를 통해 일상적으로 정체성의 충돌과 혼란을 겪고 있는 이민 2세대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외신으로부터 2021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유력한 여우 조연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배우 윤여정은 이 영화에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기를 한다. 그가 연기하는 순자는 동서양을 막론한 장년층 여성의 스테레오타입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낌없이 베풀고 인자한 모습의 할머니와 거리가 멀다. 호불호가 명확하고 유머 감각을 잃지 않으며 무심한 듯 세심하게 삶의 연륜으로부터 비롯된 지혜를 가족들에게 건네는 ‘쿨’한 할머니의 존재는 전세계 매력적인 장년층 여성 캐릭터의 정전에 기꺼이 순자를 추가할 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다. 먹고사는 걱정으로 인해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력조차 없는 이민자 가정의 척박한 상황을 조명하는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과 관객이 숨을 돌릴 틈을 마련하는 것 또한 외할머니 순자, 그리고 그를 연기하는 배우 윤여정의 몫이다. 
 
미나리, 스티븐연의 옆에서 굳은 표정의 한예리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 감독 리 아이삭 정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다. 데뷔작 <문유랑가보>부터 <미나리>에 이르기까지 줄거리나 대사로 구현할 수 없는 정서적인 순간들을 특유의 시적 영상으로 구현해온 리 아이삭 정 감독에게 <미나리>는 유년 시절의 자전적 경험이 반영되어 있어 더욱 특별한 영화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코리안 아메리칸 커뮤니티가 있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아칸소)에서 성장했다. 스스로를 ‘코리안 아메리칸’이라기보다 코리안/아메리칸이라 느낀다”고 밝힌 바 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감각이 그 자신을 관찰자의 자리에 위치하게 하는 듯하다. 내전의 불씨가 사라지지 않은 르완다에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소년과 그와 동행하는 원수지간 부족의 친구를 조명한 <문유랑가보>에서부터 리 아이삭 정의 관심은 경계의 인물들, 소수자들, 다양한 층위가 충돌하는 누군가의 내면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경계에 위치한 창작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아시아계 감독이 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점은 지난 2018년 주류 미국 영화산업에 선풍적인 박스오피스 기록을 남기며 주목받았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서치> 등의 영화와는 또 다른 의미의 인상적인 족적으로 기억될 듯하다.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반영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감각은 영화 <미나리>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긴밀한 결속과 유대로 이어진다. 결국 이 영화는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민자 가족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에, 기댈 곳은 서로의 어깨 뿐이기에 누구도 이탈하지 않도록 각자의 손을 더욱 단단하게 잡는 이야기다. 집안 곳곳에서 가족들이 맺는 다양한 관계와 유대의 순간들을 조명하며 감정의 폭을 촘촘히 쌓아가다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감정을 폭발시키는(윤여정의, 윤여정에 의한, 윤여정을 위한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의 진폭을 확장시킨다.   

<미나리>에서 사사롭게 마음이 갔던 대목은 모든 것을 잃은 밤, 온 가족이 바닥에 누워 함께 잠을 청하는 모습을 담은 장면이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고된 현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오늘 밤 아무도 잃지 않았음에 안심하며 또 다른 미래를 위해 힘을 비축하는 이들의 근성이야말로 그 어떤 설명이나 수식 없이 한 가족이 거쳐온 이민자로서의 삶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서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낯선 땅에 뿌리내리고 풍성하게 자란 미나리처럼, 이 가족의 아메리칸 드림 또한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작은 희망을 <미나리>는 안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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