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음을 당신께 줄게요.
올해는 코로나19 탓에 보고 싶었던 영화, 봐야 할 영화들을 충분히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편으론 그 탓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선 평년보다 조금 더 많은 영화들을 만났다. 코로나19 인해 씨네21 데일리가 발행되지 않고 대부분 일정을 홀로 소화해야 했던 탓이다. 올해 부산에서 만난 영화들을 곱씹어본다. 가장 심금을 울린 영화는 디즈니·픽사의 <소울>이었다. 식상한 이야기를 가지고도 가슴에 불을 지피는 건 모든 서사 영화들이 바라는 꿈일지도 모른다. <
인사이드 아웃>에 이어 피트 닥터는 그 비밀의 열쇠를 발견한 것 같다. 영화가 끝난 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작품은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의 <
운디네>였다. 전설의 틀을 빌린 멜로드라마라는 빤한 단어들의 조합으론 이 영화의 신비를 미처 다 전할 수 없다. 바흐 협주곡 D단조 2악장 아다지오의 선율 사이사이 아직도 귓가를 간질이는 물의 소리가 들려온다. 깔끔한 만족감을 안긴 건 리 아이작 정 감독의 <
미나리>였다. 높은 확률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연이 되리라 확신한다. 한국 영화들은 대체로 고르게 만족스러웠는데 그중 유독 오랜 앙금처럼 가라앉아 남은 건 이란희 감독의 <
휴가>였다. 아마도 이 영화에 대해선 앞으로도 여러 차례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사로운 리스트에 꼽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
스파이의 아내> 이런 식의 리스트를 꼽아본다면 각각의 기준에서 모두 조금씩 모자랐다. 감동으로 휘몰아치는 종류의 영화도 아니고 치밀한 상징과 해석으로 독해가 필요해 보이지도 않았다. 대중, 상업적인 면모가 있지만 공식처럼 깔끔하게 떨어지진 않고, 그렇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에 감싸여 내내 들썩이지도 않는다. 물론 <스파이의 아내>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작품이란 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아는 영화에 대한 온갖 잣대를 들이대도 조금씩 아주 미묘하게 비껴나가는, 실로 곤란한 영화였다. 나는 나를 곤란하게 하는 것들을 사랑한다. 나의 짧은 안목과 한 뼘도 채 안 될 어휘의 촉수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음모들을 사랑한다. 자동필기처럼 의무감에 리뷰하는 반복되는 루틴에서 해방시켜줄 어긋남을 사랑한다. 그게 지금 <스파이의 아내>를 붙잡고, 되지도 않게 매달리는 이유다. 이 글은 분석도 비평도 해설도 아니다. 그저 내가 겪은 흥분되는 순간에 대한 거친 고백이다.
<스파이의 아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판에 박힌 설명도 가능할 것이다. 시대를 경유하는 멜로드라마이고, 2차 대전 말기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읽힌다. 의심과 집착, 불안과 갈망으로 얽힌 캐릭터의 관계도는 서스펜스 멜로의 정석이라고 할 수도 있다. 1950년대 일본 고전 영화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제된 화면들은 한 폭의 유려한 그림처럼 만족감을 안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가장 대중적인 영화”라는 설명도 일정 부분 납득 간다. 진흙처럼 진득한 감정의 덩어리로 뭉쳐진 전작들과 달리 보는 이를 의식하는 혹은 배려하는 조심스러움이 곳곳에 묻어난다. 그럼에도 이 모든 수식어의 총합이 <스파이의 아내>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이런 부스러기 같은 단어들을 모아봤자 껍데기만 훑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차라리 이 글에선 사소해 보이지만 범상치 않은 몇 가지 장면들을 놓고 마음을 풀어보겠다. 이 영화에는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는 가운데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이 있다. (서사적으로는) 의미가 지정되지 않은, 공백 같은 장면이라고 해도 좋겠다. 화면을 초과하여 영화에 대한 모든 설명을 무력화시키는 균열의 지렛대 같은 장면. 잊은 줄 알았는데 망막 안쪽에 새겨져 눈을 감으면 자꾸만 떠오르는 꿈같은 장면.
<스파이의 아내>는 2020년 6월 NHK에서 방영된 스페셜 드라마를 화면 비율과 색상 등 극장용에 맞게 재구성한 영화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시대극을 찍어보고 싶어 시작했다는 이 영화는 그리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진 않는다. 태평양전쟁 직전인 1940년 고베를 배경으로 격변의 시기를 살았던 한 쌍의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데, 현대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보고 싶긴 했지만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중력을 벗어나진 않길 바란 결과라고 한다. 전쟁 막바지 전쟁의 기운이 일반 국민들에게도 실감으로 번져가던 시기까지 구로사와 기요시의 수비 범위 안쪽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고베의 무역상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는 국가를 신봉하는 대신 코스모폴리탄을 자처하는 남자다. 유사쿠는 사업차 만주에 갔다가 일본군 부대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목격하고 이를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유사쿠의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는 남편의 비밀이 행복한 가정을 파탄 내고 말 것이라 여기고 결사적으로 그를 말려보지만 소용이 없다. 하지만 사토코 역시 어떤 계기로 결국 남편의 뜻을 따라 ‘스파이의 아내’로 살 것을 결심한다. 한편 사토코의 어릴 적 지인이자 헌병대 대장 야스하루(히가시데 마사히로)는 유사쿠를 의심하고 주변을 감시한다.
방영된 드라마를 직접 보지 못해서 확신할 순 없지만 아마도 내용 자체는 대동소이할 것이다. 보기 드물게 8K 카메라로 촬영된 화면을 영화에 맞춰 프레임과 색감 정도를 조정했을 거라 짐작되는데, 한편으론 그게 이 영화의 본질이기도 하다. 영화적인 프레임. 스크린에 착색된 듯 고운 색감. 그만큼 매 장면은 꽉 차있고, 리듬은 빈틈이 없다. 빈틈이 없다는 것이 꼭 칭찬만은 아니다. 쉽게 가는 장면이나 완급 조절 없이 정해진 속도로 뚜벅뚜벅 걷는 쪽에 가깝다는 의미다. 제목 그대로 이 영화는 스파이의 아내의 시점에서 사건을 따라간다. 벌어지는 상황의 전모나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틀은 서스펜스물이라 볼 수 있다. 다음 장면이 궁금하게 만드는 것, 서스펜스는 사실 장르라기보다는 모든 영화의 동력이다. <스파이의 아내>는 서스펜스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색은 매우 옅은 편이다. 바로 이 점이 ‘구로사와 기요시의 대중적인 면모’가 아닐까 싶다. 빗대자면 장르에 대한 인지 부조화가 일어난다고 할까.
사실 이 영화는 전혀 대중적이지 못하다. 감독은 “전쟁을 배경으로 했지만 멜로드라마와 서스펜스라는 장르가 중요하다”고 항변하기도 했지만 정확히는 대중적이라고 믿어지는 어떤 틀이나 평균치를 끌고 와도 기요시는 기어코 자신의 호흡 안으로 끌어 당겨와 자기 색깔로 덧씌워 버린다. 서사적으로 볼 때 이 영화의 긴장감은 느슨한 고무줄 수준이다. 스파이 혹은 스파이의 아내가 일본 군부의 비윤리적인 만행을 알게 되고, 그것을 해외에 알리려는 과정은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편편하고 단조로우며 투명하게 진행된다. 반면 관객의 심장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건 감정, 멜로드라마의 기운이다. 유사쿠가 만주에서 무엇을 목격하고 왔는지, 야스하루는 유사쿠를 어떻게 의심하는지, 유사쿠와 사토코가 어떤 방식으로 일본군의 만행이 담긴 테입과 기록을 해외로 반출하려고 하는지 따위의 과정은 트릭도, 대단한 정보의 지연도 없다. 대신 인물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심리적 정황은 대부분 불투명하게 가려져 있다. 투명한 전개와 불투명한 마음. 두 요소의 방향이 어긋나거나 충돌할 때마다 영화는 사건 안쪽에서 불꽃을 튀기며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비유하자면 인물의 내면에 불꽃이 튀고, 영화는 그것을 구태여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타카하시 잇세이와 아오이 유우의 저 곱고 반듯한 얼굴 가죽 뒤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내 마음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데 상대방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 ‘스파이’는 거짓말이란 행위를 위한 하나의 방편 내지는 표상에 불과하다. 유사쿠가 어떤 방식으로 첩보활동을 벌이는지는 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건 <미션 임파서블>이 아니니까. 중요한 건 그런 행동을 벌이는 속내를 알 수 없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스파이의 ‘아내’의 시점에서 전개된다는 건 핵심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사토코가 일본 내부의 시선을 대표한다고 밝혔다. “그녀는 일본 사회 안에 머물면서 행동한다. 사회의 압력을 마주했을 때 남성들의 행동은 둘 중 하나다. 패배하여 굴복하거나 튕겨져 나가거나. 하지만 사토코로 대표되는 여성들은 그 안에서 길을 모색한다. 사회 안에 머무르면서도 자신을 굽히지 않는 강인한 면모를 부각시키고 싶었다.” 요컨대 <스파이의 아내>는 사토코가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남편을 불안한 가운데에도 믿고, 믿는 가운데에도 불안에 떨며 마음의 형태를 그려가는 과정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진정 매혹적인 부분은 일련의 불안이 어떤 형태로도 쉽사리 표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요시는 인물이 감정을 토해내거나 어떤 이미지로든 요동치게 하는 대신 화면 안 쪽에 단단히 가둔 채 기다린다. 이윽고 얇은 살얼음 아래 흐르는 불안과 의심의 격류는 서서히 진동수를 올리며 표면 위로 스며 나오기 시작한다.
먼 길을 돌아왔다. 딱 세 장면만 이야기하겠다. 세 장면 모두 불안이라는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한 단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각기 다른 떨림 혹은 끝내 버티지 못하고 쩍쩍 갈려진 균열들이다. 우선 첫 번째는 유사쿠가 만주에서 찍어온 필름을 확인하는 사토코의 표정이다. <스파이의 아내>에는 두 개의 필름이 나온다. 하나는 유사쿠가 사토코를 주인공을 찍은 극영화, 다른 하나는 유사쿠가 만주에서 찍어온 731부대의 만행이 담긴 기록이다. 관객은 두 가지 필름을 볼 때 사토코의 표정에 떠오른 미세한 차이를 목격한다. 그건 차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아니 표정이라고 할 것도 없는 비어있는 얼굴이다. 그런데 그 비어있는 얼굴 안에서 형용하기 힘든 감정들이 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관객의 머릿속에서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토코의 마음을 한 순간에 돌려세운 건 유사쿠를 향한 믿음일까, 함께 하고 싶은 애정일까, 아니면 유사쿠가 찍어온 기록의 힘일까. 영화는 끝까지 답변하지 않는다. 여기서 답을 비워두는 것이 구로사와 기요시 스타일의 멜로드라마 서스펜스다. 여느 서스펜스가 정보를 지연시킨다면 구로사와는 ‘왜’를 아예 지워버리는 것이다. 결국 관객은 내내 결과와 현상만 목격하고 원인을 제공받지 못한다. 설명되지 않는 것을 마주하는 불안. 불투명한 진실이 영화 내내 안개처럼 깔려있다.
두 번째 장면은 도항에 성공한 유사쿠가 배에서 유쾌하게 손을 흔들고 있는 장면이다. 유사쿠는 각기 다른 항구에서 함께 도항하기로 했던 사토코를 배신해 밀고한 뒤 아내를 미끼로 본인은 무사히 도항에 성공한다. 유사쿠의 진심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사코토를 온전히 믿지 못해 일부러 알리지 않은 걸까. 중반 자신의 조카를 밀고했던 사토코의 행위에 대해 복수를 가한 걸까. 아니면 아내를 아끼는 지극한 사랑으로 혼자 위험을 감수하고 해외로 떠난 걸까. 셋 중 하나 일수도 있고, 셋 다 아닐 수도 있고 세 가지 모두 일수도 있다. 답은 중요치 않다. 마찬가지로 관객은 눈앞에 주어진 결과만 목격할 뿐 인물의 속내 따윈 짐작할 수도 없다. 이 장면이 특히 흥미로운 건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유사쿠가 자신을 밀고하고 혼자 도항했다는 걸 깨달은 사코토가 헌병대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외치는 대사, “대단해!”라는 단발마다. 관객은 오직 이 리액션만으로 모든 정황과 심리를 추측해야 하는데, 공간을 찢고 나오는 듯한 이 한 마디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통쾌함, 놀라움, 분노, 수치심, 안도감. 모든 감정이 범벅이 된 듯 감히 해석할 수 없는 이 목소리는 실로 곤란하다. 곤란해서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너무 사랑스럽고 뇌리 한 구석에 각인될 것만 같다.
다른 하나는 유쾌하게 손을 흔들며 배를 타고 가는 유사쿠의 이미지다. 일련의 편집은 이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곤혹스럽게 만든다. 이것은 실제 유사쿠가 배를 타고 가는 장면의 재현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불안해하며 악몽을 꾸던 사토코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상상에 불과한 것인가. 그도 아니면 그저 영화가 보여주는 환상 내지는 친절한 설명인가. 마찬가지로 알 길이 없다. 이것을 지정하는 건 오로지 관객의 판단이다. <스파이의 아내>는 사건과 정황을 나열한 뿐 매우 헐겁게 짜여있다. 매 장면은 서로 인과관계를 맺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관객의 개입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덕분에 서사의 서스펜스로는 상당히 밋밋하고 단조로워 보이는 영화는 형용하기 힘든 불안들을 자아낸다. 이걸 두고 기분 좋은 불안, 행복한 유예라고 부른다면 과한 표현일까. 영화가 불투명해질수록 시야와 장면은 명료해지는 신기한 체험이 이어진다.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엔딩이다. 여기에 대해선 긴 설명을 붙이지 않겠다. 그럴 수 없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도시, 건물 사이를 가로질러 해변으로 나아가는 사토코는 끝내 바닥에 엎드려 절규한다. 용서하시길. 내가 가진 역량으로는 이 장면의 비장하고 아름다운 공기를 ‘울부짖음’ 따위의 추상적인 언어로 밖에 묘사할 수 없다. 어쩌면 묘사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스파이의 아내>는 서스펜스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그렇게 보고자 한다면 그럴 순 있겠지만 서스펜스 멜로드라마나 시대극, 역사물로 한정짓는 순간 범상한 무리 중 하나가 된다. 이 영화의 서사 행간이나 연결, 스토리는 그다지 중요하지도 흥미롭지도 않다. 다만 나를 뒤흔드는 건 엔딩에서 사토코가 울부짖는 순간의 형태, 사토코의 실루엣, 그 몸짓과 화면의 색, 파도의 소리 등 스크린 위에 덧씌워진 이미지 그 자체다. 그 조형적인 결과물이 눈꺼풀 안 쪽에 자리 잡아 좀처럼 지워지지 않은 채 사정없이 나를 쥐어짜고 흔든다. 이것은 당신의 목격으로만 성립하는 장면이다. 그 어떤 설명도 본질을 훼손할 뿐, 오직 보는 것으로만 전달되는 감정의 덩어리가 거기에 있다. 유사쿠의 필름을 목격했었던 사토코처럼, 스크린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음모들이 끝내 당신의 심경을 변화시킬 것이라 믿는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